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를 강화도 석모도에 있는 언약교회로 가게 되니
강화도를 지나가게 되는데
우리 친절한 집사님이 갑자기 어딘가 차를 세운다.
지난번 왔을때 원로목사님이 못보신 곳이 있다고 세운곳은
용흥궁공원 주차장이었다.
어리둥절해서 따라 내려보니 주차장을 공원으로 예쁘게 잘 꾸며 놓은 곳이다.
전에 한번 왔었다는데 내겐 처음 온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강화도령 원범이가 철종이 되기전 살았다는 집이 있단다.
바로 용흥궁(龍興宮)이다.
어릴때 영화로 처음 접했던 강화도령 이야기...
나뭇군으로 살아가던 왕손 원범이와 양순이의 사랑이야기를 기억한다.
"상감마마 미워요~!"라는 영화였지 아마...
지금은 고인이 된 남정임씨가 양순역을 맡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
암튼 그 강화도령이 살던 생가를 가게 되는 것이란다.
근데 원래 원범이 철종이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는데
원범이가 철종으로 임금이 되고 난 뒤
이곳 강화유수 정기세가 1853년(철종4년)에 지금과 같은 기와집을 짓고,
용(龍)이 나왔다는 의미로 용흥궁(龍興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용흥궁공원의 모습이다.
이곳 용흥궁 공원옆으로는
'강화도령의 첫사랑길' 이라는 이름을 붙인 둘레길이 있는데
11.7km거리로서 3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 둘레길은 강화도령 원범과 양순이 처음 사랑을 나누던 청하동 약수터를 지나
강화읍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강화산성 남장대를 거쳐
솔숲 우거진 노적봉 입구까지 가게 되고
호젓한 솔숲길의 찬우물 약수터에서 약수도 한모금 마시며 걷다보면
종점인 철종의 외가가 나온다.
강화도령 원범과 양순의 이미지인형이 세워진 옆에 포토존도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념촬영을 하여도 좋게 되어 있었다.
강화도령 첫사랑길이 시작하는 골목 옆으로 용흥궁의 대문이 나있다.
사실은 후문이었다.
우린 후원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가는 코스를 가게 된 것이다.
후원을 통하여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
사랑채가 아래 내려다 보인다.
사랑채에서 내려온 후원을 올려다 보면서 한컷~!
사랑채이다.
정면 6칸의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로 옆에 잠저구기비각이 1동 서있다.
비각이 있는 곳에서 사랑채로 나가면 바로 아래 안채로 나가는 쪽문이 두개 있다.
안채옆의 우물을 보여주는 울 집사님~!
아직도 물이 있다고 우물 뚜껑을 열고 보여 주고 있다.
안채의 모습이다.
정면 7칸의 맞배지붕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왼쪽에 있는 문을 나가면 다시 왼쪽으로 대문이 있는 이중문의 형태를 갖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서 전통다예교실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안채에서 바라본 바깥채의 모습...
아까 왼쪽의 문을 나가서 보면 나머지 한개의 쪽문이 보이고,
수도꼭지가 보이는 맞은켠 쪽으로 정대문이 있는 것이다.
이중문 사이의 공간에 전통다예교실에 대한 공지문등이 붙어있는 모습도 있고...
이제 정대문으로 나온 것이다.
우린 후원으로 해서 거꾸로 보고 나온 것이다.
용흥궁이 있다는 이정표가 갈림길에 붙어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라는 설명과 함께..
이 용흥궁 관람 안내도를 보면 조금 도움이 될듯 하다..
용흥궁은 인천 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소재하며
인천 유형문화재 제 20호이다.
참고로 이곳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 관람이 용이하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연을 첨부한다.♣
철종(본명이 이원범)은 고조부가 영조, 증조부가 사도세자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이인)의 아들 이광(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아버지가 모반 사건에 휘말려 가족 모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순조의 양자가 돼 헌종에 이어 철종으로 등극한다.
한성의 반가에서는 그를 비꼬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출궁되어 제주도 유배 뒤 복권돼 한양으로 왔으나
역모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어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사옥)가 일어나자 그의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은언군도 가족이 천주교에 빠지도록 방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탄핵되었으며 마침내 사약을 받는다.
부모와 장형, 누이가 잇달아 사망하는 불우한 가족사를 겪은 이광(李壙)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곤궁한 생활을 보내다 1841년 사망하였다.
1844년 큰아들 이원경은 민진용(閔晉鏞)에 의해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에 휘말려 사사되었고
일가는 모두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로 이배되어 살게되었다.
3남 이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하며 행상을 하거나 농부으로 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기에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순조의 비, 본관은 안동,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딸)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라 1851년(철종 2)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순원왕후 수렴청정 하에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으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세 가지 재정 행정을 둘러싼 정치 부패가 심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철종은 세도정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화도에 살 때 혼인을 약속한 양순(또는 분이)이라는 처녀를 그리워하다,
술과 궁녀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 33세에 후사없이 하직한다.
1857년(철종 8) 순원왕후가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풍양 조씨, 신정왕후神貞王后,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은 후, 조대비는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희,이명복)을 양자로 맞아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고종이다.
조대비는 고종을 보잘 것 없는 여흥 민씨 자영과 혼인시켜 그간의 세도가들의 전횡을 일소하려고 하지만
결국 민씨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오비이락으로 조선왕조는 황후와 황제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나라에 한을 남기고 폭싹 망하게 된다.
댓글과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워...
첫댓글 철종의 강화도 잠저주변이 많이 변햇습니다 인근에 큰 주차장이 생기고 잠저와 성공회성당과도 연결이 되는등 주변변화를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지방자치시대가 되니까 숨어있던 문화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잘 가꾸고 관리하는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석모도 저도가봤는데 여긴 못가봤네요 꼭 가보고싶은곳인데요^^
용흥궁공원은 석모도가 아니고 강화도에 있지요...^^*
용흥궁 공원에서 주차하시고 용흥궁과 성공회성당, 그리고 조금 위에 있는 고려행궁까지 보시면 좋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