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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휴정을 통해 보는 울산역사 |
이명훈(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충숙공기념사업회 이사)
2022.11.10.
울산남구문화원
1. 역사에 대한 관심
역사에 관심, 내 조상은 누구였으며 내 생가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왔을까.
조상과 선인들도 나와 같이 살아서 숨쉬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아프고 회복하며 살아갔던 사람들.
전철의 노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인 아니었고, 나와 같은 시기를 ‘정상적으로’ 거쳐간 분들,
2. 역사를 알기 위한 방법
관심 있지만, 역사는 너무 크다. 종단하여 사과를 분석. 分かる,
이휴정을 중심으로, 종단면으로 울산역사를 분석.
3. 이휴정과 이휴정공
이휴정은 건물, 이휴정공은 이동영
1983 경남 문화재자료 제11호,
1997 울산 문화재자료 제1호, 다양한 문화역사적 스토리를 간직한 대표적 문화유산.
신정동, 태화강 동쪽 70미터, 태화교 남쪽 170미터
이동영(1635~1667)은 1600년대 중반 현종시대 인물.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 인명 선광인효현 숙경영정.
1662년, 28세의 이동영이 이미정(二美亭)을 건립. 은월봉/황용연의 아름다움에 二美.
1666년에 이휴정으로 개칭. 그 전말이 이휴정선생문집 ‘이휴정記’에 기록됨
과객이 묻기에 이휴정공이 대답.
“이수삼산의 사이, 두줄기 물과 세 봉우리를 아껴서 지은 이름”
“그렇다면 왜 五美 아닌가?
조부 難隱公은 강호의 大隱이라 이름을 숨겨 휴산휴수(二休)를 원했으니 二休가 어떤가”.
옷깃을 여미고 성명을 물으니 시로써 화답.
산이여 산이여 아름답고 아름다우니 쉴만하도다 山乎山乎 美則美矣 可以休矣.
물이여 물이여 아름답고 아름다우니 쉴만하도다 水哉水哉 美則美矣 可以休矣.
- 몇 년 후 서신을 받으니 “이휴정 주인은 열어보시오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나그네가 삼가 쓰다” 二休亭主人李某開坼 潛名客謹函. ‘개탁’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 박세연이 年長.
①산과 물에서 쉰다.
②휴(休)에는 쉰다는 뜻과 함께 아름답다는 뜻도 있다(二美를 품으면서 二休로 개칭)
③은거도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오만으로 비칠 수 있다.
- 志隱難隱 = 二隱 = 二休
모든 것이 변하고 흘러간다는 불교 사상에서도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 말하기도 한다.
空이 옳으나 이 역시 흘러가는 것이니 여기에 집착하여 본성을 놓치지 말라는 뜻 : 志空難空.
4. 이동영의 이휴정기
이동영의 이휴정기: “정자를 이휴로 명명한 것은 은거의 뜻.
조부 난은공은 임진란에 국가를 위해 창의했으나 전공을 사양하고 자리를 피했다.
은월봉 아래 초옥을 짓고 志隱이라 편액. 추후 難隱으로 개칭.
은옹의 가문에 태어나 은옹의 글을 읽고 은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은거의 뜻으로 二休亭으로 명명”.
5. 난은공 이한남
이동영의 조부인 난은공은 기박산성 의병.
평화로운 선비 세계에서 분위기가 반전하여 임란 전야.
-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20만 대군이 부산포에 닿은 1592년 4월 13일.
8일이 지난 4월 21일, 울산의 선비들은 울산 북구의 기박산성에서 창의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4월 22일보다 하루 앞선 4월 21일.
- 기박산성은 경주를 지키는 관문으로 8세기 초 신라 성덕왕 21(722)년에 축성.
장성(만리성)이 축조된 것도 대략 이 시기였다.
기박산성은 북구 중산동 및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걸쳐 있는 타원형 석성.
장성은 범서읍 두산리에서 외동읍 모화리로 연결되며 그 끝이 기박산성.
- 기박산성 18인: 박봉수+이한남+이경연(吾13대조)+고처겸(고문구 문화원장 선조)+박응정 장희춘 이봉춘 심환 박진남 김응방 서몽호 전응충 견천지 류정 류백춘 전영방 박손 지운스님.
- 28세(이한남, 이경연), 35세(고처겸), 56세(류정)으로 연령대가 넓게 분포됨.
- 울산 의병진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울산 의병진의 한 부분이다.
게릴라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 선무원종공신.
- 다른 울산 의병들과 합세하여 영남 일대의 전투에 참전. 정유재란 끝날까지.
- 소모문召募文이 아직 남아서 전한다. 소모召募라 함은 소집하고 모집한다는 뜻이다.
| 나라가 2백 년 동안 태평하던 끝에 하잘것없는 섬 오랑캐가 감히 반역의 뜻을 품고 바다를 건너 병兵을 일으켜 우리 강토를 짓밟았습니다. 우리 생민을 살육하고 곧장 서울을 범하니 임금은 몽진하여 수레가 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으니, 신하된 우리 모두에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회복하기를 도모하지 못한다면 압록강의 동쪽이 다시는 우리 소유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니 통곡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피를 뿌리고 주먹을 떨치며, 한목소리로 서로 응하여, 구차스럽게 가족을 살릴 계책을 찾기보다 조속히 의병의 소모召募에 응합시다. 싸우면 싸우는대로 쳐부수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그 살을 먹고 그 가죽을 덮고 자야 하겠습니다. 살아남으면 열사가 되고 죽으면 충의의 혼백이 될 터이니, 이는 단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일 뿐 아니라 또한 집안을 보존하고 자신을 돕는 길이기도 하겠습니다. 흩어져 살기를 꾀하기보다 차라리 모여서 함께 죽읍시다. .... |
6. 괴천공 박창우
또 한 사람의 영향 : 괴천공 박창우(1636-1702)
1662년 28세 이휴정 건립
1664년 30세 경북 영천에서 빈한하게 살던 박창우에게 울산 이사를 권유하여 울산 사람.
- 이예의 손서 양대봉도 어린 시절에 울산에 우거(寓居).
- 박창우의 학문을 사랑한 이동영은 토지/가옥/가재도구. 큰 재산으로 전폭후언.
박창우의 남이록(南移錄): “벗의 권유로 울산에 도착하니 여섯 문의 집과 곡식 서른 꾸러미, 옹기 등 살림이 으리으리하게 준비돼 있었다”.
- 양인은 수시로 회합하여 시담을 교환하며 울산 문풍을 협의.
1666년 봄에 동반 사마시 입격
- 박창우 왈 이성지골육으로 표현하며 생전의 미지난 정을 후손들이 이어가도록 유훈.
-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헌 장현광을 모시기로 됨.
- 나란히 모실 것인지 조금 아래에 모실 것인지의 시비 즉 병배시비並配是非.
- 아래에 모시기로 결정된 후 가산이 기울어지자 세거지인 영천에서 울산 북쪽으로 이거.
이런 친구가 내게 있는가....?
행색이 초라한 나에게 행여 마음을 다칠까봐 조심스레 무음의 발소리로 말없이 웃음지으며 팔짱 껴주는 이런 친구가 있는가?
고독과 외로움이 골수를 뒤 흔들 때
언제 어느 곳이든 술 한 잔 기울이고 무언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 엮을 이런 친구가 있는가?
- 관포지교(관중과 포숙)
- 금란지교(단단하기가 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蘭)과 같은 사귐)
7. 세의(世誼)와 강의계
‘강의계, 360년의 우정’ 2015년 ubc 특별기획
1707년, 세의(世誼)를 도모하기 위해 계(契)를 결성
계는 명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1938년, 울산지역유림이 나서서 계안(契案)을 새로 정립했고, 강의계(講誼契)라 명명.
현재 강의계는 두 문중이 해마다 번갈아가며 6월에 개최하고 있다.
6월 11일, 이휴정 주손 이증씨 초청으로 필자도 참석.
참으로 珍しい(드문)。있기 어려운 일.
있기 어려운 까닭이 무엇일까. 주면 자랑하고 싶고 받으면 부인하고 싶은 마음.
주어서 자랑하지 않고 받아서 부끄럽지 않도록.....
아름다운 사귐을 후손들이 깨어버릴 수 있다.(최초 창의의 논란도 조심스럽게)
“웃기고 있네”와 같은 해프닝이 세의를 해칠 수 있다.
“우정과 양가의 세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울산지역 공동체에 미친 영향이 크다.
- 이동영은 울산의 유풍 진작을 위해 사림 10인과 함께 울산 최초 서원인 구강서원 건립을 발의하고 오랫동안 유사를 맡아 노력했으며, 1664 이후 박창우가 힘을 보탰으며 결국 이 일을 마무리.
- 이동영 사후 11년이 지난 1678년 창건. 사액서원(1543 주세붕 백운동 서원).
-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한 고을의 위상과 품격은 서원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됨.
- 잘 사는 고을이라도 서원이 없으면 대접받지 못하며 사족(士族)으로서는 타 고을 선비들과의 교류에서 뒤지고 과거시험에서도 피해.
- 고을마다 경쟁적으로 서원건립에 나섰으며, 사액(賜額)을 받는 데에 온힘을 쏟았다.
- 문풍(文風)이 취약한 울산도 서원건립에 온 힘을 쏟게 됨.
- 고문구 구강서원보존회 이사장
- 양인은 1666년(현종7)에 과거(사마시 생원과)에 동방 급제하는 기쁨을 누렸다.
- 울산인으로서 과거 합격은 최초.
- 최초의 대과 급제자는 이동영의 방손(傍孫)인 이근오(1789년).
- 100년 후에 박창우의 후손인 박시룡(1890년)과 박시규(1885년)도 급제.
- 이동영의 방손인 이석진(1894년)과 합쳐 모두 4인이 대과 급제.
- 조선 후기 울산 지역사회의 문풍진작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 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 박상진 의사가 박창우의 후손.
- 남창 3·1 의거는 학성이씨 문중이 주도했는데 발기인 8명 중에 4명이 이동영의 후손.
8. 이동영의 후손
이동영의 후손들도 뚜렷한 족적을 남김.
광전계후(光前啓後) : 선인의 가르침을 빛내고 뒷사람의 길을 밝힘. 왕조실록에도 있는 표현.
(1) 손자인 태화당 이광희는 북방 외침이 있자 출정하여 전공.
계림사화(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계획에 남인 사림이 반대하며 노론정권에 저항)로 3년간 강원도 명천에 유배.
문집으로 유배일기인 태화당북정록 및 태화당일고.
(2) 증손자인 무민당 이여규는 큰 선비. 무민당집,
- 북정일기(함경남도 북청 남영에 근무하던 부친 이광연을 뵈러 1756년 한 달 간의 여정을 기록한 여행기. 한 달간에 걸쳐 찾아가며 그 과정에서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기행일기. 여러 자연 경관과 풍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이여규의 문집인 4권 2책으로 이루어진 무민당문집(无悶堂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8대 종손인 이수일(樹一: 남창 만세운동, 이동영의 8대 종손) 등이 편집, 간행.
- 「차운역대시(次韻歷代詩)」는 300여 구에 달하는 장편 칠언시
-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은·주나라 삼대, 전국시대와 진·한·위·진· 수·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또한 요순(堯舜)·공맹(孔孟)으로부터 정자(程子)·주자(朱子)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까지 내려오면서 그때 그때의 시대적 배경과 주요인물 주요사건들을 빠뜨림없이 재치 있는 필치로 매우 흥미롭게 엮어 놓았다.
(3) 이정걸(이수일의 子, 이동영의 9대 종손)
이휴정 건물이 노후하여 없어졌는데, 1940년에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다시 세웠다. 그해에 울산도호부의 객관이었던 ‘학성관’의 남문루(태화루)를 철거하게 되었는데, 이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학성이씨 월진문중이 이를 사들여 이휴정 옛터로 옮겨 세웠던 것이다.
- 2003년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
(4) 이증(전 울산mbc 사장, 이정걸의 子, 이동영의 10대 종손)
- 안동에 있던 이휴정 유품 박물관에 기증(이동영 소과 합격의 백패 포함).
- 울산충의사 건립추진위원장,
- 울산매일신문 초대 사장
9. 이동영의 선대
(1) 조선시대통신사 이종실
이동영의 8대조인 이종실은 세조 당시 조선시대 통신사였다.
1455년 세조는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고, 그 이듬해에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통치 체제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가던 1460년(세조6) 정월 초사흘, 왕세자가 임금과 중궁께 바치는 잔치가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한을韓乙의 급보 때문이었다. 1459년(세조5) 10월 8일 부산을 출항한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 앞바다에서 풍랑으로 조난했다는 비보였다. 한을 자신을 제외한 일행 100여 명 모두가 표류하여 행방불명이거나 익사했다는 것이다(『세조실록』 세조6년 1월 3일).
임금이 일본국왕에 보내는 국서를 받들고 통신사 일행이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향해 서울을 떠난 것은 약 5개월 전이었다: “첨지중추원사 송처검을 일본국 통신사로 삼고, 행 호군 이종실을 부사로 삼고, 종부시 주부 이 근을 서장관으로 삼아 예물을 가지고 일본국에 함께 가도록 하였다”(『세조실록』 세조5년 8월 23일). 당시 이종실은 종3품 대호군의 품계에 있었으나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정4품 호군의 관직을 맡고 있었다.
사고를 보고받은 세조는 “이를 애도하여 드디어 명하여 잔치를 정지시키고”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내가 한을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조치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관리들을 보내 시체를 수색하고, 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여기서 치제致祭라 함은 제사를 베푼다는 뜻이니, 수중고혼을 달래기 위한 수중 장사를 이르는 말이다.
이튿날 세조는 표류를 탐지하지 못한 죄를 물어 경상도관찰사 등을 문책했다. 그 다음 날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함길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의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일본통신사가 지난 기묘년 10월 초8일에 배로 떠났으나 풍랑을 만나서 정사 송처검이 탄 배는 간 곳을 알지 못하고, 부사 이종실의 배는 전복하여 패몰하였다. 바닷가에 있는 여러 고을 여러 포구로 하여금 후망하게 하여, 만약 표류하는 사람이 있거든 곡진히 구휼을 더하고, 시체를 발견하거든 간수하고 소홀히 하지 말게 하라(『세조실록』 세조6년 1월 5일).
조정은 한을을 구조해 준 대마도주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표류하는 배와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서 보내주도록 당부하기도 했다(『세조실록』 세조6년 2월 30일). 그러나 조난한 100여 명 중 어느 한 사람도 바다에서 생환하지 못했다.
사고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463년(세조9) 7월 14일, 일본국왕이 세조께 보낸 국서가 도착했다. 일본국왕의 말이다: “폐하께서 첨지중추원사 송처검과 대호군 이종실을 보빙사자로 삼아 보내셨는데…. 바닷가 제국으로 나아가서 수색했으나 표류한 배를 발견하지는 못했으며 발견된 시체는 이미 장사지냈습니다. 또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대재회水陸大齋會를 열어 송처검과 이종실의 명복을 빌어주었을 뿐입니다”.
수륙재水陸齋는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재齋’를 뜻한다. 천룡선사는 오늘의 천룡사를 가리킨다. 일본 임제종의 본산으로서, 무로마찌 막부를 개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웠다. 청수사, 금각사 등 쿄토 시내에 있는 12개의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천룡사는 이 중의 하나이다. 10만평에 달하는 부지 위에 세워진 천룡사는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종실은 비록 외교관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순직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의 6개 기사에 기록될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세조와 무로마찌 막부, 한국과 일본, 21세기 울산과 15세기 교토(천룡사)를 잇는 연결고리,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비극에는 페이소스(pathos)가 있다. 실패한 역사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2) 충숙공 이예 선생
충숙공 이예 선생은 이동영의 9대조이다. 이예李藝(1373-1445)는 태종⋅세종 대의 외교관으로, 벼슬이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40여회에 걸친 이예의 일본 사행 중, 4회는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일본국왕에게 파견되었다. 교토 파견 당시의 지위는 1422년 회례부사, 1424년 회례부사, 1428년 통신부사, 1432년 회례정사였다. 1428년은 조선의 대일 외교관이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일본국왕에게 파견된 최초의 해였다. 이에 따라 당시의 통신정사 박서생과 통신부사 이예는 최초의 ‘통신사’로 알려져 있다.
이예는 계해약조를 정약하여 왜구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문인文引제도를 확립하여 일본인의 조선입국을 통제하였으며, 뛰어난 외교력으로 왜구에 납치된 우리 동포 667명을 구출하였다. 또한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무쇠대포 도입과 병선兵船 개량 등 전력증강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업적이 재조명되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5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 외교통상부로부터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울산의 문화공원과 서울의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국도7호선의 울산 구간이 ‘이예로李藝路’로 명명되었다.
이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종실과 형제간인 이종근李宗根은 양근楊根 군수 및 행行 문의文義 현령의 벼슬을 받았다. 이종근의 사위인 양희지楊稀枝는 성종 대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대사헌 및 대사간의 요직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