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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가 200년 동안이나 태평을 누린 탓에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하다가, 총을 쏘고 칼을 멘 도적들이 갑작스레 동남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서울, 개성(開城), 평양(平壤)을 모조리 빼앗기고 일곱 도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도원수(都元帥) 권공 율(權公慄)이 서울 근처에서 왜적들을 노려 큰 도적을 잡았고, 통제사(統制使) 이공 순신(李公舜臣)이 바다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니 이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명(明) 나라의 육군과 해군이 무엇을 믿고 힘을 썼을 것이며, 종묘 사직의 무궁한 국운(國運)이 어디에 힘입어 다시 이어졌겠는가. 그런데 도원수의 무덤에는 이미 큰 비석이 세워졌건만, 통제사의 무덤에는 아직도 사적(事蹟)을 기록한 비문이 없으니, 이 어찌 사대부들에게 남은 유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공의 외손(外孫)인 홍군 우기(洪君宇紀)가 판서 이식(李植)이 지은 공의 시장(諡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며 비문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늙어서 나이가 80에 가까운 몸이라 붓과 벼루를 멀리하였으니, 공의 기개와 공훈을 참으로 만분의 일도 감히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의 깨끗한 충성과 큰 절개를 내가 마음속으로 우러른 것은 어렸을 적부터였으니, 어찌 감히 뜬 말로 거짓 사양하여 본디부터 한번 이야기해 보고 싶어하던 바를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서술하는 바이다.
공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휘는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며, 세종조(世宗朝) 때 대제학을 지낸 정정공(貞靖公) 이변(李邊)의 5대손이다.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 1)에 태어났는데, 어렸을 적부터 이미 영특하여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는 진 치는 시늉을 하면서 놀아 대장으로 높임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으며, 장성해서는 활 쏘는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무경(武經) 가운데 《황석공서(黃石公書)》를 강할 적에 시관(試官)이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고 했으니, 과연 죽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공이 답하기를, “한(漢) 나라 혜제(惠帝) 6년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는 내용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적혀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 놀아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시관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무인(武人)이 능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공(相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공과 더불어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라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 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 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공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어서 공을 맞이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세도가에게 발을 붙이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중매쟁이를 쫓아 버렸다.
공은 변장(邊將)이 되거나 군관(軍官)이 되었을 적에 한 가지도 사욕(私慾)을 채우는 일이 없었으며, 상관이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철저히 말하여 바로잡았는데, 비록 미움을 받을망정 꺼리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으로 있을 때 오랑캐 적 울기내(鬱其乃)가 오랫동안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공이 울기내를 유인하여 포박해 왔다. 그러자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그 공(功)을 시기하여 군사를 제멋대로 부렸다고 장계하고 상을 주지 않았다.
공이 건원보에 있는 동안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고 왔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곧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가 겨우 보름 만에 다시 조산 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순찰사(巡察使)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雁)에 둔전(屯田)을 개설하고 공을 시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 내고 그 괴수를 쏘아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군관(軍官)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수금하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상께서는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고 죄를 인 채 종군(從軍)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제수되었다. 경인년(1590)에 서애가 힘써 조정에 천거하여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로 승진되었고, 얼마 있다가 자급이 올라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이 너무 빨리 승진되었다고 하여 개정되었다. 신묘년(1591)에 진도 군수(珍島郡守)와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발탁되었다. 이때 왜놈들과 흔단이 다시 벌어졌으므로, 공이 이것을 깊이 걱정하여 날마다 방비할 기구를 수리하고 거북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판자로 덮고 못을 꽂았으며, 군사를 감추고 대포를 설치해 마침내 이에 힘입어 승전을 거둘 수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적이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거침없이 몰아쳐오자, 공은 군사를 이동시켜 왜적들을 치려고 하였는데, 부하들이 모두 전라도의 진(鎭)을 떠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들이 할 일은 오직 왜적을 치다가 죽는 일뿐이다.” 하고, 여러 곳의 군사를 합하여 떠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사람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해 왔다. 공은 군사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나아가 만호(萬戶) 이운룡(李雲龍), 우치적(禹致績) 등을 선봉으로 삼아 먼저 왜적선(倭賊船) 30척을 깨뜨렸다. 고성(固城)에 이르러 서울이 함락되고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서쪽을 향하여 통곡한 다음 군사를 이끌고 다시 본영(本營)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또 구원을 요청하므로 공은 다시 노량(露梁)으로 달려가 13척을 깨뜨리고 사천(泗川)까지 추격하여 싸웠다. 그때 공은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오히려 활을 놓지 않고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하였으므로, 총에 맞은 줄 아무도 몰랐다.
6월에 또 당진(唐津)에서 싸웠다. 왜적들이 그림을 그린 누선(樓船)을 타고 왔는데, 편전(片箭)을 쏘아 금관(金冠)을 쓰고 금포(錦袍)를 입은 괴수를 죽였으며, 남은 졸병들을 다 무찔렀다. 정오에 왜선이 또다시 대거 쳐들어왔다. 공은 빼앗은 왜선(倭船)을 앞줄에 세웠다가 왜적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 되는 곳에서 불을 질렀다. 그러자 화약이 폭발하고 불꽃이 치솟으면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나니, 적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 역시 달려와서 고성(固城)에서 합세하여 싸워 또다시 누선에 타고 있던 괴수를 죽이고 30여 척을 깨뜨렸다. 그러자 왜적들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으므로, 드디어 이억기와 함께 본영으로 돌아왔다.
왜적들이 또 호남(湖南)으로 향하였으므로 공이 고성으로 나아갔다. 적선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왔는데, 공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하면서 왜적들을 꾀어 낸 다음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서 70여 척을 깨뜨렸다. 그러자 왜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가 몸을 빼어 달아났으며, 죽은 자가 거의 1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왜병들이 놀라 떨었다.
공은 진중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계엄하여 일찍이 갑옷을 벗고서 누운 적이 없었다. 어느날 밤에 달빛이 몹시 밝았는데, 공이 갑자기 일어나 술 한 잔을 마시고는 모든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왜적들은 간사한 꾀가 많으니, 달이 없을 때야 당연히 우리를 습격해 오겠지만, 달이 밝을 적에도 또한 습격해 올 것이므로, 이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로 하여금 닻을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보초선에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보고하였는데, 달이 서산에 걸렸을 즈음에 그림자를 타고 어둠 속으로 오는 적선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중군(中軍)이 대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자 여러 배에서 모두 호응하니, 왜적들은 우리측에서 방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이 공을 보고 신(神)이라고 일컬었다.
공이 부산을 들이쳐서 왜적들의 근거지를 엎어 버리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목책(木柵)을 치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으므로, 마침내 빈 배 100여 척을 불 지르고 돌아왔다. 공이 잇달아 승첩(勝捷)을 아뢰자, 상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자급을 올리고 교서(敎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공이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를 제압하게 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허락하고 마침내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의 제도를 두어 공으로 하여금 겸하여 거느리게 하니, 통영(統營)의 제도가 이로부터 시작되게 되었다.
공이 별도로 500석의 쌀을 모아 봉해 두자,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상께서 의주(義州)에 계신데, 만일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시게 된다면, 배를 가지고 가서 상을 모시고 와 나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 이것은 그때 상께서 드실 양식으로 쓸 것이다.” 하였는바, 생각의 원대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원균은 성품이 본디 급하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또 스스로 선배라 하여 공의 아래에 있기를 부끄러이 여겨서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공은 입을 다문 채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원균으로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삼았다. 그러자 원균은 조정의 대신들과 사귀어 온갖 방법으로 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적장(賊將)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 형상을 짓고서, 요시라(要時羅)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먼저 청정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 말을 곧이듣고 공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라고 재촉하였다. 공은 왜적들의 간사한 술책을 알아채고는 편의대로 하려고 하면서 난색을 보이자, 말하는 자들이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 2월에 공을 옥에 가두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치계(馳啓)하기를, “왜적들이 꺼리는 바는 해군(海軍)이니, 이순신(李舜臣)을 체차해서는 안 되고, 원균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이원익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 나라 일을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군기(軍機)는 멀리 앉아서 헤아릴 수가 없는 법으로, 이순신이 진격하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번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모부인(母夫人)이 아산(牙山)에서 돌아가셨는데, 공이 울부짖으면서 말하기를, “ 나라에 충성을 다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를 섬기려 하였건만 이미 돌아가시고 말았구나.”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공이 진영에 있을 적에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모든 장수들과 함께 거기에서 군사(軍事)를 논의하였다. 그런데 원균이 공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공이 하던 일을 모두 변경하여, 그 집에 첩을 두고 울타리로 둘러막았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원균은 술 마시기만을 일삼아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시라가 와서 말하기를, “청정의 후원 군사가 나오고 있으니, 그것을 막아쳐야 한다.” 하니, 조정에서는 또 나아가서 싸우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7월에 원균이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나갔는데, 왜적들이 야음을 틈타 엄습하여 원균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나다가 죽고, 군함 100여 척도 모두 한산도에서 깨어지고 말았다. 이에 왜적들이 바다로부터 상륙하여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니,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을 상중(喪中)에 기용하여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공은 10여 기(騎)를 거느리고 순천(順天)으로 가서 남은 배 10여 척을 얻고 흩어진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어란도(於蘭島)에서 적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해군이 약하다는 이유로 공에게 육지에서 싸울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공은 말하기를, “왜적들이 곧바로 충청도와 전라도로 쳐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해군이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戰船)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호남의 피란선(避亂船)들 가운데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해 있는 것이 100여 척이었는데, 공은 그들과 약속한 다음 진을 친 후방에 그 배들을 늘어세워 응원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공의 배 10여 척이 앞에 나아가서 벽파정(碧波亭)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웠는데, 왜적선 수백 척이 와서 덮치는데도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진을 정돈하여 왜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들이 가까이 오자, 대포와 활을 한꺼번에 쏘았으며, 군사들도 모두 죽기로 싸웠다. 그러자 왜적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는데, 왜적 가운데 명장(名將)인 마다시(馬多時)의 목까지 베어 군사들의 위엄이 크게 떨쳤다. 승첩을 아뢰자, 상께서 숭품(崇品)의 자급을 내려 상을 주려고 하였는데, 말하는 자들이 이미 지위와 녹봉이 높다는 이유로 저지하였다.
이때 명 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서울에 있다가 글을 보내어 치하하기를, “근래에 이런 승첩은 없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괘홍(掛紅)하고자 하나, 길이 멀어서 가지 못합니다.” 하고는,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였는데, 괘홍이란 것은 중국 사람들이 폐백(幣帛)으로써 서로 축하하는 예식이다.
무술년(1598, 선조 31) 봄에 진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겼다. 공은 비록 상중에 기용되어 군문(軍門)에 종사하기는 하였으나, 날마다 겨우 몇 홉의 밥만 먹은 탓에 얼굴이 몹시 여위었다. 그러자 상께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권도(權道)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이해 가을에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해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자못 우리 백성들을 침학하여 성가시게 하였다. 이에 공이 군중에 영을 내려 막사를 뜯게 하니, 도독이 황급히 달려와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공이 답하기를, “우리 군사와 백성들은 귀국에서 군사들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기다리는 듯한 심정이었는데, 정작 와서는 약탈만을 일삼으므로 모두들 도망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들 어찌 혼자 남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진린이 공의 손을 잡고 말렸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귀국 군사들이 나를 속국(屬國)의 신하라고 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고 있는데, 만일 편의에 따라 금지시킬 권한을 준다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진린이 허락하였다. 이때부터는 온 섬 안이 다시 편안해졌다.
편장(褊將) 송여종(宋汝悰)이 명 나라의 배와 함께 왜적들을 쳐서 70명의 목을 베었는데, 명 나라 군사들은 한 명도 베지 못하였다. 그러자 진린이 부끄러워하면서 성을 내므로, 공이 위로하기를, “대인께서 와서 우리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으니, 우리 군사들의 승첩이 곧 귀국 군사의 승첩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내가 그 공을 차지하겠습니까. 얻은 바를 모두 바치겠습니다.” 하니, 진린이 몹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송여종이 실망하여 하소연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썩은 대가리가 무엇이 아까운가. 네 공은 내가 다 장계로 아뢸 것이다.” 하니, 송여종도 또한 승복하였다.
진린이, 공이 군사를 다스리고 계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탄복해 말하기를, “공은 실로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천하의 대장이 될 것이다.” 하고, 상께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 통제사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고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개 진심으로 탄복해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명 나라 황제에게까지 아뢰니, 황제 또한 가상하게 여겨 공에게 도독인(都督印)을 내렸는데, 이 도장은 지금 통제영(統制營)에 보관되어 있다.
9월에 명 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중국의 묘병(苗兵) 1만 5000명을 거느리고 예교(曳橋) 북쪽에 진을 치고서, 10월에 해군과 더불어 왜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공이 도독과 함께 나아가 싸우던 중에 첨사(僉使) 황세득(黃世得)이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황세득은 공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들어와 조상하니, 공은 말하기를, “황세득이 나라 일에 죽었으니, 그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였다.
행장(行長)이 도독에게 뇌물을 보내어 퇴각해 주기를 요청하니, 도독이 공을 퇴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대장이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고, 원수인 왜적들을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도독이 부끄러워하였다. 행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조선 군사는 마땅히 명 나라 군사와 따로 진을 쳐야 할 것인데, 같은 곳에 함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땅에 진 치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일로, 왜적이 이러쿵저러쿵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행장이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에 있는 왜적들과 더불어 횃불을 들어 서로 신호하므로, 공은 군사를 단속하여 대기하였다. 남해(南海)의 적이 노량(露梁)에 와서 정박해 있는 자가 무수히 많았는데, 공이 도독과 함께 밤 2경에 출발하면서 하늘에 빌어 말하기를, “이 왜적들을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4경에 왜적을 만나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침에 이르러서 크게 깨뜨리고 적선 200여 척을 불질렀다. 이어 남해(南海) 지경까지 추격하여 직접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하던 중에 날아드는 탄환에 맞았다. 좌우에서 공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공은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숨지니, 향년이 54세였다.
공의 조카 이완(李莞)이 공의 말대로 배 위에 서서 기를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기를 공과 같이 하였다. 왜적들이 도독의 배를 에워싸서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대장선에서 깃발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모두 달려가 구원해 내었다. 한낮이 되어서야 왜적이 크게 패하여 먼 바다 밖으로 도망쳤다. 도독이 배를 돌려 가까이 대고는 말하기를, “통제공(統制公)은 어서 나오시오.” 하고 부르자, 이완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하니, 도독이 뛰면서 배 위에 세 번이나 엎드리고는 말하기를, “죽은 뒤에도 능히 나를 구원해 주었다.” 하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으며, 두 진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영구를 아산(牙山)으로 모시고 올 적에는 모든 백성들과 선비들이 울부짖으면서 제사를 올렸는데, 천 리에 끊이지 않았다. 상께서도 제관(祭官)을 보내어 조상(弔喪)하면서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1등 공신으로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을 추증하였으며,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좌수영(左水營) 근처에 사당을 세워 충민사(忠愍祠)라고 사액(賜額)하였으며, 호남 사람들은 수영의 동쪽 산마루에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 32) 2월에 아산의 빙항(氷項)에 장사지내었는데, 바로 선영이 있는 곳이다.
공은 담력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뜻과 지조가 단단하고 확고하였다. 몸가짐이 법도 있는 학자와 같이 스스로를 검속하였고,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났으며, 집안에서의 행실이 돈독하였다. 일찍 죽은 두 형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는데, 일용(日用)하는 물품과 혼사(婚事)하는 예절까지도 반드시 조카를 먼저하고 자기 자식은 뒤에 했다. 혹 죄 없이 옥에 갇혔을 적에도 죽고 사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공은 수행한 바가 근본이 있었으므로 지혜와 계책을 내면 한 가지도 빠짐이 없었고, 적의 정세를 헤아리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호서와 호남 수천 리 땅을 온전하게 보전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이 되게 하였다.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 무후(諸葛武侯)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뿐이다. 그러니 이른바 ‘세 사람과는 다르다.’고 한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그 공은 온 나라를 뒤덮었고 이름은 천하에 들렸으니, 아아, 위대하기도 하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가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는도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하였는데, 이 시를 외우는 자들 가운데 눈물을 지으면서 격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휘는 정(貞)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백록(百祿)으로, 선교랑(宣敎郞)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를 지냈는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거(琚)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초계 변씨(草溪卞氏)이다.
공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은 현감 이회(李薈)이고, 차남은 정랑 이예(李䓲)이다. 삼남은 이면(李葂)으로, 공이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여 몹시 사랑하였는데, 임진년에 바닷가로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던 중 왜적을 만나 혼자 싸우다가 죽으니, 나이가 17세였다. 딸은 사인(士人) 홍비(洪棐)에게 시집갔다.
이회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참봉 이지백(李之白)이고, 차남은 이지석(李之晳)이며, 딸은 윤헌징(尹獻徵)에게 시집갔다. 이예는 자식이 없어서 이지석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홍비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우태(洪宇泰)이고, 차남은 현감 홍우기(洪宇紀)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한 사람이다. 삼남은 홍우형(洪宇迥)이고, 사남은 홍진하(洪振夏)이고, 딸은 윤수경(尹守慶)에게 시집갔다.
이지백은 겨우 9품의 벼슬밖에 하지 못했고, 또 아들이 없어서 이지석의 맏아들 이광윤(李光胤)을 후사로 삼았다. 이지석은 두 번 장가들어서 6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후사가 또 어찌하여 이처럼 번성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뒷날에 크게 되려는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지난 옛날 임진년 바로 그해에 / 昔歲龍蛇
바다에는 고래 같은 파도 일어나 / 海動鯨波
하늘 향해 화살을 쏜 예와 같았네 / 射天之羿
북해쯤은 뛰어넘을 수 있다하며 / 謂北可超
다리를 놓은 듯이 배를 띄워서 / 舟泛如橋
그 기세 요계까지 넘보았다네 / 氣凌遼薊
세 도읍지 이미 모두 유린되었고 / 三都旣躪
일곱 도가 모두 불에 타 버렸는데 / 七省皆燼
그 누가 옷소매를 떨치었는가 / 孰有投袂
우리 님이 떨치어 일어나셔서 / 公乃奮起
어금니를 다물음에 이 부서졌고 / 嚼而齒碎
죽기로써 스스로 맹세하셨네 / 以死自誓
온교처럼 눈물을 흩뿌리었고 / 溫嶠灑泣
사아처럼 뱃전을 두드리심에 / 士雅擊楫
통제사의 직책을 맡으시었네 / 職是統制
왜적들이 간첩 놓아 이간질함에 / 敵間謀猜
님 대신할 다른 장수 내려왔으니 / 他將已來
무슨 죄로 우리 님 잡아갔는가 / 何罪而逮
거룩하신 임금께서 은혜 내리고 / 聖主垂恩
어진 재상 안 된다고 말을 올려서 / 賢相進言
패한 뒤에 장수 자리 이어받았네 / 敗而後繼
펄럭이는 깃발 새로 빛을 발하고 / 旌旗變色
군대의 기율 이미 엄숙한데다 / 紀律嚴肅
군사들의 마음 더욱 예리해졌네 / 軍心益銳
벽파정 싸움에서 승리 거두어 / 碧波一捷
위엄과 명성 더욱 떨치어지자 / 威聲震疊
굳세었던 적 갑자기 나약해졌네 / 堅敵忽脆
달아나는 도적들 마음 급해서 / 逋寇劻勷
동쪽으로 문득 바다 바라다봄에 / 却望東洋
도망쳐 돌아갈 맘 이미 생겼네 / 已生歸計
적을 어찌 놓아 줄 수가 있으랴 / 敵不可縱
우리 군사 용기 더욱 백배하여서 / 戰士倍勇
나라를 회복할 형세 있었네 / 恢復之勢
개선가를 올리려고 하는 그때에 / 凱歌將獻
유성이 빛을 내며 떨어지더니 / 芒星赤隕
우리 님 그예 그만 돌아가셨네 / 公朝上帝
양의가 남은 군사 정돈을 하자 / 楊儀整軍중달은 이미 벌써 도망을 침에 / 仲達已奔
일만 군사 모두 다 눈물 뿌렸네 / 萬人一涕
슬픈 기운 봉영에 진동을 하고 / 悲動蓬瀛
흘린 눈물 푸른 바다 넘쳐 흐르니 / 淚溢滄溟
그 이름은 백대토록 흘러 전하리 / 名流百世
붉은 명정 바람에 펄럭이는데 / 丹旌低昻
사민들은 마치 부모 잃은 듯하여 / 士民如喪
상여 오는 천리 길에 제사지냈네 / 千里設祭
공은 높고 지위는 극에 달하여 / 功高位極
님의 화상 기린각에 걸리었으니 / 像留麟閣
우리 님 떠나가신 것이 아니네 / 我公非逝
죽음을 슬퍼하는 예의 융숭해 / 隱卒崇終
기련산을 본떠서 무덤 만들어 / 祁連象封
종시토록 은혜를 보존하였네 / 終始其惠
충민이란 사당이 세워져 있어 / 忠愍有祠
은혜로운 편액 글씨 아름다움에 / 恩額淋漓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는도다 / 春秋牲幣
평생토록 우리 님 그리건마는 / 平生景慕
황천 가는 길 이미 막혀 있으니 / 已隔泉路
두 눈에 흐른 눈물 어찌 마르랴 / 眼淚何霽
문장 짓는 솜씨 비록 거칠긴 해도 / 荒詞雖耄
부끄러움 없는 유도 비문 같으니 / 無媿有道
양과 돼지 묶어 둘 수는 있으리 / 羊豕可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