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의 배부를 것임이요”(마5:5-6)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엡1:3)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지상의 땅 덩어리라면 재물은 넉넉하겠지요. 온유한 인격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이 세상에서 땅을 차지하는 데에 유리한 것은 상식입니다. 그걸 산상보훈에 넣어 복이라고 하실 주님이 아닙니다. 만일 보이는 땅이라면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이 말씀도 논밭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민12:3)고 하는데 그 모세가 과연 인격으로 말하는 온유의 대명사일까요? 아니죠.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없고 이스라엘의 배신에 돌비를 내 던지는 불 같은 성격입니다. 그럼에도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떨기나무에 타는 불을 본 모세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입니다. 광야의 세례 요한이 얼마나 거칩니다. 헤롯에게도 정면으로 대드는 성격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요3:30) 하고 꼬리를 내립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에게 비기려고 덤비는 못된 성품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육신의 악함과 연약을 알게 하고 애통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보지 않으면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을 들이댑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도’ 하고 경쟁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다못해 트롯 가수인 김태연 어린이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그의 스승 박정아 명창에게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세요. 걔가 착하고 부드럽다 이런 건 그의 삶의 궤적이 될 뿐입니다. 그건 스승의 실력을 물려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어린이답지 않게 스승을 공경하고 그 스승의 병 걱정에 닭똥 같은 눈물을 뿌립니다. 그 스승은 고사리 손으로 대접하는 그 제자로 인해 암을 이길 힘을 얻는 모습을 반면교사로 바라보세요. 눈물겹도록 아름답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입어 죄와 사망의 짐을 벗어 본 사람은 성령을 사모합니다. 자신의 옛사람의 추하고 더럽고 간사한 모습에 가슴앓이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온유는 자신의 정권교체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거죠. 이와 같은 마음의 땅을 가진 사람은 주의 이름을 담대하고 간절히 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땅은 가질 수도 갖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만큼은 풍성하게 받을 수 있는 마음의 밭은 확실하게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부요함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길 만큼 넉넉한 의의 잔고를 갖습니다. 이게 복 중의 복이 아닙니까?
cafe.daum.net/3lmission
첫댓글 귀한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