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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我의 집 광장 중앙에 계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곁에 서서)
방유룡(方有龍) 안드레아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1900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선종하셨는데 개화기 당시 신학문에 배움의 길을 열고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30살에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으십니다. 신부님의 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0.03.03 서울 정동에서 출생.
1917.03.03 용산 예수성심 소신학교 입학
1930.10.26 서울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 받음
1930.10 강원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보좌신부
1931. 09. 황해도 장연성당 보좌
1933. 02. 황해도 재령성당 주임
1936. 05. 황해도 해주성당 주임
1942. 02. 황해도 개성성당 주임
1946. 04.21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설립
1950. 05 서울가회동 본당 주임
1950. 10 서울 제기동 본당 주임
1953. 10.30 한국순교복자 수도회 설립
1954. 서울 후암동 본당 주임
1955.10.07 한국순교 복자수도회 입회
1957.03.0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외부회 설립
1957.05.06 종신서원
1962.10.01 미망인을 위한 수도 공동체 빨마원설립
1986.01.24 선종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성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가 방유룡 신부님에 의해 창설되었고, 1951년 12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창설이념은 한국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사랑으로 일치된 수도공동체로 하느님과 합일하는 삶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특수목적은 한국순교자 현양과 동양고유문화에 대한 연구·보존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수덕론(修德論)으로 점성정신(點性精神)·침묵대월(沈默對越)·면형무아(麪形無我) 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 수덕론은 곧 창설자인 방유룡 신부의 가르침이십니다. 방유룡 신부는 1930년대부터 한국인 여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8·15광복 다음해 자신이 사목하고 있던 개성본당에서 윤병현(尹炳賢)·홍은순(洪恩順) 회원과 함께 이 수녀회를 발족할 수 있었습니다. 창설되던 해 10월에는 6명의 회원이 더 입회하여 모두 8명이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소착복식(小着服式)도 행하여졌습니다.
이후 그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양재학원을 경영하고, 개성에 단독주택도 구입하여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1950년 3월에는 서울 청파동2가 현 소재지로 수녀원을 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부산 피난생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1952년 12월에 서울로 귀환해서야 첫 착복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이들은 샤르트르 성바오로수녀회의 수련지도를 받기도 하면서 2년을 더 지낸 다음 1954년 12월에는 마침내 첫 서원자 5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1957년 3월 6일재속수도회(在俗修道會)인 한국순교복자회 제3회(第三會)를 발족시켰고, 수녀회에서는 이후 사회사업과 전교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9월 첫 종신허원식을 거행하였으며, 1961년충청남도 천안에 복자여자중학교를, 1963년에 복자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방유룡(方 有 龍) 신부님께서는 면형 무아, 점성,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라 하셨습니다. 그 뜻을 살펴 적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면형(麵形) 무아(無我)의 삶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완성한 사람들은 바로 믿음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이십니다.
점성(點性) 정신이라 함은 일상 안에서 순간순간 성화한다는 뜻입니다.
침묵(沈默) 우리 자신을 극기로 밝히고 절제하는 것으로 침묵의 십계를 제시하였는데
분심, 사욕, 귀, 눈, 코, 말, 맛, 수족, 이성,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침묵을 내적, 외적으로 구분하고 영혼 침묵, 이성 침묵, 의지침묵으로 나눕니다.
침묵에 대하여 완덕 오계로 구체적으로 접근해보면
1계 – 분심 잡념을 물리치는 절제된 삶으로 재속안에서 하느님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며 호기심을 떨쳐 버리고 많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러 한 것을 바탕으로 상상이나 추측, 오만을 버려야 한다.
2계 – 사욕을 억제하여 맑은 양심을 늘 지녀야 하는 것으로 나만 편한 이기주의와 교만한 마음, 아집에서 벗어나 자유를 지향하는 침묵이다. 내적 침묵에 해당하는 것이 1계 와 2계입니다.
3계 – 늘 평화의 미소를 지니고 말과 행동에도 불만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침묵으로서 단정한 태도로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런 행동을 일상화해야 한다.
4계 – 양심의 불을 늘 지녀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선행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선함과 덕으로서 양심의 불을 항상 밝게 밝힐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한다.
5계 – 대월(對越) 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늘 정화시키는 삶이다. 대 월 적 삶은 3칙과 2효과로 구성된다.
1칙 – 내 자작으로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2칙 –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한다.
3칙 – 나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만 행한다.
효과 -
1 효과 –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항상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2 효과 –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친히 하신다.
결론 - 3칙과 2효과는 결국
어떠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어떠한 세상만물에게도 제 한 받지 않고 관상적 삶으로 초대받게 됩니다. 이러한 초대는 결국 하느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계획안에 머물게 하는 삶입니다.
5계는 - 의지침묵으로 내가 가진 모든 자유를 천주께 드리고 성의를 따르겠다는 삶의 계율입니다. 우리가 갖으려는 자유를 하느님께 봉헌하면 더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게 되고.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제사가 바로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 단계가 바로 면형 무아의 경지로서 애, 덕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양심에 어긋남 없는 자유의지로 구현한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따르는 삶인 것이지요. 평화와 선!
마른날이 지속되어 폭염이 낮 더위를 끌어올리지만 적당한 바람이 곁에서 맴돌아 녹음 뒤에 숨어 있으면 선선함이 숲 향기와 더불어 여름 그늘이 근사하게 마음에 와 닺는 어느 날. 배티를 중심으로 순례와 작은 걸음 여행을 하시려 산막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진천군 백곡면 일대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서 박해를 피난하려 조성된 공동체 역사가 깊고 넓게 퍼져 있는 곳입니다. 차령산맥 줄기인 서운산 동쪽 기슭 안성으로 넘어가는 배티재 아래 배티성지를 중심으로 삼박골, 동골, 오니, 정삼이골 절골, 정말, 용진골, 발레기, 등점, 새옹과 천안과 경계를 이루는 성거산 우물목 고개 동서로 싸리 목, 소학동, 먹방이, 매일 골, 서덕 골 등 수없이 많은 공동체가 교난(敎難)을 피해 숨어 만든 공동체입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동진하여 연풍으로 피난하고 그곳에서도 견디지 못하면 백두대간 산중에 한실을 만들었고 상주로 넘어가 낙동강변 따라 끝없이 도피하며 끝까지 신앙의 끈을 내려놓지 않고 결국 현재의 한국 천주교의 초석이 되었답니다. 진천에는 박해의 최전선에 서서 공동체를 습격하여 체포하고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심문하던 곳이 바로 진천읍 사무소였고 감옥은 지금의 진천경찰서 자리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에서는 수녀들을 배티로 파견하여 순교 역사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뜻을 함양하기 위하여 많은 공동체의 모습을 발굴하기도 하고 성지에서 소관업무에 종사해 왔습니다.
이런한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 순례동선과 걸음 여행 동선을 계획하였다.
자매님들의 순례 시작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바르바라 순교자가 함께 묻혀 있는 백곡 성당을 순례의 깃점으로 삼았다. 수많은 공소가 공동체가 있던 산골마다 있었는데 신자들이 떠나면서 공동체와 함께 사라져 현재는 두 곳만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백곡 공소다. 아직도 본당으로 승격되지 않았지만 성당 규모는 본당으로 손색없는 규모를 갖고 있으며 보통 공소에는 지역 신자 중 대표인 회장 직책을 갖은 신도가 관리하지만 백곡 공소는 주임신부님이 파견되어 상주하고 계신 곳이다. 아주 오래된 허름하고 작은 공소가 있던 곳을 허물고 목재로 1800년도 공동체 실상과 한국적 신앙 모습이 재현될 것 같은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는 곳이 바로 백곡 성전이다. 옛 공소 모습은 올케와 시누이 사이인 박, 윤 바르바라 순교자 무덤과 성모님이 모셔진 성모 동굴이 뿐이고 성당, 사제관, 교육관 등은 신축되어 봉헌된 건물이다.
두 순교자의 무덤 옆을 지나야 성전으로 입당할 수 있어, 잠시 순교자 무덤 앞에 서서 순교자를 위한 기도를 드린 후 입당하게 된다. 입당하게 되면 제대로 향하는 중앙에 전례서가 순례객을 기다린다. 봉독하고 묵상한 후 양 옆을 이용하여 제대 앞으로 나가 신자석에 앉아 묵상 기도를 한 후 제대를 바로 보면 옛 신앙 선조들의 박해와 순교의 삶이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복음 말씀이 잔물결처럼 온누리에 퍼지는 모습은 시각적 신앙심을 모아주고 고유 창문 모습과 노아방주 형상의 천정과 한국 고유 한복을 입으신 성모님은 한국 천주교 고난의 역사를 자비심으로 안아 주시고 그 고난의 영광을 함께 기뻐하시는 모습이 드러난다.
청주교구에선 매괴 성모님을 모신다. 성모동굴의 모습은 오래전부터 공소를 지켜오신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 순례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순례를 마친 후 백곡천 주변으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와 신앙 선조들이 숨어 살며 옹기를 굽고 숯을 만들어 내다 팔며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곳이 바로 진천 차령산맥 그늘이다. 백곡면에는 아직도 많은 숯가마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숯을 태마로 기념관과 숯을 이용한 쉼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일반인들에게 빌려 주고 있어 잠시 그곳에 들러 직원의 설명을 듣고 산책로를 걸은 후 한국 순교 복자 무아의 집을 찾았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21 - 1861)
1821. 03. 01.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 이성례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7. 여섯 살 때 한양 낙동으로 이사한 후 강원 김성, 부평, 안양 수리산 담박골 거처가 옮겨 진다.
1836. 02.06 부평에서 15살 나이로 모방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선발 된다.
1836.12.03.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이광렬 요한, 그리고 중국인 사제 와 함께 선발된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는 변문까지 동행하지만 이 후 서만자에서 마카오 까지는 투안 마리아노, 첸 요아킴의 안내를 받아
1837.06.07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조선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로 부터 세소년 좋은 평가를 받음
1837.11.27 최방제 소년 열병으로 선종
1839.04.11 민란으로 필리핀 도미니코 농장으로 피신. 당시 조선 기해박해(1839) 영향으로 부친 최경환 35살 나이로 순교
1840.01.31 모친 이성례 순교함, 이무렵 부친 순교를 모르고 안부 서신을 보냄
1842.02. 김대건 신학생 마카오 출발
1842.07.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산교사와 동행하여 프랑스함대를 이용하여 요동반도 백가점을 겨유하여 소팔가자에 도착 신학공부 시작
1844.12 소팔가자에서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1808-1853)로 부터 부제 서품 받음, 김대건 안드레아 조선입국 성공 다시 상해로 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귀국.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조선입국을 위한 루트 개척에 박차를 가함
1846. 김대건 신부 순교 소식을 접함
1847 마카오에서 이전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극동 대표부로 가 페레올 주교가 정리한 기해박해(1839),병오박해( 1846)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함. 이 당시 82 위의 순교자중 79위가 시성됨
1847.07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타고 4 번째 조선입국 시도 실패, 상해로 입국함
1849.04.15 마레스카 중국 주교에게 28살 때 사제서품을 받음
1849.05 메스트로 신부와 서해로 입국시도 실패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우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하여 중국 신자들을 사목(1849- 1850)함. 이 사목이 바로 한국 최초 해외 선교사로 기록됨
1849.12 압록강을 건너 조선 입국에 성공함 고국을 떠난지 실로 13년 만에 입국임
1850.12 한양에 도착 다블뤼 주교 병자성사를 시작으로 조선에서 최초 성무를 보기 시작함. 당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의 귀국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심경을 남김. 이후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 70 %에 해당하는 120 곳을 순방하기 위하여 매년 2800 km 걸어야 하였다.
1859.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최초 한국 교리서인 성교요지와 한문본인 성교요지문답과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한글본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발간될 때까지 110년간 공식 교리서로 사용되었다.
1861.06.15 12년간 7000 여리를 걸어 성무를 보던 신부님께서는 허약해 져, 문경새재 아래 진안리 삼거리 주막거리에서 과로와 장티프스로 쓰러져 배론에서 달려 온 푸르디 신부의 병자성사를 받으며 내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셨다. 이 때가 나이 40살로 사목을 시작한지 11년 6개월차 였다. 진안리 임시로 묻히셨다가 다시 배론으로 옮겨져 황사영 토굴위에 안장하시게 된다.
최 신부님의 선종은 ‘조선 교회 전체를 충격에 휩쌓이게 하였다. 이 당시 베르뇌 주교는 1861년 9월 4일자 자신의 서한에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며 슬픔을 달랬다.
당시 조선 입국에 성공한 최양업 토마스 사제에게 페레올 주교는 거처를 문수리 동골( 이 결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의하고 아니라하며 다른 동골이라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서양선교사 동선이나, 양업신부님의 사목 동선과 교우촌이 밀집된 당시의 의견을 달아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동골이란 지명이 진천에 여러곳이 있기 때문이다. 배티성지에도 바로 지척에 동골이란 교우공동체가 있던 곳이 존재한다)로 잡아 주셨는데 그 장소가 바로 현재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진천 무아의 집인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바로 배티 성지에 파견되어 성무를 보던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소속 김막달레나 수녀님이 직접 찾아 이곳에 살던 증인의 증언을 듣고 확인하고 그 밖에 옹기 가마터와 숯가터를 등을 현지에서 찾아 내어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곳에 수녀원에서는 1999년 무아의 집을 신축하여 수녀님들의 피정의 집으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골은 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자에 쓴 편지의 발신지로 기록돼 나오고 있다. 귀국 초 최 신부가 서한을 쓴 곳으로는 동골 외에도 도앙골(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과 절골 등이 등장하지만 최 신부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쓴 「최 바실리오 이력서」 등에 따르면,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거처로 진천 동골을 배정하자 즉시 동골로 와서 몇 해를 머무르며 전교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은 기록으로 미뤄 볼 때 최 신부는 입국 초기 최소 2년간 진천 동골을 사목중심지 겸 여름 휴식처로 삼고 전국을 순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 후 집신 장수가 된 두 내외는 무사히 박해 시대를 넘겼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이 「최 바실리오 이력서」수기의 주인공 빈첸시오다. 병인박해 이후 10년 가까이 신발 장수를 하던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 56세 정도에 당시 유행하던 악질로 7월 7일 고백의 기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무더운 여름 찾아 주셨는데... 소흘함이 없었는지 마음이 어눌해 진다. 선선하고 결실을 상징하는 가을에 다시 오실 수 있다면
폭염기 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또한 체계적으로 안내를 해드릴 생각이다. 세 자매님의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소원하며 ......
첫댓글 진천의 백곡 성지와 옛 신앙선조 들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과 묵상으로....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깨닫게 해주신 리더님께 감사 드립니다.
숙소는 아름답고 운치있는 산막.
초록으로 물들어진 산막은 한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
빨갛게 달린 앵두나무의 열매,까만뻣지,텃밭에는 친환경으로 먹을 수 있는 쌈채와 감자, 자유롭게 자란 머위잎~~~
완전 아름다움의 환상....
리더님께서 손수 요리하신 오리훈제 전골,
별님과달님이 비춰주는 의자에 앉아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끓어먹는 맛,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피정과 함께 산막으로 초대해 주심에 감사 감사 드리며~
가을 피정도 기대해 보면서~ㅎㅎ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