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요한이 복음대로 행하고 누리며 증거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위협들을 당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사실상 말이 위협인 것이지 구주 예수님까지 음모와 모함과 간계들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었던 권력 있는 주동자들이었기에 그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적, 인간적, 상식적으로 심히 위태한 상황이었음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박해자들, 대적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게 했던 예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구원자시라는 사실에다가 실제적인 부활 사건까지 증거하고 외치면서 돌아 다녔으며,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충만하심 가운데 그들이 부인하고 왜곡하며 거짓 선동하고 감추고 싶어 했던 다양한 모양의 응답과 이적과 사건들까지 그러한 제자들과 함께 생생하고 강렬하며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었기에..
그 당시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제자들마다 구주 예수님과 같이 어떤 식으로든 죽임을 당하기가 쉬웠던 때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그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5장 29~33절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어쨌든 그러한 모든 상황과 형편들, 위기와 급박함들 속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외칠 정도의 말씀의 신앙이었고, 심지어는 사도행전 5장 40~41절에서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라고 증거되어 있듯이 그러한 박해까지도 은혜로 여기며 기뻐했을 정도의 말씀의 열정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히 그 당시의 베드로는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직전의 가장 중대한 순간에 오히려 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던 때와는 정반대였던 것으로 어느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단적으로 말하라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말씀의 신앙, 목숨까지 걸었던 말씀의 열정이었던 것으로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모두가 다 같은 믿음인 것일 수는 없다는 사실과 현실임을 감안할 때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에 있어 그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들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아래 본문의 베드로 등과 같은 믿음, 곧 본질적으로는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이 아주 특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 시대에 있어서도 한 두 구절의 말씀으로 인해 목숨까지 걸었던 요셉이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다니엘이나 모르드개 등을 통해 하나님으로 인한 응답과 예비하심들, 이적과 역전들이 어느 정도로까지 생생하고 강렬했는지를 성경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도 바로 그러한 베드로를 통해, 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렇게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그 정도로까지 치열했던 말씀의 신앙이었던 베드로를 통해 한 번의 증거를 통해 3000명이나 회심하며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고, 구주 예수님의 이름 한 번으로 성전 미문에서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그 자리에서 낫게 되었으며, 또한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았던 애니아가 한 순간에 치료되었고, 심지어는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게 되었으며, 게다가 이방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있어 직접적인 도구와 통로가 되었고, 더군다나 베드로 그 자신 또한 헤롯에 의해 순교 당하기 직전에 삼엄한 감옥에서 하나님의 사자로 인해 기이한 방법으로 도망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러한 사도행전이나 4복음서, 베드로 전후서 등을 통해 2000년 교회사에 있어서도,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이루 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과 교회들 가운데, 땅 끝, 지구 반대편에 이르기까지,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에 이르기까지도 선한 영향력과 역사와 열매들이 되었거나 되고 있거나 계속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금도 어렵거나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근원적인 면에 있어서 그러한 베드로에게서와 같이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면서 말씀 그대로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말로 근본적으로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고,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에 있어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서도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고,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으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권능으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하나하나 모두 실제와 경험들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 말해 말씀의 영이 아니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다른 그 무엇보다도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치열하고 절실하며 뜨거운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느냐, 곧 그것부터가 우리 인생들의 힘이나 세상적인 방법들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야 하는 것인데 어쨌든 얼마나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은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어느 정도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가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온갖 응답과 승리와 이적과 복들 등의 실제와 경험들, 생생함과 강렬함들에 있어서 생각 이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자 방증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에 있어서도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의 그러한 믿음의 몸부림과 결단들을 통해서, 좀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 곧 말씀대로의 믿음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그 당사자와 그 지경들 뿐 아니라 그 나라와 열방, 땅 끝까지, 더 나아가 세상 끝 날에 이르기까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어 밤새 부풀게 하고, 겨자씨가 자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싹이 나고 가지가 뻗으며 새들이 깃들이게 되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되고, 마치 오병이어의 역사와도 같이 되는 듯한 영향력과 역사들, 변화와 열매들이 얼마든지 될 수도 있는 것임을, 결코 불가능일 수가 없는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약속하는 것이고 예비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사도행전4:18~2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5월 16일(목)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