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54. ( 화포항 ––선암사- 금둔사 –낙안온천)
추운 날과 폭설이 잦았던 지난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2월 중순이 넘어가면서도 일기예보는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봄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느 해 2월, 순천 금둔사에서 납월매를 만나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해마다 이맘때면 바삐 순천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이곳의 홍매화는 별칭이 ‘납월매’인데 납월(臘月)은 음력 섣달을 말하며 그만큼 추운 겨울기운을 이겨내고 일찍 피어나는 매화라는 뜻이란다.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우리 부부는 이번 주일에 순천투어를 계획하고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화포항을 가볍게 둘러보기로 한다. 화포항은 순천만에 접하여 여수와 마주하는 조그만 항구마을이다. 뒷편에는 일출 및 일몰로 유명한 봉화산이 위치한다. 코리아둘레길인 남파랑길 순천 62코스이며 순천의 남도삼백리길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이 걷겠다는 각오로 화포항의 바다 위 데크 길과 함께 봉화산 전망대까지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화포항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바다에 설치된 데크를 지나는 동안 생각이 달라진다. 한겨울 못지않은 바람과 오늘따라 강추위라 할 수 있을 만큼 춥기 때문이다. 화포항에서 7000보 이상을 걷는 동안 우리는 잠시 갯가길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간식으로 담아온 고구마를 꺼내 먹는다. 오랜만에 야외에 덥석 주저앉아 먹어보는 고구마가 추억과 함께 따라 붙는다. 썰물이라 뻘이 하염없이 내다보이며 사람조차 거의 없으니 고즈넉하여 어촌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화포항의 풍경이다. 그렇게 남편과 나란히 앉아 간식을 먹는 동안 여행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된 우리부부의 일상이 참으로 잘 한 일이라며 서로에게 격려와 흐뭇함을 나눈다. 사실 40여년 함께 살아왔으니 무엇이든 함께 하는 일에는 서슴없을 것 같지만 현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상에서의 관계는 다소 티격태격하다가도 틈을 내고 또는 틈만 나면 당연히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하여 떠나와 보면 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서로 함께 여행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다양한 사회활동이나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그리고 퇴직 후 문화관광해설사의 일을 하게 되면서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반면 나는 늘 혼자 여행하기를 즐겼다. 혼자서 여행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인지 모를 중요한 것이 있으며 동행이 없다 보니 말하기보다 생각할 수 있음을 좋아하는 내게 적격이었다. 물론 혼자 하는 여행이 가진 장점 또한 많다. 그것은 민첩하고 효율적이다. 함께하는 여행이 즐거움의 배라면 불편함 역시 배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문제는 행복은 반으로 줄어도 행복이지만 불편함은 배로 늘면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혼자 여행하길 즐기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런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여겨진다. 내가 상대를 상처 입히거나 상대 역시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늘 혼자 떠나던 여행길에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남편이 동행하게 되었다. 물론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걱정과 달리 남편은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남편은 하루 2만 보 정도는 거뜬히 걸을 만큼 건강했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나 보다 그 사람은 더 좋아했다. 어쩌면 혼자 행복한 여행을 해온 나에게 남편은 함께 행복해지는 여행을 가르쳐 준 셈이다. 한편 문득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지만 가장 편안한 동행은 부부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남은 남일 뿐 가족의 든든하고 소중함도 함께 깨달아가는 것이다. 어쨌거나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 어울리는 신나는 여행보다 가장 편하고 자유로우며 여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 우리부부에게 여행의 시작은 함께 살아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깊은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주제가 있거나 없거나 갯가길에 앉아 둘만의 수다를 즐긴 후 화포항을 한 바퀴 돌아 선암사로 향하기로 하였다. 순천에 들어섰으니 선암사 홍매까지 보고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화포항에서 약 50km를 달려 먼저 승선교와 강선루를 지나 선암사 경내로 들어갔다. 선암매가 붉게 피우고 있으리라는 기대로 바삐 들어섰건만 웬 걸 선암사의 천연기념물 홍매 백매는 아직 눈 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득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선암사의 경내는 비단 홍매뿐만이 아니라 작은 오솔길처럼 늘어진 길들이 참으로 예쁘다. 그래서 올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안고 가기도 한다. 한편 남편과 함께 온 것은 처음이라 서로의 기억과 추억을 나누며 금둔사로 향했다. 금둔사의 납월매는 이미 약속이나 한 듯 분명 피어 있으려니 하였건만 지난겨울 유난히 추웠던 탓일까? 금둔사 관월당 앞에 자리 잡은 납월매는 개화 초기의 생동과 분주함을 느끼게 머물러 있었다. 역시 살포시 실눈을 뜨고 2월의 날씨를 살피는 중이라 어쩌다 성질 급하게 힘주고 있는 몇 송이 피어 있어 참으로 귀하고 귀하더라. 크나큰 기대로 들렀던 금둔사에 몇 송이 납월매는.오히려 귀하디 귀한 봄이다. 그래 단 몇 송이라도 납월매는 만났다. 그사이 뜬금없이 눈발이 흩날린다. 우리는 급히 내려와 마침내 금둔사 아래에 자리한 낙안온천에서 여행의 마무리를 하기로 한다. 세상에 똑같은 여행은 없다. 같은 여행지를 다시 찾더라도 여행을 떠날 때의 나이가 다르고 그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며 여행에서 느끼는 감정의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언제든 여행은 다시 떠날 수 있지만 흘러간 여행은 그것으로 끝이기에 지나간 여행을 기억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우리는 여행의 장사가 되어 앞으로 쓰게 될 우리부부의 여행 이야기는 그야말로 단순하고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나란히 늙어가며 에너지만큼 즐기며 세상을 여한 없이 살자는 서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가 될 것이다.
승주 쌍암기사식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