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그늘진 곳,
바위 안에서 진화와 침식이 마주 보는 중이다
어떤 부분은 입과 눈이고 지문이면서
어제와 비슷하면서도
바람을 사용한다
월식이 많이 남은 촛불과
이끼의 초록 때문에
으스스한 그림자는
바위에 엉키다가
바위와 함께 일렁거린다
주둥이를 문질러 검음을 비비다가
고라니가 소스라치며 도망간 것도
돌 속에서 꿈틀거리는
발자국과 첫눈을 보았기 때문일까
겨드랑이 어림은 날붙이이지만
오래 쳐다보니까
바위라는 인면이 조금 생겨났다
보이지 않던 기척이 여기 모여 있다
누구를 위해 울어준 이름들이다
먹물이 점점 번지듯
구절양장 시작과 끝은
모호하지만 얼굴이 아닐까
별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을 하거나
영원이 있다거나
이목구비가 생긴다는 것
사진 〈Bing Image〉
〈신작시 : 2/3〉
결 빙
송 재 학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를
생각하는 것처럼
저수지가 얼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면은 급하면서
물컹하고 차갑다는 말처럼
먼 곳은 미로 같은 멍이 생기고
깊은 곳은 웅크린 짐승처럼 얼었다
이것은 어두운 곳을 생각하는 일
살 속으로 파고드는 명징함이
왜 나와 겹치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일
물이 탁한 곳은 불투명하고
물이 맑은 곳은 휘파람까지 죄다 얼었다
기도집 한 권이 꽁꽁 얼었다
문을 닫으려는 울음인가 싶어 다시 얼었다
평범한 날이지만
얼음이 얼거나 녹으면서
불규칙한 표면에
뼈와 꽃이라는 체온이 생겼다
정(情)이 희박하다는 얼음의 방식이기에
저수지가 짐승이라는 외로움을 위해
그믐밤은 또 한 번 얼기 시작했다
사진 〈Bing Image〉
〈신작시 : 3/3〉
봄 날
송 재 학
봄날의 모래를 퍼담아 트럭에 옮기는 굴착기의 기름투성이 버킷은 능청스러운데도 잘생긴 손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뱉고 삼키는 입 같기도 해서, 햇빛과 모래가 넉넉하기에, 모자람을 덜어 반듯함을 채운다는 버킷은 덩치를 뽐내거나 으르렁거리는데, 휘발유 냄새가 정답기도 하고, 유행가가 경쾌해지면 다시 큼지막한 루베의 버킷으로 교환하더니 헐떡거림도 없이 막무가내의 신춘문예를 트럭마다 꾸역꾸역 적재하는 달콤한 하구의 봄날, 내 비금속의 손바닥으로 뿔도 없고 프릴도 없는 초식류의 쇠붙이 잔등을 만지고 쓰다듬다가 노랑나비와 함께 생물도감에 등재했다
얌드록초 호수 / 사진 〈Bing Image〉
〈자선시 : 1/2〉
눈을 바라보는 눈 1
송 재 학
눈물이 없다면 시름도 없이, 하늘과 땅을 잇는 폭풍과 번개가 아프고 가혹하게 뒤엉킨 지름 5만 킬로미터 소용돌이의 붉은 생명이라면, 넋이 나간 검은색, 자신의 색을 바꾸려는 누런색, 점점 더 밝아지는 푸른색, 진물이 번지는 듯한 자주색이 합쳤다가 헤어졌다가 물론 목성의 눈동자*이다 아파트 입구 늙은 나무의 눈높이에서 움푹 파인 부분, 칼로 도려낸 눈동자이다 시나브로 녹아버리는 눈사람의 회색 눈이기도 하다가 색목의 에메랄드빛이 된 시선을 얌드록초 호수에서 만났다 따시델레, 안녕이라는 티베트 말 곁에 맴돌았다 몇 개의 눈동자가 겹치면서 눈이 생기거나 길어지는 이유를 짐작했다
* 목성의 대적점은 고기압성의 소용돌이 태풍으로 지름 5만 킬로미터, 너비 1만 킬로미터인데 경도와 사이즈가 계속 변하고 있다.
붉은 가슴 흰꼬리 딱새 / 사진 〈Bing Image〉
〈자선시 : 2/2〉
눈을 바라보는 눈 2
송 재 학
언덕 위에 눈동자가 있다는 생각
상실을 떠올렸다가
낮달이기도 하다가
먼 곳을 바라보기로 했다
언덕 아래 지층마다 눈동자
언덕 전체가 하나의 눈동자라는 마음
가슴이 붉은 딱새가 날아가고
말입술꽃이 피었다는 저곳
언덕보다 더 큰 눈동자의 앞날
모든 것이 가능하거나
애원하는 눈동자들은 젖어 있기에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송재학 시인〉
△ 1986년《세계의문학》등단
△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얼굴''내간체를 얻다''날짜들''검은 색''슬프다 풀 끗혜 이슬''아침이 부탁했다,결혼식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