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3450식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물결 (서울 북가좌 네거리)
3500만부나 팔린 <행복한 이기주의자>란 글을 쓴 작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술주정 뱅이 아버지를 찾아 수없이 많은 날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마약과 술로 인생을 망치고 어느 이름 없는 촌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작가는 아버지 묘를 매일 찾아가 원망을 하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묘를 찾아가 아버지를 증오하며 원망하다가
이젠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용서하고 돌아와
이틀 후 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행복한 이기주의자> 가 완성되고 일약 대 성공을 이루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축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여성고객과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아내와 여섯 형제의 자녀를 버리고 명성과 잘 나가는 회사를 정리하고 유럽으로 도망하여 달콤한 밀월을 즐겼다.
나는 중국에서 5년 만에 돌아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처럼 가족을 버리고 사랑을 따라서 멀리로 도망하였다.
그 사랑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지만 후회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랑 지키기위해 그녀도 모든 것을 버렸다
아들과 딸이 있는 데도
우린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스스로의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랑보다도 이젠 자식이 우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날마다 내 앞에서 울었다.
날 두고 돌아 갈 수 없다며 목 놓아 서럽게 울었다.
그런 그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래 가거라 자식따라 간다는데 가야지
나는 잊어버려 .고생만 시켰다 미안하다"
그녀는 날 두고 갈 수 없기에 몇달을 울기만 했다.
자신때문에 나도 돌아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린 그렇게 사랑했다.
내 가진 것 모두 버리고
그녀 또한 잘나가는 회사의 간부직과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그렇게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맨 손으로..
주말이면 이백원짜리 빨래비누를 사들고
북한산 개울가에서 냇물에 빨래를 하여 바윗 돌위에 널어 놓고
좋다고 히히덕 거리며 물장난을 했다.
3개월동안 서울시내 모텔을 전전하면서도
늘 내 옆에 붙어있었다.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없게 주변의 압박감으로 중국으로 살림을 이사시켜 가며 도피하며 살았다.
중국아파트 주인과 대판하고 중국 공안에 끌려가는 수모를 겪으며 살았다.
천진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짐을 한국으로 보내고
이우로 가는 밤기차를 타고 둘은 정처없이 떠났다.
몇년 을 중국에서 보냈다.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고...오직 둘만 생각했다.
어느날 그녀는 마지막 남은 거 라며 손에 낀 14k 를 내게 건냈다.
나는 화를 냈다.
왜 이럴지경에 이를때 까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성질을 부렸다.
그러나 이젠 돌아갈 비용조차 없다는 현실앞에
오히려 묵묵히 내 뜻을 따라준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마지막 남은 40원을 인력거를 부르느데 쓰고 시내 금은방을 찾았다.
철문으로 굳게 닫혀진 금은방 문을 사정없이 두두렸다.
이미 밤이 깊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몇군데를 더 찾아 문을 두두렸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주인을 멀리서 데려왔다.
여 주인은 우리가 내민 14k 반지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이 마이( 사달라고) 외쳤다.
그 주인은 순금을 보여주면서 "뿌용" 한다.(순금이 아니니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여 주인에게 "나는 한국사람이다.돈이 필요하다.그러니 사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러나 고개만 저을 뿐..
나는 이름도 모르는 길을 눈물이 가려 길을 찾지 못할 정도로 울면서 걸었다.
복받쳐 눈물이 뜨거웠다.
그러나 서럽게 울지는 못했다.
그녀를 앞에 걸리고 아무말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물론 그녀도 눈물을 숨기지는 않았다.
아! 여기서 모든 것이 끝이로구나!!!
하염없이 그냥 걸었다.
몇 시간을 걸었더니 아는 길에 접어들었고 민박집을 찾을 수 있었다.
민박집 여 사장(조선족)에게 한국에 가서 꼭 붙여주겠다고
조선족 여자에게 사정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고도 주인에게 몇푼을 빌렸던 모양이다.
이젠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우에서 연운항까지 장거리 버스를 탔다.
더러운 이불을 덮고 밤새 시골길을 19시간을 달렸다.
중간 중간 쉴 때도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중국인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들은 우릴 조롱하며 더 피워댔다.
열명 정도 탔던 버스안에 시간이 가면서 하나 둘 내리더니 달랑 우리 둘만 남았다.
(장거리버스는 세 사람정도가 화주이며 운전기사이다.이들은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한다)
그들은 새벽 3시에 정류장도 아닌곳에 우리 강제로 내리게 했다.
깜감한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연락을 받았는지 택시 세 대가 우리 앞에 멈췄다.
그녀는 긴장하며 내 팔소매를 잡았다.
택시 라이트가 우릴 가운데 두고 가로 막았다.
(그때는 한국사람이면 돈뺏고 죽였다는 소릴 들었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강한척 소리쳤다.
마터우 마터우...
배를 타는 선착장을 간다는 소리를 그들에게 헀다.
건장한 놈들이 다가 섰다.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나는 개념치 않고 그녀를 잡고 걸으라고 귀속말하고 어둠으로 벗어나려 했다.
우리가 도망하는 줄 알고 그들은 시끄럽게 중국말로 쏼라 거렸다.
나는 우릴 막는 놈들의 손을 뿌리치며 못 본 체하고 걸었다.
"마터우 마터우 뚜어치엔!!!"
그때서야 한놈이" 이빠이 치엔(이백원)"울 불렀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빠스콰이치엔!!! (팔십원) 그리고 또 걸었다.
몇놈이 계속 "부거치 부용" 하며 뒤따랐다.(뿌자가 들어가면 안된다는 소리)
달아나듯 5분을 어둠속으로 걸었다.
안 되겠다 싶던지 두대는 돌아가고
한 놈이 차를 앞에 댔다.
태연한 척 차에 탔다.
험상 굳게 생긴 운전기사의 외모에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깜깜한 어둠과 계곡같은 산길을 구비구비 돌았다.
운전을 하는 기사는 핸드폰으로 계속 동료들을 불렀다.
그가 하는말을 뛰엄 뛰엄 들으니
자기 동료들을 어디로 오라는 거였다.
소름이 돋았다
그녀도 알아 들었는지 (죽은듯이) 팔에 안겨 눈치만 보았다.
얼마 쯤 가니 어둠속에 도로를 차단한 통행료를 징수하는 곳에 다다랐다.
기사는 우리보고 요금을 내라고 손짓을 한다.
난 외면을 했다.
외면하는 것을 눈치 채고 툭 치며 손으로 가르킨다.
이미 우린 택시비를 지불했고 그 택시비 속에는 통행료가 포함되어 있으니 잔 말 말라는 투로 꼰아 보았다
" 알스치엔"(이십원)을 내라고 징수원이 큰 소리로 외친다.
나는 버텼다.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여덟을 가르키고
빠스치엔 속에 다 포함하는 것이니 네가 내라고 손짓을 하면서 성질을 부렸다.
그 놈이 말하길 팔십원은 택시비고 통행료는 따로 내라는 것이다.
몇마디 더 하다가는 싸움이 날 것 같아
그냥 지불했다.
그까짓 이십원 때문에 괜한 화를 돋구어 이득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차는 계속 시골길을 달려 산속으로 들어갔다.
불빛하나 없는 짙은 검는색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듯 끌고 갔다.
기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동료에게 계속 일러 바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차를 멈춰섰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팔십원에는 못 가겠으니 차에서 내리라는 것이다.
황당하다.
아주 강력하게 나오는데 어쩔 수 없이 웃돈을 "알스콰이(이십원)오케이" 했더니,
우스콰이(오십원)을 더 내란다.
어이없다. 그러나 난 중국인을 잘 안다.
그냥 내렸다 . (뭔 배짱에)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걸었다.
그녀는 오십원을 주자고 했다. 그러나 난 듣지 않았다.
5분을 걷는 것을 기사는 차 안에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따라와 마터우가 몇시간을 더 가야하니 오십원을 달라고 설득을 시키려들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그냥 걸었다 .
또 따라왔다. (내가 아무리 걸어서 간다해도) 더이상 안된다고 단호이 거절했다.
차가 다가와 이십원을 선불주라고 한다. 나는 방심하고 이십원을 주고 차를 탔다.
차가 5분 정도 달리더니 다왔다고 내리라고 한다.
밖을 보니 어둠 뿐이다. 선착장은 아닌 기분이 든다.
여기가 아니라고 손사레를 쳐보지만 여기가 마터우고 조금 걸어가면 보인다고 걸어 가란다.
욕을 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마터우가 당연 아니였다. 어둠 뿐인 어느 산속이였다.
그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러나 아무말 하지 않았다. 조용히 나의 팔에 의지 할 뿐 이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들끼리 연락을 하여 다른 차를 오게 한 것을...
이미 우리 앞에 라이트를 끄고 있다가 우리가 지나치는 것을 보고 라이트를 켜 우릴 불렀다.
또 흥정은 시작되었다.
결국은 오십원을 주고 차를 탔다.
택시는 어둠속에 죽은 성 같은 허름한 삔관(모텔) 앞에 우릴 내리게 했다.
쇠사슬로 칭칭동여진 유리 현관문을 흔들었다.
나는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반! 로반!(주인)을 목터지게 불렀다.
밤 열시면 문을 잠그고 영업을 안하는 그들의 습성을 알지만 새벽 추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될줄 알지만 계속 문을 흔들었다.
이미 지쳐 고꾸라진 저 여인을 놔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한시간을 열리지 않는 문을 흔들었다.(그녀의 의식을 다독이면서)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우린 돌아 갈 수 있어"
여기서 저 여인을 얼어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절규가 밤 공기를 찢었다.
한참만에 키작은 사람이 잠옷 차림으로 투덜대며 나왔다.
돈을 보여 주면서 방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여인을 가르켰다.아프다는 시늉도 했다.
사정을 했다. 진심으로...
워스 한궈런(나는 한국사람이다)
"메이요, 메이요"(없다) 딱 잘라서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 문안에라도 좋으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애타게 절실한 눈빛으로 동정을 구했다.
중국인은 그냥 들어가 버렸다.
우린 벌려진 틈사이로 바람 막을 유리 문안에 들어갔다.
벽에 기댄채 쓰러지는 그녀에게 입은 옷을 다 벗어 감기고
그래도 추위에 떠는 그녀의 몸을 안아 서로의 체온으로 눈을 감았다.
무일푼으로 돌아오는 길은 말 안통하는 중국 땅에서 사경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해가 밝아 빛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죽은듯 미동도 없는 그녀를 흔들어 살아있기를 바랬다.
왠 종일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그 목에 물이라도 넘기게 하고 싶어
몸을 흔들어 깨웠다.
이미 지쳐있는 그녀를 기대 앉히고 주변을 돌아보니 시끌벅적하다.
상인들이 물건을 사는 소리 짐을 나르는 소리에 여기가 배를 타는 곳이구나
그리고 어느 상점을 골라 들어갔다.
나의 행색을 한번에 알아보고 한국말로 물건을 살거냐고 물어왔다.
아니 그냥 구경만 할거라고 했더니
자기 짐을 가져다주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곡물을 사줄테니 인천에 가서 다시 주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
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
그런데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산 물건을 모두 취소하고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차를 타고 어디로들 간다.
**항에서 배편이 취소가 되어 **항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버스안에 우릴 끼워넣어 주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중국말로 무어라고 한다.
우린 운명에 맡기기로하고 중국인들 틈에 끼어 몇시간을 움직엿다.
버스가 도착하니 상을 차려 음식을 대접하고 술을 권한다.
중국말로 다하는 줄 알았는데 한국말을 섞어서 한다.
자신은 이영걸이며 좀전에 우릴 소개 시킨 사람이 잘 아는 동생이라며 우릴 잘 도와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걱정 하지 말라고 하고 자신이 물건을 다 알아서 사주겠다는 것이다.
중국 술을 얻어 마신 터라 정신이 몰롱한데 그녀가 배표 살돈이 없으니 부탁을 해보라 한다.
나는 분위기가 좋아지는 틈을 타서 슬쩍말을 꺼냈다 .
(술 기운에 용기를 낸다고) 처음보는 화교인에게 배표를 끊어주면 인천에 도착해서 내리자 마자 갚겠다고
하니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해서 인천에 도착했는데
부를 식구도 없고 갚을 돈도 없어 연락처를 주면 찾아뵙고 갚겠다고 하니 바로 또 승낙을 한다.
이렇게 힘들게 한국에 와서 다시 시작을 하려니 죽고 싶은 마음 뿐이였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장문에 글을 남기고 약을 먹었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같이 있어 행복했다...
5년동안 즐거웠던일 슬펐던일 모두 적어 내려갔다.
또 눈물이 뜨거워졌다.
아련한 기억으로 나비를 따라 가고 있는데
그녀가 통곡하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
"안돼.. 이대로 죽으면 안돼..이럴려고 살아 돌아왔어.안돼..."
입에 손을 넣어 약을 토하게 하고 내 곁에서 엉엉 울었다.
엄마 한테 2백만원을 빌려 오는 길이란다
그러니 죽지 말고 그돈 꼭갚으란다.
그렇게해서 열심히 벌어 다시 일어섰다.
.
내 곁에서 쪼그려 잠을자도 날 떠날 수없다고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자식의 눈물에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몇달을 울었다.
밤마다 괴로워하는 통곡에 나도 따라 울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 가란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하고...." 그러면서 또 울었다.
보내야 만 했다.
그가 살던 곳으로 차를 몰아 갔다.
가는 동안 손만 잡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돌아서 왔다.
그런데 밤마다 울면서 전화를 한다.
"살고 싶지않다며..."
"나 혼자 남겨두고 간 것이 미안하다며..."
"용서해 달라며..." 전화기에 대고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난 괜찮으니 잘 살라고! " 하는 나도 전화기를 붙들고 운다 .
전화하지말고 울지도 말고 찾지도 말라고 혼을 내지만
또 다음날이면 술에 취해 죽고 싶다며 통곡한다.
이젠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으련다.
나도 힘이 든다.
나도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고 냉냉하게 말했다.
다신 전화하지 말라고....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를 보고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내 아들이 욕해도 좋다.
난 세상에 없는 사랑을 하였기 때문에
단 7년동안 만 ,
첫댓글 아~!~부럽다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