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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 Ⅴ』
11.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변화
1) 개화기 문학
1894년 갑오경장에서 1910년 대한제국 말기까지의 시기는 중세적인 질서의 조선 사회가 무너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온 서구 문물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오경장(甲午更張)에서 비롯한 개화사상(開化思想)으로 의식 세계가 더욱 넓어진 유학자·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 국가의 독립과 자주권 확립을 강조하던 사회 계몽 운동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문학을 개화기 문학(開化期文學)이라고 한다.
개화기(開化期)는 1890년대의 근대화 과정(近代化 過程)에 접어들면서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말기(末期)까지로 한정(限定)했다. 개화기 과정(開化期過程)의 소설은 1910년 이후에도 존재(存在)할 수 있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末期)에는 새로운 형태(形態)의 신소설(新小說)이 이미 여러 편 나타나서, 그 계기 관계(繼起關係)로서의 연결(連結)이 형성(形成)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갑오경장(1894) 이전에도 근대적(近代的) 성격(性格)의 작품(作品)들이 없지 않았으나, 사적(史的)으로는 신·구(新·舊)의 교체기(交替期)는 대한제국 시대(大韓帝國時代)를 정점(頂点)으로 간주(看做)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시기(時期)에 한정(限定)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다시 말하면, 구소설(舊小說)과 신소설(新小說)의 접점시기(接點時期)의 소설(小說)을 중점적(重點的)으로 다루어 보려는 의도(意圖)에서 책정(策定)된 시기(時期)다.‘개화소설(開化小說)’이 아니라 ‘개화기(開化期)의 소설(小說)’이라 한 것도 관점(觀點)을 통시적(通時的)으로 구소설(舊小說)로 올라가지 않고 혼합생성(混合生成)한 일시기(一時期)에 공존(共存)한 현상(現像)을 분석(分析)했기 때문이다.
―송민호, 『한국개화기 소설의 사적 연구』, 일지사, 1982, pp.11∼12.
송민호는 개화기를 1890년대의 근대화 과정에 접어들면서부터 1910년 대한제국의 말기까지로 한정하여 개화기 문학을 좁게 잡고 있다.
이른바 개화기 공간에 나타난 이야기체의 형식을 살펴보면 구소설, 정치소설, 신소설 등 세 분류로 나뉘어진다. 한국 신문학을 ‘이식문화의 역사’(임인식,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p.827)라고 규정하고, 전통 단절의 처지에서 신소설을 검토한 임인식은 “과도기 문학의 선구는 새로운 조선의 정치적 이상을 선전하고 깨우치지 못한 민중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직접적 또는 노골적으로 표현된 정치소설에서 시작한다. (.....) 단일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사실(史實)을 차용하고 설화에 의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것을 정치적 산문으로 즉, 정치소설로 볼 수 있는 것(임인식,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 제3장 제2절 「정치소설과 번역문학」)이라 하여, 신소설의 전단계에 ’정치소설‘을 두었다. 이 정치소설이란 개념이 일본 메이지 시대의 일본 특유의 정치소설에서 연유되었음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소설이 한국에서는 번역소설 또는 번안소설의 일종으로 등장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pp.3∼4.
김윤식은 개화기에 독자에게 읽혀졌던 이야기의 형식, 즉 소설의 형식이 구소설, 정치소설, 신소설 등 세 분류로 나뉘어진다고 보았다. 1906년 이인직이 『혈(血)의 누(淚)』를 발표한 것을 필두(筆頭)로 하여 1917년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출현했던 과도기적(過渡期的) 소설을 신소설(新小說)이라고 한다. 신소설은 개화파 중 친일적 색채가 강한 작가들이 주로 지은 장편소설이었다. 신소설이 등장하게 된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국어 운동이 대두되었고 독서 대중이 확대되었다. ㉡기업적 성격을 띈 근대적 출판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이 신문을 창간하기 시작했다. ㉣책을 출간할 수 있고 원고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생겨나자, 직업적인 작가들이 나타났다. ㉤서구의 근대적인 개화 사조가 일본과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신소설을 비롯한 개화기의 서사 양식들은 기업적 성격을 띈 근대적 출판사들에 의해 단행본으로 제작되어 유통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출판사들로는 회동서관·중앙서관·광학서포·대동서시·신구서림·영림서관·박문서관 ·광덕서관 ·유일서관 ·동문서림· 옥호서림 등(김영민,『문학제도 및 민족어의 형성과 한국 근대문학』, 소명출판, 2012, p.81 참조)이 있다.
한국에서 신소설이란 용어가 언제 처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1906년 2월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중앙 신보」의 광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1907년 1907년 3월에 광학서포(廣學書舖)에서 발행한 『혈(血)의 누(淚)』 초간본 표지에 '신소설'이라 씌어진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넓게 잡아 개화기 문학은 1894년 갑오경장에서 1919년 3·1 운동 이전까지의 문학을 개화기 문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갑오경장 이전의 소설을 고대소설이라고 부르고, 갑오경장 이후에 출현하여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되기 전까지 출현한 소설을 개화기소설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갑오경장부터 1917년까지 출현한 신소설, 역사·전기소설, 무서명(無署名) 소설을 총칭해서 개화기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개화기 문학의 특징은 삼국시대부터 개화기까지 내려온 고정적이고 인습적인 문어체(文語體) 문장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과 글로 적는 말이 일치하는 문체인 언문 일치체(言文一致體)로 바뀌면서, 국한문 혼용체(國漢文混用體), 국문체(國文體) 문장이 출현한다. 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민간신문이 나타나자, 신소설(新小說)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소설(新小說)’이라고도 하는 개화기 소설은 언문일치에 접근하는 문장을 구사했고, 제제는 현실에서 취재하였다. 선구자적 인물을 내세워 자주 독립, 신교육 예찬, 자유 연애, 남녀평등, 풍속교화, 구습 타파, 봉건 제도 타파 등의 문명개화·계몽사상을 추상적인 묘사를 통해 고취하고 있다.
신소설은 전대소설의 긍정적 계승이면서 한편으로 부정적 계승이기도 하다. 긍정적 계승은 무엇보다 유형구조(類型構造)의 일치에서 확인되고, 유형구조의 일치는 인간형이나 주제의 일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소설은 전대소설의 전통을 시대의 요청에 맞도록 개조했고, 전대소설과는 다른 가치를 창조했다. 신소설이 새로운 소설이라고 하는 새로움도 신소설이 전대소설의 부정적 계승이기에 나타난 것이며, 전대소설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며, 전대문학과 후대문학의 일반적(一般的)인 관계가 신소설의 경우에도 확인되는 것이다. 신소설은 전통과 단절되어 있다든가 신소설은 서구문화의 이식(移植)으로 이루어졌다든가 하는 것은 한 시기 유행하던 몰주체적(沒主體的)인 사관(史觀)에서 연역된 유견(謬見)이며, 작품의 실상(實相)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쉽게 극복되지 않고 있던 선입견(先入見)이다.
―조동일,『신소설의 문학사적 성격』,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3, p.132.
신소설은 고전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 시대의 요청에 맞도록 개조해 다른 가치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제재(題材)를 현실에서 가져왔고, 주제가 근대적 사고에 가까운 특징을 가진 개화기 소설은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움이란 찾기 어렵고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은 고대소설의 연장에 속한다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신소설의 일부 작품은 축첩 관계(畜妾 關係), 가부장제(家父長制)를 드러내고 있어 고대소설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역사·전기소설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도 많이 등장했다. 외국에서 적극적으로 문물을 수용해 개화를 해야한다고 주장한 개화파(開化派)에 정신적 기반을 둔 신소설과는 달리 바른 것(正: 성리학)을 지키고(衛) 사악한 것(邪: 서양 문물)을 물리치자(斥)며 대외 통상을 반대하고 통상 수교를 거부하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에 정신적 기반을 둔역사·전기소설은개화 계몽 운동과 함께 새로운 시대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일대기식(一代記式) 구성, 장회체(章回體)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다. 역사·전기소설은 전(傳)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근대소설로 접근하려는 소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근대계몽기의 전(傳) 양식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장형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근대 계몽기 역사적 위인을 입전한 ‘전(傳)’은 대개 장형화된다. 전대의 전(傳)에서도 장형화 현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근대계몽기의 전(傳)처럼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본고의 고찰 대상인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만 하더라도 원고지 100매를 헤아리는 것을 보면, 역사적 위인을 입전한 다른 ‘전(傳)’인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수군제일위인(水軍第一偉人) 이순신(李舜臣)』,『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崔都統』 등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와 같은 장형화의 요인은 우선 ‘역사적 위인’의 행적을 풍부하게 보여주려는 의도와 동시에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의 영향“(김용덕, 『한국전기문학론』, 민족문화사, 1987, p.95.)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인 이외에도 근대 계몽기 전(傳) 자체의 변화, 곧 전(傳) 양식의 근대계몽기적 연변 현상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전(傳)은 원래부터 소설 ‘요소―허구’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장르)지속하는 양식이었다.
―김찬기, 『한국근대소설의 형성과 전(傳)』, 소명출판, 2004, pp.268∼269.
전(傳) 양식을 계승한 ”애국 계몽의 주체들은 적어도 계몽의 담론을 실천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전(傳)의 근대적 갱신을 요구하는 한편, 또 다른 지점에서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허구의 감화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애국 계몽을 견인해 내려 한 것이다(김찬기, 『한국근대소설의 형성과 전(傳)』, 소명출판, 2004, p.269 참조). 그러나 영웅 중심적 사고로 비영웅적(非英雄的)이고 민중적인 근대사관(近代史觀)과는 배치되었던 역사·전기소설은 이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2) 개화기의 소설
개화기의 소설은 이인직의 『혈의 누』(1906), 『귀(鬼)의 성(聲)』(1908년), 이해조의 『화(花)의 혈(血)』(1911년). 최찬식의 『추월색(秋月色)』」(1912년), 안국선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1908년) 등으로 대표된다.
혈(血)의 누(淚)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의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 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 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저렇게 어여쁜 젊은 여편네가 술 먹고 한길에 나와서 주정한다 할 터이나, 그 부인은 술 먹었다 하는 말은 고사하고 미쳤다, 지랄한다 하더라도 그따위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아니할 만하더라.
무슨 소회가 그리 대단한지 그 부인더러 물을 지경이면 대답할 여가도 없이 옥련이를 부르면서 돌아다니더라.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죽었느냐 살았느냐. 죽었거든 죽은 얼굴이라도 한번 다시 만나 보자. 옥련아 옥련아, 살았거든 어미 애를 그만 쓰이고 어서 바삐 내 눈에 보이게 하여라. 옥련아, 총에 맞아 죽었느냐, 창에 찔려 죽었느냐, 사람에게 밟혀 죽었느냐. 어리고 고운 살에 가시가 박힌 것을 보아도 어미 된 이내 마음에 내 살이 지겹게 아프던 내 마음이라. 오늘 아침에 집에서 떠나올 때에 옥련이가 내 앞에 서서 아장아장 걸어다니면서, 어머니 어서 갑시다 하던 옥련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서 옥련이를 찾으려고 골몰한 정신에, 옥련이보다 열 갑절 스무 갑절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잃고도 모르고 옥련이만 부르며 다니다가 목이 쉬고 기운이 탈진하여 산비탈 잔디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혼자말로 옥련 아버지는 옥련이 찾으려고 저 건너 산 밑으로 가더니 어디까지 갔누 하며 옥련이를 찾던 마음이 홀지에 변하여 옥련 아버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 오고, 인간 사정은 조금도 모르는 석양은 제 빛 다 가지고 저 갈 데로 가니 산빛은 점점 먹장을 갈아 붓는 듯이 검어지고 대동강 물소리는 그윽한데, 전쟁에 죽은 더운 송장 새 귀신들이 어두운 빛을 타서 낱낱이 일어나는 듯 내 앞에 모여드는 듯하니, 규중에서 생장한 부인의 마음이라, 무서운 마음에 간이 녹는 듯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앉았는데, 홀연히 언덕 밑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거늘, 그 부인이 가만히 들은즉 길 잃고 사람 잃고 애쓰는 소리라.
“에그, 깜깜하여라. 이리 가도 길이 없고 저리 가도 길이 없으니 어디로 가면 길을 찾을까. 나는 사나이라 다리 힘도 좋고 겁도 없는 사람이언마는 이러한 산비탈에서 이 밤을 새고 사람을 찾아 다니려 하면 이 고생이 이렇게 대단하거든, 겁도 많고 다녀 보지 못하던 여편네가 이 밤에 나를 찾아 다니느라고 오죽 고생이 될까.”
하는 소리를 듣고 부인의 마음에 난리중에 피란 가다가 부부가 서로 잃고 서로 종적을 모르니 살아 생이별을 한 듯하더니 하늘이 도와서 다시 만나 본다 하여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더라.
“여보, 나 여기 있소. 날 찾아 다니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셨소.”
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언덕 밑으로 향하여 내려가다가 비탈에 넘어져 구르니, 언덕 밑에서 올라오던 남자가 달려들어서 그 부인을 붙들어 일으키니, 그 부인이 정신을 차려 본즉 북두갈고리 같은 농군의 험한 손이 내 손에 닿으니 별안간에 선뜩한 마음에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겁결에 목소리가 나오지 못한다.
그 남자도 또한 난리 중에 제 계집 찾아 다니는 사람인데, 그 계집인즉 피란 갈 때에 팔승 무명을 강풀 한 됫박이나 먹였던지 장작같이 풀 센 치마를 입고 나간 터이요, 또 그 계집은 호미자루, 절굿공이, 다듬잇방망이, 그러한 셋궂은 일로 자라난 농군의 계집이라, 그 남자가 언덕에서 소리하고 내려오는 계집이 제 계집으로 알고 붙들었는데, 그 언덕에서 부르던 부인의 손은 명주같이 부드럽고 옷은 십이승 아랫질 세모시 치마가 이슬에 눅었는데, 그 농군은 제 평생에 그 옷 입은 그런 손길을 만져 보기는 고사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던 위인이러라.
부인은 자기 남편이 아닌 줄 깨닫고 사나이도 제 계집 아닌 줄 알았더라. 부인은 겁이 나서 간이 서늘하고 남자는 선녀를 만난 듯하여 흥김, 겁김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숨소리는 크고 목소리는 아니 나온다. 그 부인의 마음에, 아까는 호랑이도 무섭고 귀신도 무섭더니, 지금은 호랑이나 와서 나를 잡아먹든지 귀신이나 와서 저놈을 잡아가든지 그런 뜻밖의 일을 기다리나, 호랑이도 아니 오고 귀신도 아니 오고, 눈에 보이는 것은 말 못 하는 하늘의 별뿐이요, 이 산중에는 죄 없고 힘 없는 이 내 몸과 저 몹쓸 놈과 단 두 사람뿐이라.
사람이 겁이 나다가 오래 되면 악이 나는 법이다. 겁이 날 때는 숨도 크게 못 쉬다가 악이 나면 반벙어리 같은 사람도 말이 물 퍼붙는 듯 나오는 일도 있는지라.
(부인) “여보, 웬 사람이요. 여보, 대답 좀 하오. 여보, 남을 붙들고 떨기는 왜 그리 떠오. 여보, 벙어리요 도둑놈이요? 도둑놈이거든 내 몸의 옷이나 벗어줄 터이니 다 가져가오.”
그 남자가 못생긴 마음에 어기뚱한 생각이 나서 말 한마디가 엄두가 나던 위인이 붙 같은 욕심에 말문이 함부로 열렸더라.
(남자) “여보, 웬 여편네가 이 밤중에 여기 와서 있소.? 아마 시집살이 마다고 도망하는 여편네지. 도망군이라도 붙들어다가 데리고 살면 게집 없느니보다 날 터이니 데리고 갈 일이로구. 데리고 가기는 나중 일이어니와...... 내가 어젯밤 꿈에 이 산 중에서 장가를 들었더니 꿈도 신통히 맞친다.”
하면서 무지막지한 놈의 행위라 불측한 소리가 점점 심하니, 그 부인이 죽어서 이 욕을 아니 보리라 하는 마음 뿐이나, 어느 틈에 죽을 겨를도 없는지라.
사람이 생목숨을 버리는 것은 사람의 제일 설워하는 일인데, 죽으려 하여도 죽지도 못하는 그 부인 생각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터이라.
빌어보면 좋을까 생각하여 이리 빌고 저리 빌고 각색으로 빌어보나 그 놈의 귀에 비는 소리가 쓸데없고 하릴없을 지경이라. 언덕 위에서 웬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린지 소리가 쓸데없고 하릴없을 지경이라. 언덕 위에서 웬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나 부인은 그 소리를 듣고 죽었던 부모가 살아온 듯이 기쁜 마음에 마주 소리를 질렀더라.
―이인직, 『혈(血)의 누(淚)』, 을유문화사, 1973, pp.7∼11.
『혈(血)의 누(淚)』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김관일과 그의 부인 최씨, 딸 옥련 등 세 식구는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뿔뿔이 흩어진다. 최씨부인은 딸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남편마저 돌아오지 않자, 자살을 결심하고 대동강 물에 뛰어 든다. 천행으로 뱃사공에게 구출된 최씨는 평양의 집에 그대로 머물렀다. 한편 김관일은 부산에 사는 장인에게 처자를 찾아 줄 것을 부탁한 후, 전쟁의 폐허를 뒤로하고, 나라의 큰일을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려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즈음 부모를 잃고 헤매던 옥련은 피란길에 폭탄의 파편을 맞아 부상했으나 일본군 군의관 이노우에(井上정상) 소좌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이노우에의 양녀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다. 총명하고 예쁜 옥련은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며 신교육을 받지만, 이노우에 소좌가 전사하자 양어머니에게 냉대를 당하고,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옥련은 우연히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뜻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나는 구완서라는 청년을 알게 되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게 된다. 옥련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마치게 된다. 그녀의 기구한 과거의 이력과 우수한 학교 성적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났다. 이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아버지 김관일이 옥련을 찾아와 부녀가 상봉한다. 어머니가 아직 평양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옥련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운다. 구완서는 우리나라를 문명한 강대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옥련은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지식을 넓혀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사업 등에 대한 당찬 포부를 밝힌다.
「만세보(萬歲報)」에 1906년 7월 22일부터 1906년 10월 10일까지 50회가 연재되고 1907년 광학서포에서 간행된 『혈(血)의 누(淚)』(상편)는 우리나라 근대문학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된다. 이 소설의 후편은 1913년 2월부터 6월까지 『모란봉』이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보」에 65회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완성되지는 않았다. 옥련의 행적과 그녀의 은인 구완서와의 애정문제가 서사구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혈의 누』는 신교육과 자유 결혼을 주장하고 있지만, 면밀한 비판이 필요한 소설이다.
국제만공법 문제, 청인 군사들의 작폐, 일본 탄환의 무독성, 일본 중심의 동양연방 모색 등의 정치적 색채가 도처에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혈의 누』 전후편은 부와 자라는 가족 관계가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부·모·녀의 이별과 재상봉이 그 작품의 기본 골격을 이루며, 딸 옥련이의 안타고니스트로 나오는 구완서라는 청년에는 전혀 역점을 두지 않았다. 딸, 구완서가 외국 유학과 신교육의 포부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적 경륜과 별로 무관한 추상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 한국 개화의 피상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9, p.166.
옥련과 구완서의 입을 통해 주장한 신교육 문제가 추상적인 것이며, 이것은 그 당시 한국 개화의 피상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원식은 이인직과 『혈(血)의 누(淚)』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 신소설의 개척자인 이인직이 친일문학의 선구자이며, 제목부터 일본식인 『혈의 누』는 문체도 한자어에 토를 다는 방식인데 그 방식이 일본식의 후라가나인 것으로 한글전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최원식,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반민족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 pp.17∼18 참조)라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고대소설에서 벗어나 근대소설에 근접했던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혈의 누』는 작품의 시각에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청일전쟁(198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 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는데,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06년에, 조선인으로서 이미 1931`년의 사태를 예견하고 있는 구완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이 아닐 수 없다.
―최원식,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반민족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 3, 돌배게, 1993, p.18.
『혈의 누』는 일본이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주고 있으며, 남주인공 구완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이라는 것이다. 소설가이자 연극인인 이인직은 1896년 일본으로 망명해 도쿄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1900년 2월 관비 유학생으로 정식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하였다. 이완용의 비서로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되는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통역, 대한신문사 사장, 경학원 사성을 역임했고, 『혈의 누』, 『귀(鬼)의 성(聲)』, 『은세계』, 『모란봉』, 『치악산』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판소리 ‘최병두타령’을 개작한 전반부는 부패한 관리에 항거하여 지배층의 학정을 폭로하는 저항 정신을 그리고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일제의 고종 강제 폐위를 옹호하는 등 작가의 친일적 경향이 드러나 있는 『은세계』는 창극으로 공연되었다.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를 홍보 지지하는 『경학원잡지』의 편찬 겸 발행인이었던 이인직은 1916년 11월 3일 경학원 간부와 강사 19명과 함께 조선인들이 천황의 신민(臣民)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조선 총독부에 바쳤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 정치과에서 수학하고 1899년 귀국한 후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배되기도 했던 안국선은 작가 활동 초기에는 반외세· 자주독립· 민족주의적 의식을 보였다. 그러나 안국선은 1908년 탁지부가 관리가 되어 친일파로 전향하여 후기에는 친일 성향의 작품을 발표해 일본제국주의에 순응하는 의식을 보여주었다. 안국선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은 1908년 황성서적업조합(皇城書籍業組合)에서 출간되었으나, 1909년 언론출판규제법에 의하여 출판이나 판매를 법으로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 소설집이다.
금수회의록
(....전략(前略)...)
제3석, 정와어해(井蛙語海 : 개구리)
여우가 연설을 그치고 할금할금 돌아보며 제자리로 내려가니, 또 한편에서 회장을 부르고 아장아장 걸어와서 연단 위에 깡충 뛰어올라간다. 눈은 톡 불거지고 배는 똥똥하고 키는 작달막한데 눈을 깜작깜작하며 입을 벌죽벌죽하고 연설한다.
"나의 성명은 말씀 아니하여도 여러분이 다 아시리다. 나는 출입이라고는 미나리논밖에 못 가본 고로 세계 형편도 모르고, 또 맹꽁이를 이웃하여 산 고로 구학문의 맹자왈 공자왈은 대강 들었으나 신학문은 아는 것이 변변치 아니하나, 지금 정와의 어해라 하는 문제로 대강 인류사회를 논란코자 하옵네다.
사람들은 거만한 마음이 많아서 저희들이 천하에 제일이라고, 만물 중에 저희가 가장 귀하다고 자칭하지마는, 제 나랏일도 잘 모르면서 양비대담(攘臂大談)하고 큰소리 탕탕 하고 주제넘은 말 하는 것들 우습디다. 우리 개구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 이야기 할 수 없다 하니, 항상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좁은 줄만 알고 바다에는 가보지 못하여 바다가 큰지 작은지, 넓은지 좁은지, 긴지 짧은지, 깊은지 얕은지 알지 못하나 못 본 것을 아는 체는 아니하거늘, 사람들은 좁은 소견을 가지고 외국 형편도 모르고 천하 대세도 살피지 못하고 공연히 떠들며, 무엇을 아는 체하고 나라는 다 망하여 가건마는 썩은 생각으로 갑갑한 말만 하는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제 나라 안에 있어서 제 나랏일도 다 알지 못하면서 보도 듣도 못한 다른 나라 일을 다 아노라고 추척대니 가증하고 우습도다. 연전에 어느 나라 어떤 대관이 외국 대관을 만나서 수작할새 외국 대관이 묻기를,
'대감이 지금 내부대신으로 있으니 전국의 인구와 호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한데 그 대관이 묵묵히 무언하는지라, 또 묻기를,
'대감이 전에 탁지대신(度支大臣)을 지내었으니 전국의 결총(結總)과 국고의 세출?세입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한데 그 대관이 또 아무 말도 못하는지라, 그 외국 대관이 말하기를,
'대감이 이 나라에 나서 이 정부의 대신으로 이같이 모르니 귀국을 위하여 가석하도다.'
하였고, 작년에 어느 나라 내부에서 각 읍에 훈령하고 부동산을 조사하여 보아라 하였더니, 어떤 군수는 보하기를, '이 고을에는 부동산이 없다' 하여 일세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같이 제 나라 일도 크나 작으나 도무지 아는 것 없는 것들이 일본이 어떠하니, 아라사가 어떠하니, 구라파가 어떠하니, 아메리카가 어떠하니 제가 가장 아는 듯이 지껄이니 기가 막히오. 대저 천지의 이치는 무궁무진하여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느님밖에 아는 이가 없는지라, 『논어(論語)』에 말하기를 하느님께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말하기를, 하느님은 곧 이치라 하였으니 하느님이 곧 이치요, 하느님이 곧 만물 이치의 주인이라. 그런고로 하느님은 곧 조화주요, 천지만물의 대 주제시니 천지만물의 이치를 다 아시려니와, 사람은 다만 천지간의 한 물건인데 어찌 이치를 알 수 있으리요. 여간 좀 연구하여 아는 것이 있거든 그 아는 대로 세상에 유익하고 사회에 효험 있게 아름다운 사업을 영위할 것이어늘, 조그만치 남보다 먼저 알았다고 그 지식을 이용하여 남의 나라 빼앗기와 남의 백성 학대하기와 군함?대포를 만들어서 악한 일에 종사하니, 그런 나라 사람들은 당초에 사람 되는 영혼을 주지 아니하였더면 도리어 좋을 뻔하였소. 또 더욱 도리에 어기어지는 일이 있으니, 나의 지식이 저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하면 남을 가르쳐 준다 하고 실상은 해롭게 하며, 남을 인도하여 준다 하고 제 욕심 채우는 일만 하여, 어떤 사람은 제 나라 형편도 모르면서 타국 형편을 아노라고 외국 사람을 부동하여,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해치며 백성을 위협하여 재물을 도둑질하고 벼슬을 도둑하며 개화하였다 자칭하고, 양복 입고, 단장 짚고, 궐련 물고, 시계 차고, 살죽경 쓰고, 인력거나 자행거 타고, 제가 외국 사람인 체하여 제 나라 동포를 압제하며, 혹은 외국 사람 상종함을 영광으로 알고 아첨하며, 제 나라 일을 변변히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여간 월급냥이나 벼슬낱이나 얻어 하느라고 남의 나라 정탐꾼이 되어 애매한 사람 모함하기, 어리석은 사람 위협하기로 능사를 삼으니, 이런 사람들은 안다 하는 것이 도리어 큰 병통이 아니오?
우리 개구리의 족속은 우물에 있으면 우물에 있는 분수를 지키고, 미나리논에 있으면 미나리논에 있는 분수를 지키고, 바다에 있으면 바다에 있는 분수를 지키나니, 그러면 우리는 사람보다 상등이 아니오니까. (손뼉 소리 짤각짤각)
또 무슨 동물이든지 자식이 아비 닮는 것은 하느님의 정하신 뜻이라. 우리 개구리는 대대로 자식이 아비 닮고 손자가 할아비를 닮되, 형용도 똑같고 성품도 똑같아서 추호도 틀리지 않거늘, 사람의 자식은 제 아비 닮는 것이 별로 없소. 요 임금의 아들이 요 임금을 닮지 아니하고, 순 임금의 아들이 순 임금과 같지 아니하고, 하우 씨와 은왕 성탕(成湯)은 성인이로되, 그 자손 중에 포학하기로 유명한 걸(桀)?주(紂) 같은 이가 났고, 왕건(王建) 태조는 영웅이로되 왕우(王偶)?왕창(王昌)이 생겼으니, 일로 보면 개구리 자손은 개구리를 닮되 사람의 새끼는 사람을 닮지 아니하도다. 그러한즉 천지 자연의 이치를 지키는 자는 우리가 사람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요, 만일 아비를 닮지 아니한 자식을 마귀의 자식이라 할진대 사람의 자식은 다 마귀의 자식이라 하겠소.
또 우리는 관가 땅에 있으면 관가를 위하여 울고, 사사(私私) 땅에 있으면 사사를 위하여 울거늘, 사람은 한 번만 벼슬자리에 오르면 붕당(朋黨)을 세워서 권리 다툼하기와, 권문세가에 아첨하러 다니기와, 백성을 잡아다가 주리 틀고 돈 빼앗기와 무슨 일을 당하면 청촉 듣고 뇌물 받기와 나랏돈 도적질하기와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기로 종사하니, 날더러 도적놈 잡으라 하면 벼슬하는 관인들은 거반 다 감옥서 감이요, 또 우리들의 우는 것이 울 때에 울고, 길 때에 기고, 잠잘 때에 자는 것이 천지 이치에 합당하거늘, 불란서라 하는 나라 양반들이 우리 개구리의 우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백성들을 불러 개구리를 다 잡으라 하다가, 마침내 혁명당이 일어나서 난리가 되었으니, 사람같이 무도한 것이 세상에 또 있으리요? 당나라 때에 한 사람이 우리를 두고 글을 짓되, 개구리가 도의 맛을 아는 것 같아여 연꽃 깊은 곳에서 운다 하였으니, 우리의 도덕심 있는 것은 사람도 아는 것이라. 우리가 어찌 사람에게 굴복하리요. 동양 성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는 것은 안다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라 하였으니, 저희들이 천박한 지식으로 남을 속이기를 능사로 알고 천하 만사를 모두 아는 체하니, 우리는 이같이 거짓말은 하지 아니하오. 사람이란 것은 하느님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악한 일만 많이 하니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차후는 사람이라 하는 명칭을 주지 마는 것이 대단히 옳을 줄로 생각하오."
넙죽넙죽 하는 말이 소진?장의가 오더라도 당치 못할러라. 말을 그치고 내려오니 또 한편에서 회장을 부르고 나는 듯이 연설단에 올라간다. (...하략...)
―안국선,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애국정신 외』, 을유문화사, 1973, pp.21∼25.
금수(禽獸: 날짐승과 길짐승. 곧, 모든 짐승)들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한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은 「서언(序言)」에서 1인칭 관찰자인 ‘나’가 꿈속에 금수 회의소에 들어가 그들의 회의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몽유록(夢遊錄)의 계통을 잇는 토론체 우화소설이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은 금수들의 연설 내용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록한 부분인 안이야기, ‘서언’과 ‘폐회’ 부분으로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기록한 바깥 이야기로 구성된 액자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짐승들이 모여서 잔치나 회의를 한다는 장면 설정은 우화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비리를 나무라는 것도 오랜 관례였다. 이 작품은 그런 수법을 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짐승들이 회의를 하게 된 연유에 대한 해명이 없고, 회의의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도 말하지 않았다. 짐승들이 사람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도록 의인화되어 있지 않고 그 자체인 채로 사람이 짐승만 못하다는 논설을 펴면서 작자의 주장을 대변하도록 했다. 우화소설과 상통하는 허구적인 설정을 빌려오기는 했어도 서사문학다운 전개는 찾을 수 없고 논설이라야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내용을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나타내 언론의 규제를 피하고 흥미를 가중시키고자 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4, 지식산업사, 2002, pp.332∼333.
동물들의 연설 내용은 사회나 가정의 풍속적 타락에 대한 비판, 일본 침략의 위기에 대한 국권 수호와 자주 의식의 고취, 정치적 자립 등 작가의 계몽주의적 의식이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개혁 방안이 구체적이지 않고 반성과 회개라는 추상적인 방안만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불효·사대조성·부정부패·탐관오리·풍속문란 등 외에도, ‘외국 사람에게 아첨하는 역적놈’이나 ‘무기로써 남의 나라를 위협하여 빼앗는 불한당’과 같이 외국을 규탄함으로써 당시 일본 침략의 위기에 대한 민족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915년 안국선은 「기생」·「인력거꾼」·「시골노인 이야기」 등이 실린 『공진회(共進會)』를 펴냈다. 「기생」·「인력거꾼」·「시골노인 이야기」는 3편 모두 일제의 통치 체제의 미덕(美德)을 그리고 있다. 그밖에「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론체 단편소설로 장님과 앉은뱅이의 대화를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하여 백성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를 암시한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인력거꾼을 등장시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한「거부오해(車夫誤解)」 등은 소설적 형상화의 부족으로 독자적 문학 갈래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1903년 양기탁·주시경·노익형 등과 광무사를 조직해 국채보상의연금 모금운동을 벌였던 이해조는 토론체 평론소설인 『자유종』의 작가이다.
자유종
천지간 만물 중에 동물되기 희한하고, 천만 가지 동물 중에 사람 되기 극난하다. 그같이 희한하고 그같이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이 되어 압제를 받아 자유를 잃게 되면 하늘이 주신 사람의 직분을 지키지 못함이어늘, 하물며 사람 사이에 여자되어 남자의 압제를 받아 자유를 빼앗기면 어찌 희한코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의 권리를 스스로 버림이 아니라 하리요.
여보, 여러분, 나는 옛날 태평 시대에 숙부인(淑夫人: 조선 시대 정3품 당상 문무관의 아내의 봉작)까지 바쳤더니 지금은 가련한 민족 중의 한 몸이 된 신설헌이올시다. 오늘 이매경 씨 생신에 청첩을 인하여 왔더니 마침 홍국란 씨와 강금운 씨와 그 외 여러 귀중하신 부인들이 만좌하셨으니 두어 말씀 하오리다.
이전 같으면 오늘 이러한 잔치에 취하고 배부르면 무슨 걱정 있으리까마는, 지금 시대가 어떠한 시대며 우리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요? 내 말이 연설 체격과 흡사하나 우리 규중 여자도 결코 모를 일이 아니올시다.
일본도 삼십 년 전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우심하여 혹 천하대세라 혹 자국 전도라 말하는 자는, 미친 자라 괴악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인류로 치지 않더니, 점점 연설이 크게 열리매 전도하는 교인같이 거리거리 떠드나니 국가 형편이요, 부르나니 민족 사세라, 이삼 인 못거지라도 술잔을 대하기 전에 소회를 말하고 마시니, 전국 남녀들이 십여 년을 한담도 끊고 잡담도 끊고 언필칭 국가라 민족이라 하더니, 지금 동양에 제일 제이되는 일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어떠한 비참지경이요? 세월은 물같이 흘러가고 풍조는 날로 닥치는데, 우리 비록 아홉 폭 치마는 둘렀으나 오늘만도 더 못한 지경을 또 당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눈결에 될지라. 하늘을 부르면 대답이 있나, 부모를 부르면 능력이 있나, 가장을 부르면 무슨 방책이 있나, 고대 광실 뉘가 들며 금의옥식 내 것인가? 이 지경이 이마에 당도했소. 우리 삼사 인이 모였든지 오륙 인이 모였든지 어찌 심상한 말로 좋은 음식을 먹으리까? 승평무사할 때에도 유의유식(遊衣遊食)은 금법(禁法)이어든 이 시대에 두 눈과 두 귀가 남과 같이 총명한 사람이 어찌 국가 의식만 축내리까? 우리 재미있게 학리상으로 토론하여 이날을 보냅시다.
(매경) "절당(切當) 절당하오이다. 오늘이 참 어떠한 시대요? 이 같은 수참하고 통곡할 시대에 나 같은 요마한 여자의 생일잔치가 왜 있겠소마는 변변치 못한 술잔으로 여러분을 청하기는 심히 부끄럽고 죄송하나 본의인즉 첫째는 여러분 만나 뵈옵기를 위하고, 둘째는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함이올시다.
남자들은 자주 상종하여 지식을 교환하지마는 우리 여자는 한번 만나기 졸연하오니이까? 『예기(禮記)』에 가로되, 여자는 안에 있어 밖의 일을 말하지 말라 하였고, 『시전(詩傳)』에 가로되 오직 술과 밥을 마땅히 할 뿐이라 하였기로 층암절벽 같은 네 기둥 안에서 나고 자라고 늙었으니, 비록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의 성과 자(字)를 함께 이르는 말]의 재주 있을지라도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아는 것이 있지요.
이러므로 신체 연약하고 지각이 몽매하여 쌀이 무슨 나무에 열리는지, 도미를 어느 산에서 잡는지 모르고, 다만 가장의 비위만 맞춰,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니, 진소위(眞所謂) 밥 먹는 안석이요, 옷 입은 퇴침이라, 어찌 인류라 칭하리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현철한 부인이라, 행검(行檢: 품행이 방정함) 있는 부인이라 하겠지마는, 성품이 괴악하고 행실이 불미하여 시앗에 투기하기, 친척에 이간하기, 무당 불러 굿하기, 절에 가서 불공하기, 제반 악징은 소위 대갓집 부인이 더합디다. 가도가 무너지고 수욕이 자심하니 이것이 제 한 집안 일인 듯하나 그 영향이 실로 전국에 미치니 어찌 한심치 않으리까?
그런 부인이 생산도 잘 못하고 혹 생산하더라도 어찌 쓸 자식을 낳으리요? 태내 교육부터 가정교육까지 없으니 제가 생지(生知)의 바탕이 아닌 바에 맹모(孟母)의 삼천(三遷)하시던 교육이 없이 무슨 사람이 되리요? 그러나 재상도 그 자제이요 관찰·군수도 그 자제니 국가의 정치가 무엇인지, 법률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소? 우리 비록 여자나 무식을 면치 못함을 항상 한탄하더니, 다행히 오늘 여러분 고명하신 부인께서 왕림하여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니 대단히 기꺼운 일이올시다."
(설헌) "변변치 못한 구변이나 내 먼저 말씀하오리다. 우리 대한의 정계가 부패함도 학문 없는 연고요, 민족의 부패함도 학문 없는 연고요, 우리 여자도 학문 없는 연고로 기천 년 금수 대우를 받았으니 우리나라에도 제일 급한 것이 학문이요, 우리 여자사회도 제일 급한 것이 학문인즉 학문 말씀을 먼저 하겠소. 우리 이천만 민족 중에 일천만 남자들은 응당 고명한 학교를 졸업하여 정치․법률․군제․농․상․공 등 만 가지 사업이 족하겠지마는, 우리 일천만 여자들은 학문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고 유의유식으로 남자만 의뢰하여 먹고 입으려 하니 국세가 어찌 빈약지 아니하겠소?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어야 가볍다 하였으니 우리 일천만 여자도 일천만 남자의 사업을 백지장과 같이 거들었으면 백 년에 할 일을 오십 년에 할 것이요, 십 년에 할 일을 다섯 해면 할 것이니 그 이익이 어떠하고, 나라의 독립도 거기 있고 인민의 자유도 거기 있소.
세계 문명국 사람들은 남녀의 학문과 기예가 차등이 없고, 여자가 남자보다 해산하는 재주 한 가지가 더하다 하며, 혹 전쟁이 있어 남자가 다 죽어도 겨우 반구비(半具備)라 하니, 그 여자의 창법 검술까지 통투(通透: 사리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함)함을 가히 알겠도다.
사람마다 대성인 공부자(孔夫子) 아니거든 어찌 생이지지(生而之知)하리요. 법국〔佛蘭西: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토론회를 열매, 가편은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면 금수와 같다 하고, 부편은 사람이 천생 한 성질이니 비록 가르치지 아니할지라도 어찌 금수와 같으리요 하여 경쟁이 대단하되 귀결치 못하였더니, 학도들이 실지를 시험코자 하여 무부모(無父母)한 아이들을 사다가 심산 궁곡(深山 窮谷)에 집 둘을 짓되 네 벽을 다 막고 문 하나만 뚫어 음식과 대소변을 통하게 하고 그 아이를 각각 그 속에서 기를 새, 칠팔 년이 된 후 그 아이를 학교로 데려오니 제가 평생에 사람 많은 것을 보지 못하다가 육칠 층 양옥에 인산인해(人山人海)됨을 보고 크게 놀라 서로 돌아보며 하나는 꼭고댁꼭고댁 하고 하나는 끼익끼익 하니, 이는 다름아니라 제 집에 아무것도 없고, 다만 닭과 돼지만 있는데, 닭이 놀라면 꼭고댁 하고 돼지가 놀라면 끼익끼익 하는 고로 그 아이가 지금 놀라운 일을 보고, 그 소리가 각각 본 대로 난 것이니 그것도 닭과 돼지의 교육을 받음이라. 학생들이 이것을 본 후에 사람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금수와 다름없음을 깨달아 가편이 득승하였다 하니, 이로 보건대 우리 여자가 그와 다름이 무엇이오? 일용 범절에 여간 안다는 것이 저 아이의 꼭고댁․끼익보다 얼마나 낫소이까? 우리 여자가 기천 년을 암매하고 비참한 경우에 빠져 있었으니 이렇고야 자유권이니 자강력이니 세상에 있는 줄이나 알겠소? 일생에 생사고락이 다 남자 압제 아래 있어, 말하는 제용(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곧 제웅)과 숨쉬는 송장을 면치 못하니 옛 성인의 법제가 어찌 이러하겠소. 『예기(禮記)』에도, 여인 스승이 있고 유모를 택한다 하였고 『소학(小學)』에도 여자교육이 첫 편이니 어찌 우리나라 여자 같은 자고송(自枯松: 선 채로 말라죽은 소나무)이 있단 말이오?
우리나라 남자들이 아무리 정치가 밝다 하나 여자에게는 대단히 적악(積惡)하였고, 법률이 밝다 하나 여자에게는 대단히 득죄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왕이라 말할 것 없거니와 후생(後生: 자기보다 후대에 태어난 사람)이나 불가불 교육을 잘 하여야 할 터인데 권리 있는 남자들은 꿈도 깨지 못하니 답답하오. 남자들 마음에는 아들만 귀하고 딸은 귀치 아니한지 일 분자라도 귀한 생각이 있으면 사지오관(四肢五官:두 팔, 두 다리, 눈, 코, 귀, 혀, 피부)이 구비한 자식을 어찌 차마 금수와 같이 길러 이 같은 고해(苦海)에 빠지게 하는고? 그 아들 가르치는 법도 별수는 없습니다. 『사략통감(史略通鑑)』으로 제일등 교과서를 삼으니 자국정신은 간 데 없고 중국혼만 길러서 언필칭 『좌전(左傳)』이라 『강목(綱目)』이라 하여 남의 나라 기천 년 흥망성쇠(興亡盛衰)만 의논하고 내 나라 빈부강약(貧富强弱)은 꿈도 아니 꾸다가 오늘 이 지경을 하였소.
이태리국 역비다산에 올차학이라는 구멍이 있어 해수(海水)로 통하였더니 홀연 산이 무너져 구멍 어구가 막힌지라, 그 속이 칠야같이 캄캄한데 본래 있던 고기들이 나오지 못하고 수백 년을 생장하여 눈이 있으나 쓸 곳이 없더니, 어구의 막혔던 흙이 해마다 바닷물에 패어 가며 일조에 궁기 도로 열리매, 밖의 고기가 들어와 수없이 잡아먹되, 그 안에 있던 고기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저해하려는 것을 전연 모르고 절로 밀려 어구 밖을 혹 나왔으나 못 보던 눈이 졸지에 태양을 당하매 현기가 나며 정신이 없어 어릿어릿하더라 하니, 그와 같이 대문․중문 꽉꽉 닫고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살던 우리나라 이왕 교육은 올차학 교육이라 할 만하니 그 교육받은 남자들이 무슨 정신으로 우리 정치를 생각하겠소? 우리 여자의 말이 쓸데없을 듯하나 자국의 정신으로 하는 말이니, 오히려 만국 공사의 헛담판보다 낫습늰다. 여러분 부인들은 대한 여자 교육계의 별방침을 연구하시오."(---하략---)
―이해조, 『자유종(自由鐘)』, 을유문화사, 1973, pp.7∼12.
1910년 광학서포에서 간행된 『자유종(自由鐘)』은 표지에 ‘열제(悅齊) 이해조(李海朝) 저(著) 신소설(新小說) 『자유종(自由鐘)』’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본문 첫 장에 ‘토론소설 『ᄌᆞ유죵(自由鐘)』’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자유종(自由鐘)』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08년 음력 1월 16일, 이매경 부인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고 모인 당시 지식 여성들인 신설헌·이매경·홍국란·강금운 등 네 명의 부인들이 나라가 비참한 지경에 이른 것을 개탄하고 개화, 계몽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한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신설헌은 구시대의 유습인 여성의 인종과 예속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먼저 내세운다. 토론의 내용은 여권 문제, 서얼 차별, 반상의 차별, 미신 및 지방색의 타파, 교육을 통한 개화 계몽, 국가 사회의 부강, 자주책, 한국 실정에 맞는 교과 확립 등으로 이어진다. 한문 폐지 등 교육을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유종』의 주제를 살펴보면 정치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설헌·이매경·홍국란·강금운 등 네 명의 지식 여성이 초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는 하룻밤 사이에 직설적으로 나눈 대화를 기록한 토론체 평론소설이다. 여성의 자유권, 신교육, 봉건적 신분제도 철폐 등 국권회복과 여성해방운동 등 관념적인 토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유종』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어 개화기의 사회상을 반영한 토론소설에 머무르고 말았다.
작가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및 동 인문정보대학원 강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