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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발포만호
36세 청년 장교 이순신, 광활한 南海를 품었으며, 임진년에 그 바다를 호령하다
발포만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2년 전인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36세때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18개월간 재임하며 800수군을 호령하였다. 발포는 지금은 작은 어촌이 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수군기지였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관할지역을 흔히 5관(官) 5포(浦)라고 하는데 관(管)은 일반행정단위의 고을이었고 포(浦)는 바다의 수군기지였다. 5관은 순천, 낙안, 보성, 광양, 흥양이며 5포(浦)는 방답, 사도, 발포, 녹도,여도이다. 수군기지라 해서 단순히 수군의 주둔지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고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형식이었다. 이 5관 중의 하나가 흥양현(현 고흥읍)이었고 5포 중의 4개, 즉 현재 여수 돌산도에 있던 방답진을 제외한 4포(사도, 여도, 발포, 녹도)가 모두 고흥군에 있었다. 실제 흥양현은 현감이 다스렸고 4포의 수령은 사도가 첨사(사도첨사)였고 3포는 모두 만호(여도만호, 발포만호, 녹도만호)였다.
조선시대의 행정제도를 살펴보면 당시의 첨사는 만호보다 높은 품계였고 실제 현감보다 더 높았다. 발포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세종 21년 1439년이다. 세종실록에는 “병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소흘포(所訖浦)는 방수(防戍)하기에 마땅하지 않아서 이미 발포에 병선을 이박(移泊)하였사온 즉, 청하건대, ‘포만호(浦萬戶)’라는 칭호로써 인신(印信)을 개주(改鑄)하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되었다. 몇차례나오는 소흘포라는 곳은 고흥군 어디인 것 같은데 현재 내 정보로는 알 길이 없지만 소흘포가 방어에 적당하지 않으니 발포에 만호진을 설치하자는 것이다.
이후 발포는 조선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세종 24년 144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치보(馳報)하기를, “금년 8월 15일에 왜인(倭人) 9인이 나로도(羅老島)에 도착한 것을 발포 천호(千戶) 김정부(金井缶)가 쫓아가 체포하였습니다. 또 19일에는 왜인 38인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개도(蓋島)로부터 나와서 이로도(伊老島)에 향하는 것을 여도 천호(呂島千戶) 최완(崔浣)이 뒤쫓아 가서 사로잡았습니다.”고 하였다. 이때는 만호보다는 관할 지역의 가구수를 기준으로 천호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모두 만호로 통일되었다. 성종 때에는 발포가 더 자주 등장한다. 성종실록에는 발포에 대한 언급이 모두 16번인데 발포성의 축조, 왜구의 격퇴, 논공행상 등까지 다양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와 관련된 사항이 많은데 이 시기 왜구는 고흥지역에 자주 출몰했다. 그래서 흥양현. 사도진, 발포진, 여도진, 녹도진 만호들은 자주 협력하여 왜구를 격퇴하거나 생포했고 정부는 대마 도주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 경고하기도 했다.
발포가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부터이다. 사실 발포는 이충무공이 젊었을 때 만호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1580년 36세에 발포만호로 부임해 1년 6개월동안 800수군을 호령하였으며 충무공의 발포만호 재임을 기념하여 노산 이은상이 지은 충무공이 머무신 곳이라는 비석이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1591년 좌수사에 취임한 충무공은 임진년 1592년 음력 2월에 소위 5포를 순시한다. 2월 19일 백야 곶과 이목구비를 지나 여도진에 이르렀다. 흥양현감과 여도권관이 마중 나왔다. 20일에는 흥양현으로 갔고 21일에도 흥양에서 머물렀다. 22일에는 육로로 녹동으로 갔고 23일에는 녹동에서 배를 타고 발포로 향한다.
난중일기에는 “ 흐렸다. 배로 떠나 거의 다 발포에 이르게 되어 역풍이 사납게 몰아치니 배가 나가지를 않아 간신히 성머리에다 대어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가는데 비가 몹시 쏟아져 동행하는 사람들의 위아랫도리가 모두 단비에 흠뻑 젖었다. 발포에 들어가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고 되어 있다.
왜군은 4월 13일 쳐들어 왔는데 아직 전라도는 전쟁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4월 18일 난중일기에는 “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고 했다. 4월 29일 충무공은 휘하 5관 5포의 군사를 좌수영을 집결시킨다. 5관 5포의 군사들은 이 때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고 이후 임진년의 수많은 전쟁에 나아가 남해바다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게 된다. 이 첫소집시에 발포권관(權管)은 여전히 나대용이 맡았고 여도권관은 김인영이 맡았다. 그리고 발포군은 전라좌수영 군의 일원으로서 여러 차례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시 발포만호가 등장하는 것은 한산대첩이며 이 때 충무공은 발포만호 황정록이 적선을 깨뜨렸다고 쓰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조정에서 정식으로 발포만호를 임명했던 것이다.
참고
고흥발포만호성(高興鉢浦萬戶城)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7호 명 칭 고흥발포만호성(高興鉢浦萬戶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77.10.20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968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고흥군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고흥군 문화관광과 061-833-9408 발포만호성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중심으로 있는 성으로, 만호(萬戶)란 조선시대 때 각 도의 여러 진(鎭)에 파견된 종 4품의 무관직을 말한다. 적의 침입을 막고자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성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발포만호는 조선 성종 21년(1490)에 쌓은 것으로, 둘레 1350척, 높이 13척이라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560m, 높이는 4m이고, 서벽이 동벽보다 깊다. 동서남북 4벽이 거의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등의 관아 건물터가 남아있고, 배수로와 무기고의 터도 남아있다. 또 동문, 서문, 남문, 망루터도 확인된다. 발포만호는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18개월간 재임하였던 곳으로, 여천선소 유적과 함께 임진왜란 때 좌수영 산하의 수군기지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다. 이 성은 조선(朝鮮) 초기(初期)부터 해안 방어의 요충으로 축성된 발포 만호의 진성(鎭城)이다.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에 쌓여졌으며 둘레 1,350척, 높이 13척으로 쌓았다고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성터는 사다리꼴을 이루고, 둘레가 560m, 높이가 4m이며, 성 안에는 관아(官衙) 건물과 배수로(排水路) 및 무기고(武器庫)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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