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달산 산책 오르내리며 이 골목 저 골목 골라 걷던 곳에
다세대 주택들이 빼곡 쳐들어 왔다.
지나가며 슬쩍슬쩍 넘겨다보면
조금씩 색다르게 차린 자그만 꽃밭들이 나 여기 있어! 하던
나지막한 담장들,
낮은 대문 지붕에 애완동물처럼 앉아 있던 엄청 큰 호박,
오가며 서로 낯익히던 강아지들 고양이들,
다 사라졌다.
목청 별나게 좋았던 새도.
산책길에 하나씩 점등되던 제각각 등불들,
눈 내리면 현관 앞에서
대형 눈사람처럼 웃던 몇몇 조그만 눈사람들까지
모두 주섬주섬 포대에 들어가
추억의 다락방에 쌓여 있게 되었다.
다시 꺼내더라도 윤기 다 휘발되어
전처럼 만지듯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옛 책 뒤적이다 끼워두고 잊었던 단풍잎 만나듯
꽃 대신 남새 심으며 마지막까지 버티던 집 낮은 담장에
갈잎 하나쯤 얹혀 있을까?
바람 일면 빨갛게 곤두서 바르르 떨기도 할까?
사진 〈Bing Image〉
〈신작시 : 2/3〉
큰 노을
황 동 규
가을 태안에 일 갔다가
큰 노을 만났다.
섬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붉고 퉁퉁한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를 조금씩 덮어 가다
확 풀린다.
바다를 날던 새들이 하늘 속을 날고
바다 한가운데 길고 넓은 새 물길이 태어나
하늘보다도 더 밝게 출렁인다.
달아날세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던 생각들
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이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밝은 물길에 몸 던지고
어깨춤들 춘다.
마음이 빈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이때다!
노을 한 장 마음에 떠 가지고 쾌히 떠날 채비 하니
한두 장으로 뜨기엔 너무 큰 노을.
사진 〈Bing Image〉
〈신작시 : 3/3〉
코로나 파편들
황 동 규
4인끼리만!
오랜만에 식당에서 아들 내외 손주들과 식사,
모르는 사람들끼리보다도 더 멀찍이 떨어져서.
*
보고 싶은 사람 수 줄기 시작하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8년 전에 세상 뜬 친구 김치수
어젯밤 꿈에 나타났다.
글 읽었어!
지공다스* 한 병 내밀었다.
마스크 없이.
*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트리면
혼자 없음.
*
오래 집콕하며 고이는 생각.
왜 나를 미워하는 자를 꼭 미워해야 하는가?
미워하기, 그건 너무 손쉬운데.
*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저녁이 가고
눈발 제법 흩날리는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없이 비좁고 불편하다.
이 둘을 반반씩 섞어 살다 간다면!
*
마지막 시 쓰기 좋은 저녁이 올 것이다.
* 비평가 김치수가 유학한 프랑스 론 지방 특산 와인. 대체로
가성비 높다.
사진 〈Bing Image〉
〈자선시 : 1/2〉
히아신스
황 동 규
원주에 둥지 틀고 사는 후배 시인이
코로나 확장세 뚫고 히아신스 한 다발을 보내왔다.
비닐 옷 벗기고 꽃병에 담아 탁자에 올리자
바로 이때다! 꽃들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가,
확 터지는 향기, 정신이 어찔어찔.
발코니 창문을 열어줘도
나갈 염을 않는다.
가만, 발코니에 내놔야 할까 부다.
꽃병에 손을 내밀자
꽃들이 손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고쳐 세운다.
‘지금 우리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 살고 있어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이라?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도통 희미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게 있긴 있었겠지.
히아신스에겐 그게 바로 지금이군.
심호흡을 한다.
매해 몇 번 만나는 국화 향기, 잘 씻긴 하양이나 노랑이라면
히아신스 향기는 무게 살짝 입힌 은빛.
찬찬히 허파에 넣는다.
감각들이 바빠진다.
다시 심호흡을 한다.
허파꽈리들이 무겁게 열렸다 닫히고
숨에 무게가 실린다.
그 누군가가 한창 삶 사는 걸 건드리지 않는 일은
이 우주에 몸담고 있는 모든 동승자의 도리가 아닐까.
사진 〈Bing Image〉
〈자선시 : 2/2〉
그날 저녁
황 동 규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가만, 근자에 아파트와 빌라들 가득 들어서
둘러볼 골목 별로 남지 않았군.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낮비 잠시 뿌렸는지 하늘과 숲이 밝다.
하직 인사 없이 헤어진 다람쥐가 나를 알아볼까?
약수터에 전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떠 있을까?
그런 호사스런 생각은 삼가기로 하자.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를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 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벤치 하나, 둘이 서로 얽히듯 서 있는 나무, 약수터가 지나간다.
하늘에 샛별이 돋는다.
이 별 뜨면 가던 걸음 멈추고
무언가 맹세하곤 했지.
참 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슬그머니 바닥을 지울 때까지.
〈황 동 규〉
△ 1958년 '현대문학' 등단
△ 시집 '풍장', '사는 기쁨', '연옥의 봄',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
△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호암예술상' 등 수상
Beethoven: Adelaïde, Op.46 · Dietrich Fischer-Dieskau · Jörg De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