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한가함을 사랑한다. 분주에 길들여지다가 맞는 한가함은 무더위의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같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홀로 앉아 밖을 내다보면 그리울 것도 외로울 것도 없는 나의 공간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디 먼 곳에서 친구의 전화라도 울려 주면 더욱 좋겠지만 자유로운 공간에 앉아 사색의 너울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난 한 마리 창공의 새가 된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차 한잔이다. 식사한 후의 숭늉은 구수한 미각을 남겨주는 것으로도 좋고 보리차 한잔은 입가심으로도 개운하지만 다소곳이 앉아 예를 갖추어 마시는 작설차나 우전차는 이조여인인 양 향기를 느끼게 해서 좋다. 그러나 그런 고고한 자태까지 원하는 다도까지 아니 가더라도 그저 아무런 차라도 한 잔이면 나는 좋다. 때로는 친구가 여행에서 돌아오며 건네준 오룡차도 좋고 금박이 들어있는 고급차는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며 따뜻한 홍차에 한방울의 위스키를 떨어뜨려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진한 감동을 준다. 그보다도 한 스푼의 정제로도 온 방안을 향기로 적셔주는 커피 한 잔을 좋아한다.
원두의 맑은 맛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설탕과 프림을 많이 넣어 저은 투박할 정도의 인스턴트 맛을 사랑한다. 일점 오대 이대 삼...커피와 설탕과 프림의 비율이다. 그 비율은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쌉쌀하면서도 감미로운 차 향으로 온몸을 스민다. 그럴 때면 세상사 잠시 황홀경에 빠지곤 한다. 때로는 미워했던 옹졸함이며 더러는 원망했던 사악함이며 누군가를 이겨야 했던 승부근성이 참으로 하찮게 부끄러워지면서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한 모금씩 입안을 적실 때마다 아름다운 단어만이 떠오른다.
삶이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얻는 것인가. 그 한 방울의 향기로운 물에서 얻어지는 고요함이며 안온함이 그리도 거대한 오욕칠정을 다스려 줄 때면 내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고픈 일들이 스치기도 한다. 비록 좋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삶은 못 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 나설 준비를 할 것이며 언젠가는 자연스레 다가올 일들에 마음을 두어 본다. 한번쯤 취해서 세상을 희롱하고팠던 일들도 부질없었음을 의식한다.
그런 나의 차 한잔이 까탈스러운 데도 없지 않다. 어디 먼 길에 갈 적이면 휴게소의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의 미각에 신경이 곤두서고 내가 바라던 바의 맛이 아닐까봐 잠시 속이 탄다. 대개는 실망을 하게 해 주지만 어쩌다 맘에 드는 맛이면 그렇게 반가워 속으로 환호한다. 그 다음 나는 두 가지를 고민한다. 하나는 종이컵의 감촉이다. 따스한 온기를 절단한 듯 미지근한 컵의 발열에 맘속으로 저항한다. 안마실수 있다면...하고 잠시 고민을 한다. 나와 네가 만나 동화되는 그 따스함 또는 뜨거움을 뜸 안 들인 밥처럼 먹어야 하는 고민...그리고 결코 이롭지 않은 커피를 독약인 양 먹어야 하는 갈등에 버리고 싶은 생각이다. 실로 나는 위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 커피는 독약에 가까운 적이 여러번이었음에도 친구처럼 사랑함에 있어 이렇게 괴로움을 준다면 버려야 마땅할 일인데 막상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우유부단함이 괴로운 것이다. 버리다니...이미 마셔야 할 운명의 잔이다. 맘에 아니 드는 종이 찻잔의 살갑지 않은 느낌과 함께...
나의 커피 애호는 삼십대 중반부터이다. 커피가 그다지 보편적으로 되어있지 않은 기호식품이었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이유로 상용화가 덜 된 시대였다. 더욱이 보수적인 직장에서의 온수준비는 원시적일 수밖에...겨우 알코올 램프나 전기 커피폿의 도움으로 휴식시간에 누리는 맛은 간식의 의미처럼 풍요로웠다. 하루 한잔의 커피로 인해 동료들과의 인간관계도 원활해지고 물 한 방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것을 위해 필사적인 정성을 기울였던 것을 생각하면 낭만으로 떠오른다. 직장장의 어지간한 반대에 숨죽여 마셔야 했던 한 모금의 커피...그래도 쉬는 시간이면 따끈한 컵을 들고 하하호호 웃는 맛이란 별난 것이었다.
이제는 커피는 숭늉만큼이나 보편적이어서 사치가 아닐진대 오랜 음용 습관으로 위장이 고약을 떠니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 하다던가. 커피를 마시기 전에 우유한잔을 마셔야 하는 위장의 다스림을 알았으나 때로는 실천할 형편이 못 되는 안타까움에 마시는 까탈이라도 부리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커피 잔은 나름의 사치이다. 독약을 마시는 기분이니 굳이 맛갈스럽고 분위기있는 그릇을 고집하게 된 것이다. 꼭 아름다운 찻잔 일 것. 만지면 뜨거움이 맑게 다가올 것. 여러번 마셔도 보온이 잘 되어 마지막까지 입안에 뜨겁게 전해질 것. 가능하다면 가슴에 꼭 껴안아도 오래 온기가 남을 것. 이런 몇 가지를 충족시켜 주어야하는 컵의 본분을 위해 마련된 찻잔 중 나는 진홍색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을 유독 좋아한다. 노랑 보라 장미꽃과 패랭이꽃이 있고 초록 잎새가 있으며 하얀 손잡이로 마무리 된 화려한 모양의 이 잔이 친구가 된 것은 십년이 넘었나보다. 본디 한 쌍이었는데 하나만 남고 보니 더욱 각별한 듯. 특유의 이 잔을 애용하는 이유는 최소한 사치라 부르짖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춘 때문인데 잠시 물 한 모금의 여유와 사색을 돕는데는 나름의 친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차 한잔, 때로는 친구처럼 편안하고 새처럼 자유로운 향취 속에 취하면 세상사 좋고 나쁨이 없이 그저 안온해진다. 독약일망정 향기에 취하면 세상사 사랑할 가치가 많음을 의식한다.그리고 한가한 그 시간이 참으로 자유의 물결처럼 소중하기만 하다.
일점오대 이대 삼...나의 맛갈스런 커피...자유의 새장을 유영하는 이 매력적인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