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기러기 – 목안(木雁)


혼례 때 전안례奠雁禮를 하기 위하여 나무로 목각한 기러기.
나무기러기를 혼인 때 사용하는 풍습은 고대 중국 한족의 혼인 풍속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전안례가 행해지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전안례가 행해졌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의례儀禮』에서는 “사士의 혼례에 기러기를 사용한다.”라고 했으며, 『예기禮記』 「혼의婚儀」에는 “부친이 대례를 행하라고 명하면 신랑이 기러기를 안고 신부 집으로 들어가 한 번 읍揖하고 기러기를 드리고 재배再拜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기러기는 신랑과 신부 측을 연결하는 예의 용품이었다. 그런데 이 풍속이 중국에서는 일찍 소멸되었으나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는 조선 말기까지 이 예가 행해졌으며, 혼례의 중심적인 행사로서 중시되었다.
전안례가 행해지던 초기에는 실제로 산 기러기를 사용하였으나, 이것이 점차 내려오면서 산 기러기 대신 까만 옻칠을 입힌 나무기러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조차 구하기가 어려우면 산 닭 또는 떡으로 만든 기러기를 대신 사용하였다. 기러기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갈 때[親迎], 기럭아비가 홍색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갔는데, 기러기 머리가 왼쪽을 향하도록 했다. 그러면 이 전안의 예가 혼례에서 중요시되고, 또 그 명맥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기러기라는 동물은 한 번 짝을 지으면 평생 그 짝 이외의 다른 짝을 돌아보지 않아 정절을 상징했고, 둘째로는 기러기가 따뜻한 바람을 쫓아 무리 지어 다녀 믿음과 애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기러기는 정절・신의・우애・사랑이 깊은 길조로 여겨졌다. 결국, 기러기는 바로 바람직한 부부관계의 상징이었다. 이를 통해 도덕적 품성을 중시하는 한민족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전안을 “백년기러기를 올린다.”라고 하여 종종 이를 위해 기러기를 잡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혼례 용구를 임대하는 가게에서 산 기러기를 빌려와 붉은 천에 싸고 목에 붉은 실을 묶어서 기럭아비가 가지고 갔다.
예학에 정통한 당唐 고종 연간의 학자 가공언賈公彦은 『의례소儀禮疏』에서 기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혼례에는 기러기를 사용하는데, 기러기가 겨울에는 남쪽으로 날고 봄에는 북쪽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니, 요즘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은 부인은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혼례 때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밖에 한국전례원은 기러기의 세 가지 특징을 안삼덕雁三德, 즉 안정雁情, 안서雁序, 안적雁跡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안정’이란 기러기의 정을 뜻한다. 기러기는 암수 짝을 지어 살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다시는 새 짝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기러기는 백년해로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안서’는 자연의 질서를 어기지 않는 기러기의 특성을 뜻한다. 항시 늦가을에 왔다가 겨울을 지내고 이른 봄, 북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로서, 자연을 어기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안적’은 기러기가 흔적을 남긴다는 뜻으로, 기러기는 반드시 앉은 자리에 발톱으로 땅을 파놓고 날아가며, 단단한 바위 위에 앉으면 깃털을 바위틈에 남겨두고 날아간다. 이것은 사람들도 이름을 남기라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뜻한다고 한다.
나무기러기는 혼례 시 친영례(親迎禮)에서 교배례(交拜禮)에 앞서 치러지는 전안례(奠雁禮)에 사용되던 것으로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다고 한다. 전안례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처음 행하는 의례이다. 신랑에 앞서 “기럭아범”이 머리에 색실을 두른 나무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며, 신부집에 도착하면 신랑은 기러기를 받아 전안상(奠雁床)에 바치고 절을 한다. 그러면 신부어머니가 치마에 감춰 안으로 들여간다. 혼인 때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은 줄을 지어 날아다니는, 질서와 의리를 따르는 기러기의 속성을 중히 여긴 것이며, 한편으론 제 짝이 죽으면 다른 상대를 찾지 않고 따라 죽거나 평생을 혼자 사는 새로 여겨 이를 상징성으로 삼은 것이다. 즉 사랑의 징표로 목안을 드리는 것이다.
몸체와 머리부분이 분리되어 있다. 주둥이 윗부분에는 코구멍이 맞뚫려 있어 끈을 매달 수 있게 만들었으며 먹으로 눈과 깃털을 묘사했다. 몸체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깎아서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