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 극장에 불이 난다면… 서울 4곳 살펴보니]
방화 셔터 내려오는 자리 한가운데 버젓이 가게·테이블
비상구 곳곳 장애물… 극장 탈출해도 건물에 갇히는 구조
비상계단은 창고, 비상구 앞엔 매대(賣臺)… "단속" 7일전 알려주는 이상한 소방法
자정 넘어 극장 관객들 많은데 건물 관리자는 비상문 '철컥'
재난 대비 법규 있으나마나
쇼핑몰 11층에 있는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하고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정작 1층에서 밖으로 나가는 비상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때마침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었다. 건물 관리자였다. 그는 "왜 여기로 왔느냐. 자정 넘으면 이 문은 잠근다"며 디지털 자물쇠로 다시 비상문을 잠갔다. 지난달 29일 밤 12시 30분 대형 멀티플렉스가 있는 서울 봉천동 16층짜리 대형 상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676석 규모의 이 극장에서는 오전 1시 30분에 끝나는 영화가 한창 상영 중이었다. 만약 자정 넘어 이 건물에 화재가 난다면 영화 관람객들은 11층을 걸어 내려온 뒤 1층 비상문을 열지 못해 갇힐 수밖에 없다. 극장은 빠져나왔지만 건물을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심야에도 수백 명씩 북적이는 영화관이 있는 대형 쇼핑몰 안전 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할 때마다 비상 탈출 경로를 안내하지만, 정작 극장이 입주한 건물의 비상 시설 관리가 엉망이었다.
지난달 29~30일 서울 시내 대형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멀티플렉스 네 곳을 무작위로 골라 비상 시설 관리 상태를 살펴봤다.
◇방화 셔터 자리에 가게 입점
스크린 10개, 총 1840석을 보유한 대형 극장이 입주해 있는 서울 왕십리역사 복합 쇼핑센터 4층. 대형 푸드코트가 있고 바로 위층이 극장이다. 방화 셔터가 4층 면적의 절반을 나누며 내려오게끔 설계돼 있었다. 그러나 유사시 방화 셔터가 바닥까지 내려와야 할 한가운데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버젓이 자리 잡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 6개가 놓여 있었다. 바로 옆 기둥에 '방화 셔터 내려오는 곳'이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흰색 페인트로 셔터 내려오는 자리도 표시돼 있었으나 방화 셔터는 아이스크림 가게 천장에 막혀 1m도 내려올 수 없는 상태였다.
- 대형 극장이 입주해 있는 서울 왕십리역사 복합 쇼핑센터 4층. 유사시 방화 셔터가 내려올 자리(붉은 점선 표시)에 아이스크림 가게와 테이블이 있다. 작은 사진은 옆 기둥에 붙은 방화 셔터 안내문. /이태경 기자
이 건물은 1층 비상 엘리베이터 앞을 온갖 의류 매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유사시 5층 극장에서 바로 타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엔 '비상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으나 매대 때문에 그 글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화재가 났다고 가정하고 5층 영화관에서 비상구를 통해 1층까지 뛰어 내려가 보았다. 1층까지 내려오는 데 50초가량 걸렸지만 1층 비상문 앞을 쇼핑 카트와 상자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놓인 카트를 밀치고 나오는 데 5층 계단 내려올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명동 입구 지하 2층, 지상 8층 규모의 N쇼핑몰 8층에도 788석 규모의 멀티플렉스가 입점해 있다. 이 건물 비상계단 1층은 사실상 창고였다. 대형 플라스틱 쓰레기통과 우산용 비닐 거치대, 각종 입간판과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비집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공간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오는 비상계단은 아예 짐으로 막혀 있어 출입이 불가능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비상계단
매일 밤 영화 관람객 수백 명이 북적이는 극장 사정은 다들 비슷했다. 그나마 건물 전체를 극장 기업이 소유한 경우는 조금 나았다. 대형 쇼핑몰에 세를 내고 입주한 경우 극장의 안전 관리 규칙이 건물 전체에 미치지 않아 관리가 더 부실했다.
서울 명동역 앞 멀티플렉스가 입점한 11층짜리 쇼핑몰은 비상계단 전체의 전등이 꺼져 있어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가며 각 층 비상문을 열어보았다. 8층 비상문을 여니 바로 앞에 900L짜리 대형 냉장고가 통로를 막고 있었다. 비상문의 건물 안쪽에는 '출입금지. CCTV 촬영 중'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항상 닫혀 있되 잠가서는 안 되는 비상문을 아예 냉장고로 막아놓은 것이다. 이 쇼핑몰 5·6층 비상계단에도 폐(廢)장판과 상자가 어지럽게 쌓여 있어 통행하는 데 매우 불편했다.
- 장애물 널린 비상계단… 서울 중구 한 쇼핑몰 건물의 비상계단에 각종 입간판과 우산용 비닐 거치대, 쓰레기통이 놓여 있다. 비상시에 여러 사람이 대피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잡동사니들이 비상계단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태경 기자
방화문 역할을 하는 비상문 관리도 엉망이었다. 11층에 극장이 있는 봉천동 쇼핑몰은 11개 층 비상문 가운데 3개 층 비상문을 모두 장판이나 골판지 등으로 괴어 열어놓은 상태였다. 비상문마다 '방화문은 항상 닫혀 있어야 하며 고임목이나 줄로 묶어 개방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고문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이모(21)씨는 "올 때마다 좁은 통로와 엘리베이터 근처에 쌓아놓은 물건이 너무 많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비상계단과 비상문을 허술하게 관리하는 행위는 모두 처벌 대상이다. 소방 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피난 시설과 방화 구획, 방화 시설을 폐쇄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그 주위에 물건이나 장애물을 쌓아두는 행위, 그 시설 용도에 장애를 주는 행위는 모두 200만원 이하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시정 명령을 지키지 않을 경우엔 3년 이하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지키질 않아 있으나 마나 한 법 규정이었다.
◇단속 예고하는 소방법의 맹점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비상계단을 창고나 휴게 공간으로 쓰는 것은 되풀이해 적발되는 사안이다. 이런 잘못이 반복되는 것은 현행 소방 관련법의 맹점에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제진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겸임교수는 "2013년 새 소방 관련법이 시행되면서 '시설 점검 시 7일 전에 관계인에게 조사 대상과 조사 기간, 조사 사유를 서면으로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며 "7일 전에 단속을 예고하면 미리 치워놓을 것이고, 이는 건물주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용인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방에 관한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규범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귀찮은 법률'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며 "최악 상황에서 속수무책인 대형 건물이 서울에 즐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