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간 남원의도공 3
- 400년만에 남원에서 봉송된, '고향의 불씨'로 사쓰마야키 가마에 불 을 댕기고-
서 호 련
심수관 가를 나온 우리는 인근, 수림이 우거진 동산 위 단군사당인 옥산궁(玉山宮)에 오른다.
이름이 궁(宮)이지 우리내 정자누각 같은 목조건물이다. 정자위에 올라서니 저 멀리 현해탄이
보이는 듯 하다. 지금은 신사형태로 개축되어 이름도 옥산신사(玉山神祠)로 바뀌어 부르고 있
지만 그들은 해마다 음력9월 14 일에 이곳에서 제사를지냈다. 이 때 불렀던 제사의식의노래,
신무가(神舞歌)가 바로
이 ‘오늘이 오늘이소서’ 다. 고향은 인간의 가슴이다. 두 번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의 흙이 된 많은 도공들이 망향의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현해탄, 푸른 바다 건너 조국
을바라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하지않는가. 이마을의 다카사와 사키‘ 할머니는 이 노래에 대
해 정유재란때 이곳에 끌려온 도공들 사이에서 불렀던 ’ 남원성의가곡‘이었다고 말 한바 있
다.
미야마 에서 불려 진 도공들의 노래는 이러하다.
오늘이 오늘이라, 오늘이라.
내 몸을 조이는 것도 차려놓은 제물조차도 잊을 오늘이라.
오늘이라, 그동안 헤아려 온 오늘이고 이 날이라.
놀지 못 할까, 놀지 못 할까, 오늘이라.
이렇게도 노세, 저렇게도 노세.
제 일이 제가 하는 일이 옳거든, 노는 일이, 노는 일이 하나가 한 이치가 아닌가.
고수레, 고수레, 조(오곡)나 새(새플) 하나가 아닌가.
< 최승범 역>
전 전북대 국문학과 최승범 교수는 말 한다.
“음식을 먹기 전에 ‘고수레’를 하는 조선의 습속이 그대로 들어 있다.”
고려대 국문학과 김기형교수의 말이다.
“내 몸을 조이는 고난이 거듭되는 속에서도 고달픈 삶을 한사코 긍정하려는 그 몸 짓, 그 마음이 애달프다”
이와 매우 유사한 노래의 가사가 양덕수의 심방곡(心方曲)에 실려 있다. 다음은 남원 만인의총 앞 광장에 세워진 노래 탑에 새겨진 ‘오늘이 오늘이소서’의 가사 이다.
오리 오리쇼셔 /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에 오리쇼셔 / 매일에 오늘 이소서
점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 /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새나마(나) / 새나마
매양 양식에 오리쇼셔 / 주야장상에 오늘이소서
조국의 고향에서는 즐거운 축가였지만 그곳에선 단장의 망향가로 바뀌어 불려 진 것이다. 이 노래는 도공들이 창작해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1610년 남원에서 양덕수가 채보해서 편찬한 거문고 악보<梁琴 新譜>에 실려 있는 가사다.
거문고 명인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봉의 운상원(雲上院)에서 기거하면서 거문고음악을 전수한 이래 남원은 거문고와 매우 인연이 깊다. 조선조 중엽 장악원 악사였던 비파와 거문고의 명인 양덕수가 임진왜란 시 남원으로 피난을 와 있었는데 정유재란으로 남원성이 함락되자 이 노래가 멸실 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친구인 임실 현감 김두남의 도움으로 ‘양금 신보’라는 악보집을 출간 했다. 여기에 이 노래가 ‘심방곡(心方曲)’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1992년, 뒤늦게야 문화부는 이 노래를 발굴하여 전 국민이 부르는 축가로 활용토록 보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뜻밖에도 일본 가고시마 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美山)에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그 노래를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땅에서 부르고 있다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이 얼마나 맺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 해외동포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고향이 그리울 때 마다 부르며 위안을 삼았을 도공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오늘의 즐거움이 영원하라고 기원하는 축가였다. 그런 축가가 일본 땅 에서는 망향가로 불린 것이다. 조국고향의 평화롭고 풍요한 삶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캄캄 절벽 같은 타향살이에 고향으로 돌아갈 ‘내일’만을 간절히 기다렸을 그들의 ‘오늘’이었을 것이다.
1988년 7월 26일엔 남원 광한루원에서 전무후무한 귀향 음악회가 열렸다. 400년 전 고향에서 가져간 노래. 정작 고향에서는 이미 사라진 그 노래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 드리는 음악회 이다.
“내 고향 언제 갈까나 언제 갈까나”
애처로운 이 노래를 들은 행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노래를 가져온 도공의 후예도, 노래를 받는 남원사람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남원 만인의총의 광장에 세워진 노래탑, ‘오늘이 오늘이소서’. 잊힌 노래, 사라졌던 노래, 다시 찾았던 노래를 담은 노래 탑을 1995년에 세웠다. 저물지도 새지도 말았으면 하는 오늘, 날이 샌다 해도 다시 오늘 같은 날이 되었으면 하고 기원했던, 그 평화스러운 고향의 노래를 담은 탑이 지금 남원에 세워져 있다.
이석홍(전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의 ‘남원 불’ 가고시마 봉송기 초(秒)
.1998년 10월 18일, 오후 2시 40분, 남원의 만인의총 앞에서 역사적인 일본행정관들의 만인의총 참배와 4백 년 전 순절한 우리선조들의 넋을 불러오는 초혼 굿이 베풀어지고 14대 심수관 이하 15대 심수관과 도공후예들의 고유제가 이어진다. 오후 6시, 관광단지 음악분수대에서는 남원시민들의 마음과 마음을 모아 4백 개의 불을 지펴 단에 모으고 그 불을 남원의 불로 다시 지펴 점화하고 시민을 대표한 최진영 시장이 '남원! 그 영원한 불길 찬란히 타 오르라'고 외치면서 4백 년 전에 외세에 의해 꺼진 불씨를 다시 지피는 의미를 선포하였다. 14대 심수관은 목이 메도록 '내 고향 남원 만세!'를 외친다.
1998년 1월 19일, 교룡산 산신당에 주 선녀와 제관들이 채화 단 남쪽에 도열하고 채화자 서규성씨가 주머니에서 부싯돌과 쑥을 꺼내 단번에 부싯돌을 쳐 불을 일군다. 봉송 차에 실린 항아리의 불씨를 신화로(薪火爐)에 옮겨 붓고 고유제 장소인 만인의총 앞 '오늘이 오늘이소서'노래 탑으로 이동한다. 불을 나눠 전한다는 의미의 신전로(신전로)에 담아 이 불씨는 일본 동시래정의 도공후예인 심수관 손으로 옮겨진다. 14대 심수관 일행은 신전로를 싣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광한루 원 앞에서 첫 번 채 경유지인 전남 구례 그리고 순천, 동광양 을 거쳐 부산으로 향한다. 불 봉송 길에 동행하는 차량은 심수관이 탄 호남대 이대순 총장 승용차와 일본 참가자를 태운 시청버스, 그리고 일본 취재진을 태운 미니버스와 에스코트하는 경찰 차량이다.
도시의 경계와 경계에서 관할 경찰서에서 나와 부산 해양대학까지 릴레이로 에스코트를 하는 것을 본 일본 취재기자들이 놀라 자빠졌다는 이야기를 20일 한나라 호 선상에서 들을 수 있었다. 부산 해양대학교 한나라 호 부두에 도착. 도로 양편 해양대학교 학생들의 도열사이로 신전로 를 실은 가마는 크레인에 의해 탑재된다.
한나라 호는 순수 우리기술로 건조된 3,640톤인 해양대학교 실습선이다. 배는 당시 남원성에서 시마쓰,(도진의홍)에 끌려간 남원도공의 뱃길을 따라 남원의 불을 싣고 거제도 뱃길로 들어섰다. 거제도는 초대 심당길, 남원의도공과 각종기술자등 포로들이 중간 기착했다는 곳이다. 혹여 거제도에 기착했다가 지치고 병들어 죽은 남원도공들의 원혼이 있다면 이 배에 실린 남원의 불울 보고 한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나라 호는 곧장 현해탄을 향 했다.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대마도 부근을 지난다. 도공들은 이 대마도에서 지친 몸을 쉬었을까? 오후 10시 배가 이미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공해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신전로는 15대 심수관 일행에게 인계 된다. 10월 21일, 오전 5시 40분, 배는 일본 센다이 항(內川港)에 도착한다. 부산에서 500km. 항해시간 20시간이다. 센다이 항 상공에 느닷없이 헬기 한대가 나타난다. 가고시마 tv방송 취재팀이다. 오전 8시 40분배가 입항하고 한나라 호 센다이 항 입항 환영식이 열린다.
한나라 호는 다시 남원의 불을 싣고 그 옛날 남원도공들이 일본에 처음 도착했다는 쿠시키노를 로 향한다. 도공후손들은 남원에서 마련 해 준 무명바지. 저고리에 짚신. 머릿수건을 쓰고 크레인으로 내린 신전로 뚜껑을 열고 그들이 준비한 영구보존용으로 만든 램프에 불을 옮겨 동시래정에서 온 어선을 타고 바다를 통해 시마 비라(테루시마)로 간다. 불은 오후 5시 40분 ,'가마의 불 환영식장' 이란 현수막이 무대 배경으로 걸려 있는 시마 비라 데루시마(조도)해변 백사장으로 올라 왔다. 수평선은 저무는 태양이 핏빛으로 물들이고 4백 년 전 도공들의 피눈물 같았다. 22일 오후 1시, 동시래정 에꾸찌항(江口港)옆에 있는 고케케돔의 떠들썩한 기념식장이다. 남원의 시장은 갓과 한복으로 갈아입고 심수관은 게다에 일본 옷을 입은 채 나란히 불을 이끌고 식장으로 들어간다. 행사장에는 사쓰마야키 400년제(薩魔窯 400年祭)라는 무대 현수막이 걸려있다.
5시 30분 드디어 옥산신사(玉山神祠)에 불 봉납식이 거행된다. 이곳의 언론보도는 모두가 시종 일관 '우호의 교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불을 대한민국에서 가져왔다고 말 하면서도, 왜 남원에서 가져 왔는지, 어떻게 해서 가져오게 됐는지,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오후 6시 옥산신사의 봉납의식을 마친 불은 14대 심수관 집 앞에 건설된 공동 가마로 옮겨 왔다. 미야 마의 거리는 온통 축제다. '한일 우호의 탑(한일우호의 염)'이라고 새겨진 탑은 사쓰마야키 4백년을 기념해 이 날로 부터 영원히 타오르라는 기원을 담아 만든 탑이다. 탑에 불을 밝힌 후 동시래정 장과 미산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 소녀가 불 봉을 들고 가마에 불을 붙였다. 이어 남원시장과 심수관이 불 을 지피고 심수관은 규수 지방의 도공들에게 불을 나누어 주었다.
이 가마 속에는 이미 미산지역의 도공들이 제작한 도기가 들어 있었고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도공들 그 자손들의 작품 1백여 점이 들어 있었다. 대대로 꿈꾸어 온 '고향의 불'을 사용한 도기가 이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