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뮤직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UN평화유지군의 개입,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내전에 이은 코소보사태 등 끝없는 민족분규, 카슈미르 지역의 종교이념 분쟁 등 세계 곳곳은 여전히 소요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처럼 20세기 마지막 해에도 세계에서는 각 민족이 정체성을 되찾거나 확립하는데 입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월드뮤직 또한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21세기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자기반성과 확인 작업인 것이다.
물론 월드뮤직이 장르로 고착화되었거나 학술적으로 정의 내리기엔 그 범위와 역사가 대단히 넓고 깊다고 하겠다. 그래서 전통적인(traditional), 민속 또는 민족(fork or ethnic), 그리고 영미 팝 밖의(the 3rd world)것으로 범주를 좁히면, 대게 민속음악의 현대적 재발굴과 재현, 그리고 제3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민족 고유의 음악양식에 대한 현대적인 레코딩, 연주, 해석과 비평 등에서 다뤄진다고 말할 수 있다. (단, 영어권 국가 -영국과 미국이 대표- 의 음악시장에서 영어로 유통되는 현재의 대중음악을 '팝'으로 정의하고 싶지만, 영미 팝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여기서 팝의 정의는 별 실익이 없으므로 앞으로 소개될 세계의 음악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월드뮤직의 조류에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강산에, 김덕수 사물놀이, 김수철, 김영동, 넥스트의 앨범들, 신중현, 안치환, 원일, 이상은, 정태춘, .... 등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월드뮤직 음악인으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들일 것이다. 필자는 이 시리즈가 언제 끝날지 못박을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월드뮤직으로서의 한국 대중음악이 갖는 위상을 제고해보고 이 흐름에서 어떻게 세계와 조우·교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각 음악인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이 어떻게 월드뮤직으로 성장해나갈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Nueva Cancion (New Song)
누에바 깐씨온!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노래운동은 한국의 1980년대 정세와 노래운동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보다 10여년 앞서 전개된 이 노래운동에서 역사의 보편적 진리와 시대를 초월한 예술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1. 누에바 깐씨온의 태동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동서 양 진영은 철저하게 서로 다른 색깔로 무장한 채 모든 부문에서 영역 싸움을 해나갔다. 양차대전 후 팍스아메리카나를 공고히 해나가던 미국은 소련의 세력확장에 대해 세계평화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따른 명분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미·소는 한치의 양보 없이 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제3세계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분쟁을 낳았다. 거기엔 한반도 남북분단을 비롯해 베트남전,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반혁명들이 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념대립의 구도 속에 온전한 제3세계는 없었다. 미국은 좌파정부의 수립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반공을 위해서라면 군사쿠데타 지원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의 제반관계에서 미국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라틴 국가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정부세력,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리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낳은 현존하는 예증들이다.
◁ "Help Nicaragua!" 우나 빠니아가 作(Una Paniagua, 1985)
"노래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일찍이 누에바 깐씨온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인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에 의해 1940년대부터 민속자료의 수집과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전통 민속의 회복운동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운동의 시발점은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출범 전후로 볼 수 있으며, 보다 근원적인 동력은 쿠바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8년 쿠바는 독립운동가이며 혁명의 순교자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가 이끈 독립운동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자본이 개입하고 대부분의 산업기반이 미국의 소유가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정권은 민중의 삶과 이반된 채 부패의 깊은 골을 형성한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Ruz)가 이끄는 160 여명의 게릴라는 1,000명의 수비대가 지키는 몽카다 기지를 급습하지만 탈환에는 실패한다.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953년 7월 26일이었다. 계속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Che Guevarra, Ernesto)와 함께 혁명을 완수한다.
바로 이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정치영역 뿐만 아니라 제반 문화운동에 대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문화혁명으로서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쿠바혁명과 더불어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해방신학을 비롯한 매판자본론, 종속이론 등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다. 유럽의 전통 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하고 재해석한 해방신학은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ez)신부에 의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형성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최대 해결과제인 민중의 빈곤문제에 대해 인식의 자양분을 제공함으로써 혁명의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감을 형성한 누에바 깐씨온은 민족주의 정신의 파고를 타고 지식인과 예술가의 집단적 문화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미국의 팝과 록에 젊은층의 관심이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민족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자각으로 활성화되었다. 한편 이 새로운 노래운동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지에 머물지 않고 쿠바에서 진행 중이던 새로운 노래운동 Nueva Trova(대표적 가수: Pablo Milanes 와 Silvio Rodriguez)에 영향를 끼쳤으며 혁명의 무기로서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에 제공되었다. 또한 대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맞물려 미국 내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에 동시다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데 그 공통된 특징이 있다. 앞서 언급한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와 아르헨티나의 Nuevo Cancionero Argentino, 브라질의 Nova Musica Popular Brasileria 등은 새로운 노래운동의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들이다.
◁ Grossmann Gruner 作(1974) 민중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끝끝내 승리하리라.
누에바 깐씨온의 본고장 칠레의 당시 정치경제적인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이 새로운 노래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리라 본다. 칠레의 간략한 현대사는 다음과 같다.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932년을 전후로 여러 차례의 쿠데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황에 시달렸다. 이후 민주적 정권 교체가 좌우익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1964년에 기독교민주당(PDC)의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까지 칠레의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신제국주의론, 매판자본, 종속이론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실제상황이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하며 발생한다.
1970년 당시 칠레는 초석과 동(구리)의 세계 최대 산지였으나 미국, 영국 등 외국 광산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 이득의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미국 30대 다국적기업 중 24개 기업이 칠레 진출해있었고 은행을 제외한 18대 칠레 기업이 미국의 자회사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지주와 지배계층이 전 경작지의 4/5를 차지함으로써 토지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수도 산티아고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배계층인 지주, 산업자본가, 교회 등 기득권 보수세력은 민주선거에 의해 좌파로 정권이 이양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1970년 9월4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당시 62세)가 36.3%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민주선거에 의해 사회당 정권이 창출되었다.
# 아옌데에 대해 짧게 소개하면, 그는 14세부터 구두수선공이던 무정부주의자 후안 데르마치를 통해 바쿠닌의 저작 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6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의대학생회장으로 선출된다. 1932년 사회당에 입당하고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1938-42년 보건장관을 역임했고,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상원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이 사이 1952년, 1958년, 1964년 세차례 사회당 또는 인민연합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선거운동에 누에바 깐씨온 음악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 비올레따 빠라로부터 영향받은 빅토르 하라와 인티-이이마니(Inti Illimani :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 낄라파윤(Quilapayun : 마뿌체어로 "세 명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란 뜻), 야뿌(Illapu : 께추아어로 "천둥·번개") 등의 그룹들이 그들이었다. 또한 같은 대륙의 음악인들도 이 새로운 노래운동에 참여한다. 우루과이의 다니엘 비에리티와 알프레드 시타로사, 페루의 왈츠의 여왕이라 일컬어진 차부가 그란다, 멕시코의 안파로 오초아와 로스 르크로리스타스,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 등이 그들이다.
제국주의적 착취의 근절과 독점타파, 그리고 농지개혁 등은 아옌데 정권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하여 구리광산, 철강 및 석탄 산업 , 은행 등 주요 산업을 전면 국유화하고 임금인상을 추진한다 . 특히 해외자본의 외국회사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감을 산다. 미국의 통신회사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m)의 국유화 조치는 칠레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당시 의장: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의 칠레에 대한 물밑 작전이 감행된다. 즉, 비축 구리를 방출시켜 구리의 국제시장가를 15.7% 하락시킴으로써 칠레로 외화유입이 차단되고, 계속해서 미국은 대외차관통로를 봉쇄함과 동시에 칠레의 미국산제품수입이 격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반(反)인민연합세력과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아옌데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로 1973년 1월에 인플레이션 150%에 달하는 등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었다. 4월 광산노동자 파업, 의사·법률가·건축가 등 일련의 중산층이 반(反) 아옌데 세력으로 형성됐으며, 인민연합 내부에서 개혁의 혼선이 빚어지는 등 아옌데의 점진적 개혁노선이 한계를 노정한다. 결국 CIA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마련된 셈이었다.
1973년 3월 인민연합이 의회선거에서 과반수 지지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아옌데의 신임투표를 계획한다. 9월 11일 신임투표계획 발표예정일이었던 그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해·공 3군, 경찰대의 연합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평의회는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총사령관을 선출한다.
한편 아옌데 대통령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하고, 그의 딸들은 강제로 대통령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경찰이 쿠데타 세력에 가세함으로써 모네다 궁전을 지키던 방위군은 방위군 사령관의 철수명령에 따라 대부분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아옌데 자신은 남은 몇 명의 경호원들과 쿠데타군에 맞서 모네다 궁전에서 끝까지 자동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타계하였다.(당시 군부는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 관저에서 촬영된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갖고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큰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영혼의 집 2』p.194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 쿠데타군에 포위된 채 행한 아옌데의 마지막 방송연설 중
곧이어 쿠데타 이후 아옌데에게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국외 강제추방, 구금, 고문, 사형집행 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며, 누에바 깐씨온 운동에 참여한 음악인들도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는다. 군부 쿠데타로 자국민뿐만 아니라 해외 음악인들도 본국으로부터 체포, 감금, 즉결 사형, 해외 강제추방 등 사회주의 이념을 뿌리 뽑으려는 메카시즘은 철저하게 실행된다. 키에타노 부아르조와 시코 바르키는 국외 망명, 우루과이의 아니발 산파조는 행방불명되었고 1972년 자신의 노래로 구금된 다니엘 비에리티도 때를 맞춰 이 시절에 추방된다.
1974년 12월에 피노체트는 대통령으로 임명되고 즉시 계엄령선포을 선포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여 의회를 마비시킨다.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하여 시장경제로의 전환, 5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을 1976년 180%로, 1982년 10%로 낮추었으나 외국인 투자와 산업기반이 다국적 기업소유로 실질임금수준은 정체되었고 사회복지 혜택은 개인적 부담으로 떠넘겨졌다.
◁ "계급투쟁(Class struggle)" Cesar Olhagaray 作(1983) 미국 자본의 침략에 대항해 싸우는 인민연합의 투쟁을 그린 것인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란 누에바 깐씨온의 구호를 반영한 기타 부분이 인상적이다.
"아옌데 정권시절엔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피노체트 통치하에서는 사고 싶은 물건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주머니가 비어있다." -- 칠레 한 언론인 (『콜롬부스에서 후지모리까지』송기도·강준만 저 , 개마고원 p.210)
1989년 12월 대선 17개 야당통합후보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당선, 헌법이 개정되고 민정이 복귀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군부독재가 마감되었다. 1994년 3월부터 집권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Eduardo Frei Ruiz Tagle)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2000년 1월 16일 실시된 대선 결선 투표에서 집권 중도좌파 연합 후보인 사회주의자 리카르도 라고스(61)가 51.31%를 얻어, 보수우파 후보 호아킨 라빈(46세, 48.7%)을 누르고 당선됐다. 27년만에 아옌데가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정책기조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유지되는 중도좌파이다. 라고스는 오는 3월11일 취임, 6년 임기를 시작한다.
한편 최근 피노체트에 관한 외신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에 체포돼 영국내 가택연금 조치가 취해졌으나 건강문제로 석방될 것이라고 한다. 피노체트의 석방과 칠레본국 송환을 둘러싸고 지지와 반대가 양분되는데, 영국 전 수상이었던 보수우익 마가렛 대처는 환영의사를 표명했다. 대처의 지지 이유는 지난1983년 아르헨티나와의 대 포크랜드전에서 칠레 군부정권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인권연맹>, <고문 희생자 진료를 위한 의료재단>, <칠레인 유가족협회>, <5월광장 어머니회>, 피노체트를 반인륜 혐의로 기소한 스페인 후안 가르손 판사, 벨기에 정부 등은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만일 피노체트가 석방된다면 벨기에 정부는 그 조치에 대하여 국제적 압력을 행사할 것이며, 본국 칠레의 국민 또한 학살자 피노체트에 대해 사법당국의 엄중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피노체트의 사법처리를 강구하고 있는 국가는 월드뮤직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월드뮤직의 최고시장이고 벨기에 또한 안데스 민속음악인들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과거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스페인, 이 나라의 플라멩꼬는 세계적 문화상품이 아니던가.)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씨온 가수 레온 히에코(Leon Gieco)의 '단 하나의 소원'의 노랫말을 인용하며 정치적 격변기에 살아남은 이 노래운동의 정신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단 하나 신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괴로움 때문에 무관심해지지 않는 것 아무것도 못하고 외로이 방황하다 죽게되지 않도록
누에바 깐시온 2회부터 음악인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빅토르 하라이다.
# 참고문헌 및 자료 : 『콜롬부스에서 후지모리까지』송기도·강준만 저 , 개마고원, 1998 『라틴아메리카사』강석영 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6 『라틴아메리카 변혁사』백산서당, 1985 『음악과 사회』 이장직 저, 청하, 1991 『영혼의 집 2』이사벨 아옌데 저, 최승자 역, 도서출판 둥지, 1991 아따우알빠 유빤끼 홈페이지 http://www.geocities.com/SoHo/Coffeehouse/6522/yupanqui.html 비올레타 파라 홈페이지 http://www.c5.cl/~piriarte/violeta/ 빅토르 하라 홈페이지 http://www.alumnos.utfsm.cl/~evargasp/ 인띠 이이마니 홈페이지 http://www.inti-illimani.cl/disco.htm SBS FM 라디오 <성시완의 음악천국> 1998-99년 "누에바 깐시온" 특집방송 |
첫댓글 아쉽게도 자료 사진이 뜨질 않는군요.. 누에바 깐시온 ....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되는데... 우째 방을 잘못 골라 올린 듯한 느낌이???
+.W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