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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11월 21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7)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11월 21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637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637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일곱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Chapter Eleven Right Mindfulness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70페이지 7째 줄부터 81페이지 15째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제2부 팔정도(八正道)
CHAPTER ELEVEN Right Mindfulness
11장 정념(正念)
The fourth element of our body is air. The best way to experience the air element is the practice of mindful breathing. "Breathing in, I know I am breathing in. Breathing out, I know I am breathing out." After saying these sentences, we can abbreviate them by saying "In" as we breath in, and "Out" as we breath out. We don't try to control our breathing. Whether our in-breath is long or short, deep or shallow, we just breathe naturally and shine the light of mindfulness on it. When we do this, we notice that, in fact, our breathing does become slower and deeper naturally. "Breathing in, my in-breath has become deep. Breathing out, my out-breath has become slow." Now we can practice, "Deep/slow." We don't have to make an effort. It just becomes deeper and slower by itself, and we recognize that.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네 번째 요소는 바람의 요소이다. 바람의 요소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을 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있다는 것을 안다. 숨을 내쉬면, 나는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숨을 들이쉴 때는 속으로 ‘들어옴’ 그리고 숨을 내쉴 때는 ‘나감’ 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호흡을 조절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들숨이 길든 짧든, 깊든 얕든 간에 그저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면서 알아차림의 빛을 비춰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서 실제로 호흡이 자연스럽게 느리고도 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숨을 들이쉬니, 들숨이 깊어졌다. 숨을 내쉬니 날숨이 느려졌다.” 이제 ‘깊음/느림’을 수행한다. 억지로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호흡은 저절로 깊어지고 느려질 것이므로 그것을 인지하기만 하면 된다.
Later on, you will notice that you have become calmer and more at ease. "Breathing in, I feel calm. Breathing out, I feel at ease. I am not struggling anymore. Calm/ease." And then, "Breathing in, I smile. Breathing out, I release all my worries and anxieties. Smile/release." We are able to smile to ourselves and release all our worries. There are more than three hundred muscles in our face, and when we know how to breath in and smile, these muscles can relax. This is "mouth yoga." We smile and we are able to release all of our feelings and emotions. The last practice is, "Breathing in, I dwell deeply in the present moment. Breathing out, I know this is a wonderful moment. Present moment/wonderful moment." Nothing is more precious than being in the present moment, fully alive and fully aware.
나중에는 자신이 보다 평온하고 편안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숨을 들이쉬니, 나는 평온하다. 숨을 내쉬니, 나는 편안하다. 나는 더 이상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평온/편안.” 그리고 나서 이렇게 한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웃는다. 숨을 내쉬며, 나는 모든 걱정과 시름을 내려놓는다. 웃음/내려놓음.”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미소 짓고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얼굴에는 삼 백 개가 넘는 근육이 있는데, 숨을 들이마시면서 웃는 법을 알게 되면 그 근육들의 긴장이 풀린다. 이것이 바로 ‘입으로 하는 요가’이다. 웃으면 모든 느낌과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마지막 수행은 다음과 같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숨을 내쉬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멋진 순간임을 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 즉 완전히 살아있고 완전히 깨어있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In, out
Deep, slow
Calm, ease
Smile, release
Present moment, wonderful moment
들어옴, 나감
깊음, 느림
평온, 편안
웃음, 내려놓음
지금 이 순간, 멋진 순간
If you use this poem during sitting or walking meditation, it can be very nourishing and healing. Practice each line for as long as you wish.
좌선이나 행선, 즉 걷기 명상을 할 때 이 시를 외우면, 심신을 치유하고 기운을 북돋는 데 아주 커다란 효과를 볼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각각의 행에 나오는 말대로 수행하면 된다.
Another practice to help us be aware of our breathing is counting. As you breathe in, count "one," and as you breathe out, count "one" again. Then "Two/two," "Three/three," until you arrive at ten. After that, go back in the other direction: "Ten/ten," "Nine/nine," and so on, until you arrive back at one. If you don't get lost, you know that you have good concentration. If you do get lost, go back to "one," and begin again. Relax. It's only a game. When you succeed in counting, you can drop the numbers if you like and just say "in" and "out." Conscious breathing is a joy. When I discovered the Discourse on the Full Awareness of Breathing, I felt I was the happiest person on Earth. These exercises have been transmitted to us by a community that has been practicing them for 2,600 years.5
호흡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수행법은 숫자를 세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
서, ‘하나’라고 세고 숨을 내쉬면서 다시 ‘하나’라고 센다. 그리고는 열이 될 때까지 ‘둘/둘’, ‘셋/셋’이라고 센다. 그리고 나서 반대로 해본다. ‘열/열’, ‘아홉/아홉’, 이런 식으로 하나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숫자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집중 상태가 좋은 것이다. 잊어버렸다면, ‘하나’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 이것은 다만 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숫자를 틀리지 않고 셀 수 있게 되었는데, 그저 ‘들어옴’, ‘나감’이라고 하는 것이 좋으면 숫자 세는 일을 안 해도 된다. 의식적인 호흡을 하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호흡의 완전한 인식에 관한 말씀>을 접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수행법은 2,600년 동안 그것을 수행해오고 있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주5)
5 See Thich Nhat Hanh, Breathe! You Are Alive.
주5) Thich Nhat Hanh, Breathe! You Are Alive.를 보라.
The second establishment is mindfulness of the feelings in the feelings. The Abhidharma authors listed fifty-one kinds of mental formations. Feelings (vedana) is one of them. In us, there is a river of feelings in which every drop of water is a different feeling. To observe our feelings, we just sit on the riverbank and identify each feeling as it flows by and disappears. Feelings are either pleasant, unpleasant, or neutral.
두 번째 확립은 ‘느낌에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부파불교는 51가지 심소법(心所法)을 열거하고 있다. 느낌[受(수), vedana]은 그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느낌으로 이루어진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느낌이다. 느낌을 관찰하려면, 그저 그 강둑에 자리 잡고 앉아 각각의 느낌이 나타나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확인하면 된다. 느낌의 종류에는 즐거운 것이나 즐겁지 못한 것 아니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것이 있다.
When we have a pleasant feeling, we may have a tendency to cling to it, and when we have an unpleasant feeling, we may be inclined to chase it away. But it is more effective in both cases to return to our breathing and simply observe the feeling, identifying it silently: "Breathing in, I know a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is in me. Breathing out, I know there is a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in me." Calling a feeling by its name, such as "joy," "happiness," "anger," or "sorrow," helps us identify and see it deeply. Within a fraction of a second, many feelings can arise.
즐거운 느낌이 들 때면,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려는 경향을 보이고, 즐겁지 못한 느낌이 들 때면, 쫓아버리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양자의 경우에 호흡으로 되돌아와 다만 느낌을 관찰하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용히 확인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즐거운(또는 즐겁지 못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안다. 숨을 내쉬며, 나는 즐거운(또는 즐겁지 못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안다.” 어떤 느낌을 가령 ‘즐거움’, ‘행복’, ‘화’ 또는 슬픔 같이 그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을 깊이 살펴보고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면 한 찰나에도 수많은 느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f our breathing is light and calm — a natural result of conscious breathing — our mind and body will slowly become light, calm, and clear, and our feelings also. Our feelings are not separate from us or caused just by something outside of us. Our feelings are us, and, for that moment, we are those feelings. We needn't be intoxicated or terrorized by them, nor do we need to reject them. The practice of not clinging to or rejecting feelings is an important part of meditation. If we face our feelings with care, affection, and nonviolence, we can transform them into a kind of energy that is healthy and nourishing. When a feeling arises, Right Mindfulness identifies it, simply recognizes what is there and whether it is pleasant, unpleasant, or neutral. Right Mindfulness is like a mother. When her child is sweet, she loves him, and when her child is crying, she still loves him. Everything that takes place in our body and our mind needs to be looked after equally. We don't fight. We say hello to our feeling so we can get to know each other better. Then, the next time that feeling arises, we will be able to greet it even more calmly.
의식적인 호흡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호흡이 가볍고 잔잔해지면, 심신은 천천히 가볍고 평온하고 맑아지고 느낌 역시 그렇게 된다. 느낌은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거나 단지 우리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느낌이 곧 우리이고 그 순간 우리는 곧 그 느낌이 된다. 느낌에 도취되거나 겁먹을 필요도 없고 그것을 거부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느낌에 집착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수행은 명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주의 깊게 다정하게 부드럽게 느낌을 대하면, 느낌을 건강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느낌이 일어나면 정념(正念)을 통해 느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 다만 그것이 무엇이고 즐거운 것인지 즐겁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중립적인 것인지를 인지해야 한다. 정념(正念)은 어머니와도 같다. 어머니는 아이가 재롱을 피울 때나 울 때나 관계없이 언제나 아이를 사랑한다. 우리는 심신에 걸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똑같이 보살펴 주어야 한다. 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느낌에 인사를 건네야 서로를 점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음번에 그 느낌이 일어날 때면 훨씬 더 차분하게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다.
We can embrace all of our feelings, even difficult ones like anger. Anger is a fire burning inside us, filling our whole being with smoke. When we are angry, we need to calm ourselves: "Breathing in, I calm my anger. Breathing out, I take care of my anger." As soon as a mother takes her crying baby into her arms, the baby already feels some relief. When we embrace our anger with Right Mindfulness, we suffer less right away.
이제 우리는 모든 느낌 심지어 화처럼 까다로운 것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화는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로 심신 전부를 연기로 가득 차게 한다. 화가 날 때면 무엇보다 진정을 해야 한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화를 진정시킨다. 숨을 내쉬며, 나는 화를 보살핀다.” 우는 아이를 어머니가 두 팔로 안아주면 아이는 곧 안도감을 느낀다. 정념(正念)으로 화를 껴안으면 즉시 고통이 경감(輕減)된다.
We all have difficult emotions, but if we allow them to dominate us, we will become depleted. Emotions become strong when we do not know how to look after them. When our feelings are stronger than our mindfulness, we suffer. But if we practice conscious breathing day after day, mindfulness will become a habit. Don't wait to begin to practice until you are overwhelmed by a feeling. It may be too late.
우리 모두는 다루기 까다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심신이 고갈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보살피는 법을 모를 때 강해진다. 느낌이 정념(正念)보다 강하게 되면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의식적인 호흡을 날마다 수행하면, 정념은 습관이 될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고 나서야 수행을 시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무 늦은 일일지도 모른다.
The third establishment is mindfulness of the mind (chitta) in the mind. To be aware of the mind is to be aware of the mental formations (chitta samskara). "Formations" (samskara) is a technical term in Buddhism. Anything that is "formed," anything that is made of something else, is a formation. A flower is a formation. Our anger is a formation, a mental formation. Some mental formations are present all the time and are called "universal"(contact, attention, feeling, perception, and volition). Some arise only under particular circumstances (zeal, determination,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wisdom). Some are uplifting and help us transform our suffering (wholesome, or beneficial, mental formations), and others are heavy and imprison us in our suffering (unwholesome, or unbeneficial, mental formations).
세 번째 확립은 ‘마음[心(심), chitta]에서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정신의 형성[心行(심행), chitta samskara]을 안다는 것이다. ‘형성[行(행), samskara]’은 전문적인 불교 용어이다. ‘형성된 것’, 즉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하나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꽃은 형성이다. 화 역시 형성, 즉 정신의 형성 다시 말해서 심행(心行)이다. 심행(心行) 중에 어떤 것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자[遍行(변행)]’라고 부른다. 촉(觸; 접촉), 작의(作意; 주의를 기울임), 수(受; 느낌), 상(想; 지각(知覺))과 사(思; 의도(意圖))가 그것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 욕(欲; 열정), 승해(勝解; 결심), 염(念; 알아차림), 정(定; 집중)과 혜(慧; 지혜)가 그에 해당된다. 심행(心行) 중 어떤 것은 정신을 고양시켜 고통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고(그래서 건전한 또는 이로운 심행(心行)이라고 함), 또 어떤 것들은 정신을 무겁게 만들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그래서 불건전한 또는 이롭지 못한 심행(心行)이라고 함).
There are mental formations that are sometimes wholesome and sometimes unwholesome, such as sleepiness, regret, initial thinking, and developing thought. When our body and mind need rest, sleep is wholesome. But if we sleep all the time, it can be unwholesome. If we hurt someone and regret it, that regret is wholesome. But if our regret leads to a guilt complex that colors whatever we do in the future, that regret can be called unwholesome. When our thinking helps us see clearly, it is beneficial. But if our mind is scattered in all directions, that thinking is unbeneficial.
수면(睡眠; 졸림), 회(悔; 뉘우침), 심(尋; 최초의 생각), 사(伺; 발전하는 생각)와 같은 심행(心行)은 건전할 때도 있고 건전하지 못할 때도 있다. 심신이 휴식을 필요로 할 때 수면은 건전한 것이다. 그러나 종일 잠만 잔다면,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뉘우친다면, 그 뉘우침은 건전하다. 그러나 그 뉘우침이 앞으로 할 일에 악영향을 주는 죄의식으로 이어진다면, 그 뉘우침은 불건전한 것이다. 생각은 사물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이롭다. 그러나 마음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을 때의 생각은 이롭지 못하다.
There are many beautiful aspects of our consciousness, like faith, humility, self-respect, non-craving, non-anger, non-ignorance, diligence, ease, care, equanimity, and nonviolence. Unwholesome mental formations, on the other hand, are like a tangled ball of string. When we try to untangle it, we only wind it around ourselves until we cannot move. These mental formations are sometimes called afflictions (kleshas), because they bring pain to ourselves and others. Sometimes they are called obscurations because they confuse us and make us lose our way. Sometimes they are called leaks or setbacks (ashrava), because they are like a cracked vase. The basic unwholesome mental formations are greed, hatred, ignorance, pride, doubt, and views. The secondary unwholesome mental formations, arising from the basic ones, are anger, malice, hypocrisy, malevolence, jealousy, selfishness, deception, guile, unwholesome excitement, the wish to harm, immodesty, arrogance, dullness, agitation, lack of faith, indolence, carelessness, forgetfulness, distraction, and lack of attention. According to the Vijñanavada School of Buddhism, altogether there are fifty-one kinds of mental formations, including feelings. Since feelings is, by itself, the second establishment of mindfulness, the other fifty fall into the category of the third establishment of mindfulness.
우리의 의식에는 신(信; 믿음 faith), 참(慚; 부끄러워 함, 겸손 humility), 괴(愧; 허물을 부끄럽게 여김 self-respect), 무탐(無貪; 갈망 없음 non-craving), 무진(無瞋; 화내지 않음 non-anger),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non-ignorance), 정진(精進 diligence), 경안(輕安; 편안함 ease), 불방일(不放逸; 주의함 care), 행사(行捨; 평정심 equanimity), 불해(不害; 해치지 않음 nonviolence)와 같이 아름다운 면도 많다. 이와는 달리 불건전한 심행은 마치 뒤엉킨 실타래와도 같다. 그것을 풀어보고자 몸 둘레를 빙빙 돌며 감았다가는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마는 법이다. 이러한 심행은 번뇌(煩惱, klesha)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나와 남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올바른 길을 잃게 하므로 장애(障碍)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그것은 마치 깨진 병과도 같기 때문에 물이 새거나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루(有漏)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본적인 불건전한 심행으로는 탐(貪; 욕심 greed), 진(瞋; 성냄 hatred), 치(癡; 어리석음 ignorance), 만(慢; 교만 pride), 의(疑; 의심 doubt), 악견(惡見; 나쁜 견해 views)이 있다. 이로부터 일어나는 부차적인 불건전한 심행으로는 분(忿; 분노 anger), 한(恨; 악의 malice), 첨(諂; 아첨 hypocrisy), 무참(無慚; 부끄럼 없음 malevolence), 질(嫉; 질투 jealousy), 간(慳; 인색함 selfishness), 광(誑; 속임 deception), 복(覆; 감춤 guile), 도거(掉擧; 들뜸 unwholesome excitement), 해(害; 해치려는 마음 the wish to harm), 무괴(無愧; 부끄러움을 모름 immodesty), 교(憍; 교만 arrogance), 혼침(惛沈; 흐리멍덩함 dullness), 뇌(惱; 어지러움 agitation), 불신(不信;믿음 없음 lack of faith), 해태(懈怠; 게으름 indolence), 방일(放逸; 부주의함 carelessness), 실념(失念; 잊어버림 forgetfulness), 산란(散亂; 산만함 distraction), 부정지(不正知; 주의력 없음 lack of attention)가 있다. 불교의 유식파(唯識派)에 따르면 느낌을 포함해서 모두 51종류의 심행이 있다고 한다. 느낌은 알아차림의 두 번째 확립 대상이므로, 나머지 50가지는 알아차림의 세 번째 확립 대상의 범주에 들어간다.
Every time a mental formation arises, we can practice mere recognition. When we are agitated, we just say, "I am agitated," and mindfulness is already there. Until we recognize agitation as agitation, it will push us around and we will not know what is going on or why. To practice mindfulness of the mind does not mean not to be agitated. It means that when we are agitated, we know that we are agitated. Our agitation has a good friend in us, and that is mindfulness.
하나의 심행이 일어날 때마다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마음이 흔들릴 때, “내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하면 이미 알아차림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을 흔들림으로 인지하기 전에는 그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무엇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알아차림을 수행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흔들리는 마음은 좋은 친구이다. 그 때문에 알아차림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Even before agitation manifests in our mind consciousness, it is already in our store consciousness in the form of a seed. All mental formations lie in our store consciousness in the form of seeds. Something someone does may water the seed of agitation, and then agitation manifests in our mind consciousness. Every mental formation that manifests needs to be recognized. If it is wholesome, mindfulness will cultivate it. If it is unwholesome, mindfulness will encourage it to return to our store consciousness and remain there, dormant.
마음의 흔들림이 의식에 나타나기 전에 이미 그것은 씨앗의 형태로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 존재한다. 심행은 모두 씨앗의 형태로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 있다. 어떤 행동을 통해 흔들림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면 비로소 흔들림이 의식에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모든 심행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그것이 건전하다면 알아차림을 통해 강화될 것이다. 불건전하다면 알아차림을 통해 장식(藏識; 아뢰야식)으로 되돌아가서 잠자코 있게 될 것이다.
We may think that our agitation is ours alone, but if we look carefully, we'll see that it is our inheritance from our whole society and many generations of our ancestors. Individual consciousness is made of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and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is made of individual consciousnesses. They cannot be separated. Looking deeply into our individual consciousness, we touch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Our ideas of beauty, goodness, and happiness, for example, are also the ideas of our society. Every winter, fashion designers show us the fashions for the coming spring, and we look at their creations through the lens of our collective consciousness. When we buy a fashionable dress, it is because we see with the eyes of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Someone who lives deep in the upper Amazon would not spend that amount of money to buy such a dress. She would not see it as beautiful at all. When we produce a literary work, we produce it with both our collective consciousness and our individual consciousness.
마음의 흔들림은 자신만의 문제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사회와 수많은 세대를 걸쳐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인의식은 집단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집단의식은 개인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둘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개인의식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집단의식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선(善), 행복이라는 관념은 동시에 사회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패션 디자이너들은 이듬해 봄에 크게 유행하게 될 패션을 선보이는데, 우리는 집단의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들이 선보인 작품을 보게 된다. 우리가 유행에 맞는 옷을 사게 되는 것은 집단의식이라는 눈을 통해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아마존 강 상류의 오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옷을 사는 데 그만한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그런 옷이 아름답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에 우리는 집단의식과 개인의식 양자를 통해 글을 쓰게 된다.
We usually describe mind consciousness and store consciousness as two different things, but store consciousness is just mind consciousness at a deeper level. If we look carefully at our mental formations, we can see their roots in our store consciousness. Mindfulness helps us look deeply into the depths of our consciousness. Every time one of the fifty-one mental formations arises, we acknowledge its presence, look deeply into it, and see its nature of impermanence and interbeing. When we practice this, we are liberated from fear, sorrow, and the fires burning inside us. When mindfulness embraces our joy, our sadness, and all our other mental formations, sooner or later we will see their deep roots. With every mindful step and every mindful breath, we see the roots of our mental formations. Mindfulness shines its light upon them and helps them to transform.
우리는 대개 의식(意識)과 장식(藏識; 아뢰야식)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장식(藏識; 아뢰야식)은 좀 더 깊은 의식에 다름 아니다. 심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뿌리가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알아차림은 의식의 깊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데 도움을 준다. 51가지 심행이 일어날 때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그 무상하고 상즉적(相卽的)인 성질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하면, 두려움, 슬픔 그리고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여러 가지 불길에서 벗어난다. 알아차림을 통해 즐거움과 슬픔을 비롯한 모든 심행을 감싸 안으면 조만간 그 깊숙한 뿌리를 보게 될 것이다. 알아차림을 수반한 걷기와 호흡을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심행의 뿌리를 보게 된다. 알아차림의 빛을 쏘이면 그것의 성질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The fourth establishment is mindfulness of phenomena (dharmas) in phenomena. "Phenomena" means "the objects of our mind." Each of our mental formations has to have an object. If you are angry, you have to be angry at someone or something, and that person or thing can be called the object of your mind. When you remember someone or something, that is the object of your mind. There are fifty-one kinds of mental formations, so there are fifty-one kinds of objects of mind.
네 번째 확립은 ‘법(法, dharma)에서 법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법’은 ‘마음의 대상’을 뜻한다. 각각의 심행에는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화가 났다면, 누군가나 무엇인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으로 그때 그 사람이나 사물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누군가나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그것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 심행이 51가지이므로 마음의 대상 역시 51가지가 된다.
When we are attentive to a bird singing, that sound is the object of our mind. When our eyes see the blue sky, this is the object of our mind. When we look at a candle, an idea or image of the candle arises in our mind. That object of perception is a sign (lakshana). In Chinese, the character for perception is composed of the ideograms for sign and mind. A perception is a sign, an image in our mind.
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는 마음의 대상이 된다. 푸른 하늘을 볼 때 그것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 촛불을 보고 있으면 저것은 촛불이라는 생각이나 그 이미지가 마음에 떠오른다. 지각의 대상은 표시[能相(능상), lakshana]이다. 지각에 해당하는 한자(漢字) 상(想)은 표시와 마음에 해당하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지각은 마음속에 반영된 표시, 즉 이미지이다.
"Investigation of dharmas" (dharma-pravichaya) is one of the Seven Factors of Awakening (bodhyanga).'6 When observing dharmas, five kinds of meditation can help us calm our minds: (1) counting the breath, (2) observing interdependent arising, (3) observing impurity, (4) observing with love and compassion,7 and (5) observing the different realms.
‘법의 규명[擇法(택법), dharma-pravichaya]’은 7각지(覺支, bodhyanga)의 하나이다.(주6)
법을 관찰할 때 다음의 다섯 가지 명상법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1) 수식관(數息觀) (2) 연기관(緣起觀) (3) 부정관(不淨觀) (4) 자비관(慈悲觀)(주7) (5) 계분별관(界分別觀).
6 The Seven Factors of Awakening are mindfulness, investigation of phe nomena, diligence, joy, ease, concentration, and letting go. See chap. 26.
주6) 7각지는 염(念), 택법(擇法), 정진(精進), 희(喜), 경안(輕安), 정(定), 사(捨)로 이루어져 있다. 26장을 보라.
7 The Pure Land School replaces this meditation with contemplating Amida Buddha. In fact, when we contemplate Amida Buddha, we are ob serving with love and compassion, because any Buddha is an embodiment of love and compassion. What does Buddhanusmriti, "mindfulness of Bud dha," mean? What does it mean to recite the name of the Buddha? It means to invite someone precious to come into our living room. Every mo ment that the Buddha seed is in our mind consciousness, it plants seeds of love and understanding. If we invite Mara in, it will not plant those seeds. Mindfulness means, above all, remembering the Buddha nature that is in us.
주7)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이것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사실 아미타불을 관할 때 그것은 자비관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부처님은 자비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염불(念佛)은 무슨 뜻일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중한 사람을 거실로 초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불성의 씨앗이 의식에 있을 때는 언제나 사람과 이해의 씨앗이 뿌려진다. 만일 마라를 초대한다면 그러한 씨앗이 뿌려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알아차림은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What are the different realms? First, there are the Eighteen Elements (dhatus): eyes, forms (the objects of our vision), and the consciousness that makes sight possible, which we can call eye-consciousness; ears, sound, and the consciousness connected with hearing; nose, smell, and the consciousness connected with smelling; tongue, taste, and the consciousness connected with tasting; body, touch, and the consciousness connected with touching; mind, the object of mind, and mind-consciousness. These Eighteen Elements make the existence of the universe possible. If we look deeply into the Eighteen Elements and see their substance and their source, we will be able to go beyond ignorance and fears.
계(界, dhatu)란 무엇인가? 먼저 18계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눈[眼(안)], 모습[色(색), 시각의 대상]과 모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 이것을 안식(眼識)이라고 부른다. 귀[耳(이)], 소리[聲(성)]와 듣는 일과 연관된 의식[耳識(이식)]. 코[鼻(비)], 냄새[香(향)]와 냄새 맡는 일과 연관된 의식[鼻識(비식)]. 혀[舌(설)], 맛[味(미)]과 맛보는 일과 연관된 의식[舌識(설식)]. 몸[身(신)], 접촉[觸(촉)]과 접촉하는 일과 연관된 의식[身識(신식)]. 마음[意(의)], 마음의 대상[法(법)]과 의식(意識). 이 18계 때문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18계를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의 본질과 원천을 알게 되면 무명(無明)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In the Discourse on the Many Realms (Bahudhatuka Sutta),8 the Buddha taught that all our anxieties and difficulties come from our inability to see the true face, or true sign of things, which means that although we see their appearance, we fail to recognize their impermanent and interbeing nature. If we are afraid or insecure, at the root of our fear or insecurity is that we have not yet seen the true face of all dharmas. If we investigate and look deeply into the Eighteen Elements, we can transform our ignorance and overcome fear and insecurity.
여러 가지 계에 대한 말씀[분별육계경(分別六界經)](주8)에서 부처님은 우리늬 모든 걱정과 어려움은 사물의 진면목 또는 참된 표시를 볼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치셨는데, 그 뜻은 우리는 사물의 모습을 본다 해도 그것이 가진 무상하고 상즉적인 성질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두렵거나 불안하다면 그 두려움과 불안의 근저에는 아직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18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깊이 들여다본다면, 무지를 고치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8 Majjhima Nikaya 115.
One day during sitting meditation, the Venerable Ananda realized that all anxieties, fears, and misfortunes arise because we do not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physical and psychological phenomena. Later, he asked the Buddha if this was correct, and the Buddha said yes, first explaining the need to penetrate the Eighteen Elements.
어느 날 좌선을 하고 있는 도중 아난존자는 모든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행은 육체 및 심리적 현상의 참된 성질을 알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올바른 견해인지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부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면서 처음으로 18계를 통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Ananda then asked, "Is it possible to penetrate the Eighteen Elements in another way?" and the Buddha replied, "Yes, we can say that there are Six Elements." These are the Four Great Elements (mahabhuta) of earth, water, fire, and air, plus space and consciousness. All physical phenomena are made up of these Six Elements. If we observe these Six Elements inside us and around us, we see that we are not separate from the universe. This insight frees us from the idea of birth and death.
그때 아난이 여쭈었다. “다른 방법으로 18계를 통찰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6대(六大)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에 공간[空(공)]과 의식[識(식)]을 더한 것이다. 모든 육체적 현상은 6대(六大)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의 안팎에 있는 6대(六大)를 살펴보면, 우리는 우주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게 되면 생(生)과 사(死)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The Buddha then taught Ananda the Six Realms —happiness (sukha), suffering (dukkha), joy (mudita) anxiety (Pali: domanassa), letting go (upeksha), and ignorance (avidya). Happiness can be true happiness or deception, so we have to look into its substance and go beyond attachment. True happiness will be of benefit and nourish ourselves and others. Deceptive happiness brings temporary pleasure and helps us forget our suffering, but is not of lasting benefit and can actually be harmful, like a cigarette or a glass of wine. When something causes us to suffer, if we look deeply into it, we may see that it is exactly what we need to restore our happiness. In fact, suffering is essential for happiness. We have to know the suffering of being too cold to enjoy and appreciate being warm. If we look deeply into the realm of joy, we can see whether it is authentic or whether it is just covering up our suffering and anxiety. Anxiety, the illness of our time, comes primarily from our inability to dwell in the present moment.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6계, 즉 행복[安快(안쾌), sukha], 고통[苦(고), dukkha], 기쁨[歡喜(환희), mudita], 걱정[內心痛(내심통), domanassa], 평정[行捨(행사), upeksha]과 무지[無明(무명), avidya]를 가르치셨다. 행복은 참된 것일 수도 있고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기에 그 본질을 꿰뚫어보고는 집착을 떨쳐버려야 한다. 참된 행복은 남과 나를 살찌우고 이롭게 한다. 기만적인 행복은 일시적인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잊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 이로움은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술이나 담배처럼 해로운 것이다.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행복을 되찾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고통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뜻함을 즐기고 고마워할 줄 알려면 추위라는 고통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기쁨의 영역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고통과 걱정을 덮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은 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Letting go is an ongoing practice, one that can bring us a lot of happiness. When a Vietnamese woman who escaped her country by boat was robbed on the high seas of all her gold, she was so distraught that she contemplated suicide. But on shore, she met a man who had been robbed of even his clothes, and it helped her very much to see him smiling. He had truly let go. Letting go gives us freedom, and freedom is the only condition for happiness. If, in our heart, we still cling to anything — anger, anxiety, or possessions — we cannot be free.
평정은 늘 해야 하는 수행으로, 우리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했던 한 여인은 망망대해에서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는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자살할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상륙해서 입고 있던 옷마저 빼앗긴 사람을 만나서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커다란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는 정말로 평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평정은 자유를 가져다주고 자유는 행복의 유일한 조건이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어떤 것, 이를테면 분노, 걱정과 재물에 집착하고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 없는 법이다.
The Buddha taught another list of Six Realms: craving (kama), freedom from craving (nekkhama),9anger (vyapada), absence of anger (avyapada), harming (vihimsa), and non-harming (avihimsa or ahimsa). If we look deeply into our craving, we see that we already have what we crave, because everything is already a part of everything else. This insight can take us from the realm of craving into the realm of freedom. The fire of anger burns in us day and night and causes us to suffer — even more than the one at whom we are angry. When anger is absent, we feel light and free. To live in the realm of non-harming is to love. Our world is full of hatred and violence, because we do not take the time to nourish the love and compassion that are already in our hearts. Non-harming is an important practice.
부처님은 또 하나의 6계를 가르치셨다. 갈망[欲(욕), kama], 갈망에서 벗어남[出離(출리), nekkhama],(주9) 분노[瞋怒(진노), vyapada], 분노가 사라짐[離怒(이노), avyapada], 해[害(해), vihimsa], 무해[不害(불해), avihimsa 또는 ahimsa]가 그것이다. 갈망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이미 그 밖의 것의 일부이므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게 되면 갈망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분노의 불길은 우리 안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타오르며 고통을 일으킨다. 그래서 심지어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받기도 한다. 분노가 사라질 때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짐을 느낀다. 무해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증오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랑과 자비를 키우려고 하는 여유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무해는 정말 중요한 수행이다.
9 Nekkhama is Pali, and there is no Sanskrit equivalent for it. We do not know what word was used in the original Sanskrit texts, since they have been lost.
주9) nekkhama는 팔리로 그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는 없다. 산스크리트로 된 원전이 망실되었기에, 어떤 말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There are three further realms: the desire realm, the form realm, and the formless realm. The form and formless realms describe certain states of meditative concentration. In the form realm, material things are somewhat subtle. In the formless realm, they are very subtle. In the desire realm, material things are present in their grossest form, and human beings do not meditate there. These three realms are produced by our mind. If our mind has craving, anger, and harming, we are like a house on fire. If craving, anger, and harming are absent from our minds, we produce a cool, clear lotus lake.10 Every time we practice Right Mindfulness, it is like jumping into that cool lake. If we are standing, we only have to know that we are standing. If we are sitting, we only have to know that we are sitting. We don't have to add or take away anything. We only need to be aware.
더 나아가 욕계(欲界),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라고 하는 3계가 있다. 색계와 무색계는 명상의 어떤 단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색계에 있는 물질적 존재는 다소 미묘한 상태에 있다. 무색계에서 그것은 아주 미묘한 상태를 갖는다. 물질적 존재는 욕계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는데, 인간은 그 상태에서 명상에 들 수 없다. 이 3계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비롯된다. 마음속으로 갈망, 분노,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사람은 불난 집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갈망, 분노, 해치려는 생각이 사라지면, 시원하고 깨끗한 연못(주10)과도 같은 상태가 된다. 우리가 정념을 수행할 때마다, 그것은 마치 시원한 연못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서 있을 때는, 단지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알기만하면 된다. 앉아 있을 때면, 앉아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10 In the "Universal Door" chapter of the Lotus Sutra, it is said that the mindfulness of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can transform the fires that are about to burn us into a cool, clear lotus lake.
주10)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보면 관세음보살을 정성껏 염하면 우리를 막 태우려고 하는 불길이 시원하고 깨끗한 연못으로 변한다고 하는 말이 나온다.
Finally, the Buddha taught the meditation on the Two Realms —the realm of the conditioned (samskrita) and the realm of the unconditioned (asamskrita). In the conditioned realm, there is birth, death, before, after, inner, outer, small, and large. In the world of the unconditioned, we are no longer subject to birth and death, coming or going, before or after. The conditioned realm belongs to the historical dimension. It is the wave. The unconditioned realm belongs to the ultimate dimension. It is the water. These two realms are not separate.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2계에 대한 명상을 가르쳐주셨다. 즉 유위(有爲, samskrita)의 영역과 무위(無爲, asamskrita)의 영역에 대한 명상을 가르치셨다. 유위의 영역에서는 생사, 전후, 내외(內外), 대소의 개념이 성립된다. 무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생사, 내왕(來往), 전후에 구애되는 일이 없다. 유위의 영역은 역사적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파도와 같다. 무위의 영역은 궁극의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바다 그 자체와 같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To arrive at liberation from narrow views and to obtain fearlessness and great compassion, practice the contemplations on interdependence, impermanence, and compassion. Sitting in meditation, direct your concentration onto the interdependent nature of certain objects. Remember that the subject of knowledge cannot exist independently from the object of knowledge. To see is to see something. To hear is to hear something. To be angry is to be angry about something. Hope is hope for something. Thinking is thinking about something. When the object of knowledge is not present, there can be no subject. Meditate and see the interbeing of the subject and the object. When you practice mindfulness of breathing, then the breathing is mind. When you practice mindfulness of the body, then your body is mind. When you practice mindfulness of objects outside yourself, these objects are mind. Therefore, the contemplation of the interbeing of subject and object is also the contemplation of the mind. Every object of the mind is itself mind. In Buddhism, we call the objects of mind the dharmas.
편견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을 없애고 대자비심을 얻고자 한다면, 연기(緣起)와 무상(無常)과 자비를 관(觀)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좌선을 할 때에는 어떤 대상의 연기성(緣起性)에 집중해 본다.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다. 듣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다. 화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이 없으면 인식의 주체도 있을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의 상즉성(相卽性)에 관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호흡은 곧 마음이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몸은 곧 마음이다. 몸 밖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그 대상들이 곧 마음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의 상즉성을 관하는 것은 마음을 관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마음의 대상은 곧 마음 그 자체이다. 불교에서 마음의 대상은 법(法)이라고 부른다.
Contemplation on interdependence is a deep looking into all dharmas in order to pierce through to their real nature, in order to see them as part of the great body of reality and in order to see that the great body of reality is indivisible. It cannot be cut into pieces with separate existences of their own.
연기성(緣起性)을 관하는 것은 일체법(一切法)의 본성을 간파하고, 그것들을 실재(實在)라고 하는 거대한 몸통의 일부분으로 보고, 실재라고 하는 거대한 몸통은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자 일체법(一切法)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실재(實在)는 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조각으로 쪼개질 수 없다.
The object of our mind can be a mountain, a rose, the full moon, or the person standing in front of us. We believe these things exist outside of us as separate entities, but these objects of our perceptions are us. This includes our feeling. When we hate someone, we also hate ourself. The object of our mindfulness is actually the whole cosmos. Mindfulness is mindfulness of the body, feelings, perceptions, any of the mental formations, and all of the seeds in our consciousness. The Four Establishments of Mindfulness contain everything in the cosmos. Everything in the cosmos is the object of our perception, and, as such, it does not exist only outside of us but also within us.
마음의 대상은 산, 장미, 만월, 혹은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분리된 실체로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러한 지각의 대상은 곧 우리 그 자체이다. 우리의 느낌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아차림의 대상은 실은 전 우주이다. 알아차림은 몸, 느낌, 지각, 정신의 형성, 즉 심행의 모든 것과 의식 속에 있는 모든 씨앗에 대해 알아차림 하는 것을 말한다. 알아차림의 네 가지 확립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간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만 우리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기도 한다.
If we look deeply at the bud on the tree, we will see its nature. It may be very small, but it is also like the earth, because the leaf in the bud will become part of the earth. If we see the truth of one thing in the cosmos, we see the nature of the cosmos. Because of our mindfulness, our deep looking, the nature of the cosmos will reveal itself. It is not a matter of imposing our ideas on the nature of the cosmos.
나무의 싹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것의 본성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땅과 같은 것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싹 속에 들어있는 잎은 땅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있는 어느 한 사물의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의 본성을 알게 된다. 알아차림, 즉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인해 우주의 본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본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늘어놓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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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