영정사진을 찍는 착잡한 마음으로 아침에 돼지저금통을 사진 찍은 까닭은 이제 곧 녀석과 헤어져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2년여 동안 튼실히 키운, 성금 모금용으로 아내가 성당에서 가져온 연분홍 돼지저금통을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농성장으로 가져가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겨울이었던가요?
차가운 도심 바닥에서 노숙을 하며 어렵게 소녀상 - 그 역사의 양심을 지키는 대학생들이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 동전이 채워지면 그들에게 주리라 진즉에 결심했었는데.... 드디어 오늘이 그 결행의 날입니다.
이별사진을 찍고 꼬마돼지 베이브를 조심스레 배낭에 넣습니다. 만만찮은 무게에 등에 맨 배낭이 축 처집니다. 달포 전, 동전 투입구가 살짝 깨지는 등 플라스틱 재질이 조금 삭은 느낌이어서 조심조심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50번 버스를 타고 종로에서 내린 다음 간만에 인사동 거리를 거슬러 걸어서는 조계사 앞마당도 가로지른 후에 소녀상이 있는 일본대사관 쪽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격양된 어조의 앰프소리가 아련히 들려옵니다.
무슨 소리지? 의아해 하며 걷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 이르러서야 소음의 원천이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나오는 소리임을 깨닫습니다.
‘아, 오늘이 수요일이구나. 에고, 어쩌나? 저금통을 소녀상 지킴이 학생에게 살짝 주려했는데...’.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그래도 이왕에 온 거, 일단 집회를 지켜보면서 전달 기회를 엿보기로 마음먹고는 인근 건물 화단의 돌담 위로 냉큼 올라가 (↴)요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나서는 폴짝, 가볍게 뛰어내렸는데....
꽈당!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ㄴ’자형의 완벽한 엉덩이 착지입니다. 화단 밑의 응달 얼음에 보기 좋게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에쿠∼, 순간 주위 사람들의 작은 외침이 들렸고 투우욱! 등짝에서도 작은 파열음이 들렸습니다.
아, 그리고 누운 채로 깨달은 현실인식.
‘저...금...통! 저금통이 깨졌구나.’
멋쩍게 일어나 엉덩이의 흙먼지를 털면서, 쪽팔림과 난감함도 함께 털면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두어 걸음 옆에서는 일본 방송팀이 할머니들의 집회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시침 뚜욱!
아무렇지도 않은 양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쩍 뒤로 물러 나와서는 배낭 안의 참상을 빼꼼 살펴보는데.... 배낭 속 몰골이 차마 보기 끔찍합니다. 목불인견입니다.
조금 전 아침까지만 해도 무지 앙증맞고 귀엽던 아기돼지가 오일장터의 통돼지 바비큐 돼지껍데기마냥 바삭, 조각나 있습니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요’
이백여 년 전, 부러진 바늘에 눈물짓던 유씨부인의 마음이 지금의 제 마음입니다. 황당하고 황망합니다. 지난 2年의 켜켜 정분이 이렇게 한 순간에 끊어지다니....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기로 합니다. 중돼지 저금통을 새 식구로 맞아들여 더 빨리 포동포동 살찌우리라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지금껏 모은 적잖은 동전들이 마중물 역할을 할 것입니다.
탄핵과 대선 사이 – 그 언저리쯤에 한 번 더 배낭을 짊어지고 소녀상을 찾으리라 기대합니다.
COMING SOON입니다,
※ 추신
– 허탈한 마음에 집회장을 빠져나와 광화문 캠핑장으로 갔습니다. 캠핑장에는 기륭전자 김소연이 궁핍현대미술광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같이 점심을 먹고, 알딸딸 낮술도 한잔 걸치고 다시 돌아와 판화전시장을 둘러보는데.... 아뿔사! 그만 작품 하나와 눈이 맞고 말았습니다.
보는 순간, 작년 여름 작목반원들이 논다매 엔딩곡으로 불렀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가 불현듯 생각나 물경 10만 원이나 주고 찜했습니다. 쓰바, 순전히 낮술 탓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전시가 끝나면 조만간 작목반 식당 벽에 걸릴 겝니다.
ㅋ, 이것도 COMING SOO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