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 특색 활동은 ‘학급의 특색을 살리는 활동’
학급 특색(학특) 활동은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자율 활동에 포함되는 시간이다. 학급마다 HR활동을 하거나 자습을 하거나 학급회의를 열기도 한다. 서울 한영고의 경우, 학특 활동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전적으로 학급의 재량이다. 작년 2학년 13반, 자연 계열 여학생반은 학특 활동을 주제 탐구로 하기로 했다. 담임 박성조 교사는 “말 그대로 학급의 특색을 살리는 활동이다. 많은 학급이 책을 읽고 보고서를 쓰는 독서 활동을 하지만 우리 반은 연구와 실험이 많은 이공 계열로 진로가 정해진 반이라 진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학생 전원이 각자의 진로에 맞춰 조를 결성하고 관심 주제를 탐구했다. 3월부터 시작해 10월까지 진행된 장기 프로젝트다. 탐구 활동을 처음 해본 친구들이 많아 주제를 잡지 못하고 교과 공부와 병행하느라 어려움도 많았다. 시간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진행된 7개월간의 힘겹지만 의미 있는 과정을 학생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한영고 2학년 13반, 학급 특색 활동 STEP BY STEP
STEP 01 탐구 주제, 이렇게 정했어요
탐구 주제를 정해 1년 동안 연구하자고 선생님께서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진척되는 게 신기했다. 먼저 친구들의 진로와 관심에 따라 생물 화학 물리 수학 건축 등 7개 조로 나눴다. 여학생들의 관심이 많은 생명과학 분야는 2개 조가 구성됐지만 수학처럼 단 2명의 학생이 참가한 조도 있었다.
과제 탐구에서는 주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학특 활동을 3월부터 시작했는데 4, 5월이 될 때까지 주제를 찾는 고민이 이어졌다. 어떤 조는 의욕적이어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지만 관심 분야가 조금씩 달라 의견을 모으기 어려웠고, 어떤 조는 아예 제안이 나오지 않아 어려웠다. 여러 번에 걸쳐 토론한 끝에 뇌 연구, 천연 항균제 만들기, 물리의 심화 과정 탐구, 폐기약품 처리 방법, 지진과 내진 설계, 수학 교육 방법 개선 방안, 생명과학 탐구 등 7개의 주제가 최종적으로 추려졌다.
“건축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모였는데 어떤 실험을 할지 내용이 잡히지 않았어요. 제가 1학년 때 지진을 주제로 탐구 보고서를 써본 경험이 있어서 내진 설계에 대한 주제를 제안했죠. 최근 우리나라에도 지진이 많이 일어나서 관심을 가지게 됐고 건물의 안정성, 즉 지진이 날 때를 대비해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설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보고 싶었어요.” _김예린 학생
“생명과학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모였지만 세부 관심 영역과 진로가 달라서 주제를 정하는 데 애를 먹었어요. 여러 번에 걸친 토론 끝에 키워드를 뇌로 잡았지만 뇌를 학생들이 깊게 탐구하는 건 어렵잖아요.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넓게 알아보자고 생각했죠. 저희 조의 탐구 주제가 속담 ‘수박 겉핥기’를 살짝 변형한 ‘뇌 겉핥기’가 된 이유예요. 하하.” _박유하 학생
STEP 02 본격적인 탐구의 시작, 만만치 않은 도전
초여름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탐구 활동이 시작됐다. 담임선생님이 전체적인 연구 방법과 일정, 연구 계획에 대해 조언을 해주셨지만 탐구 주제부터 활동 계획, 실험 설계 등 연구에 관한 모든 사항은 우리들이 결정했다. 느슨하게 진행되던 상반기 학특 활동은 1학기 말에 있었던 중간발표 시간이 전환점이 됐다. 그동안의 진행 상황과 부족한 점, 보완할 점들을 발표했는데 조마다 진척 상황에 큰 차이가 있었다. 착착 잘 진행되는 조가 있는 반면 ‘그동안 뭐했지’ 할 정도로 활동이 미미한 조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크게 자극을 받은 시간이었다.
“저희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실험이었어요. 뇌는 기억, 판단력, 감정, 집중력 등을 담당하잖아요. 학생인 저희에게 가까운 단어는 집중력이라고 생각했어요. 뇌와 집중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해보고자 했지만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고민한 끝에 저희가 학교에서 PPT나 UCC 발표를 자주 하는데 글씨체나 글씨 크기가 집중력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3가지의 다른 크기의 궁서체, 굴림체, 고딕체로 된 글을 읽을 때 언제 집중력이 가장 높아지는지를 뇌파로 측정했어요.” _박유하 학생
“저희 조는 생명과학을 ‘이론’과 ‘생명윤리’의 두 분야로 나누어 탐구하기로 했어요. ‘생명’은 윤리적으로 예민한 부분이라 실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생명 관련 강의를 듣고 싶었지만, 강의 수가 너무 많기도 하고 동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양인을 위한 캠벨 생명과학>이라는 책을 선정해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골라 읽고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기로 했어요. 2학기에는 영화 <씨인사이드>와 <아일랜드>를 보고 생명과 관련한 민감한 주제인 안락사, 인간 복제 문제를 찬반을 나눠 토론해보았어요.” _이현수·홍규원 학생
“저희 조는 슈퍼 박테리아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항생제를 먹잖아요. 항생제를 남용하면 인체에도 유해하고 효과도 없어져요. 저희는 시중에 나온 일반 항생제가 아닌 인체에 무해하고 효과가 있는 천연 항균제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항균 효과가 있는 천연 재료 중 레몬, 소금, 계피, 꿀을 에탄올과 정제수와 배합해 항균제를 만들고, 세균을 배양해 일반 시중에서 판매하는 항균 손소독제와 효과를 비교했어요.” _장수연 학생
박성조 교사의 한마디~
“저희 반이 굳이 조별 과제 연구를 고집한 것은 학생들 모두에게 탐구의 경험을 주기 위해서였어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이미 다양한 비교과 활동에 참여해서 탐구를 해본 경험이 많지만 성적이 좀 떨어지고 소극적인 친구들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참여를 잘 안 해요. 그런 학생들에게도 1년 동안 연구를 해보는 경험을 주고 싶었어요. 그 과정이 학생부에 기록되면 입시에도 도움이 되죠. 실험을 완전히 성공한 조는 없었지만 양식에 맞게 탐구 보고서를 쓰고 실험이 왜 실패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습니다.”
STEP 03 당황스러운 연구 결과, 우리가 실패에서 얻은 것
여름방학이 지난 후 중간고사를 앞두고 연구를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정신없이 바빴다. 실험을 진행한 조는 결과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나와 크게 당황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어떤 단계에서 어떤 오류를 범했는지,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지 파악하게 됐다. 실패가 더 깊게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 결과도 중요하지만 탐구 계획을 짜고 실험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다시 연구를 할 기회가 주어지면 더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완성된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
“저희 실험은 세균 배양이 필수였는데 배양기가 없으니 집에다 상자를 갖다놓고 스탠드 2개와 핫팩으로 온도를 높이고 외투를 몇 겹씩 덮어서 배양했어요. 밤에도 몇 번씩 깨서 세균을 아기 돌보듯 소중하게 다뤘다니까요.(웃음) 3일 만에 세균이 생겨서 저희가 만든 천연 항균제와 일반 항균제를 뿌려 세균이 얼마나 증가하나 살펴봤는데 저희 예상과는 달리 모두 증식했어요.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맥이 빠지는 순간이었죠.
세균을 배양하기 위해 저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최적의 온도와 환경이 유지되지 않아 오류가 나타난 것 같아요.” _장수연 학생
“집중력과 글씨 크기, 글씨체와의 관계를 측정하기 위해 실험을 했는데 결과가 일관되게 나오지 않고 중구난방이었어요. 친구들과 실험 실패 요인을 찾다 보니 처음에 계획을 짤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흠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우선 실험 환경이 시끄럽고 다른 변인이 통제되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실험의 가장 큰 문제는 집중도를 잘못 정의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집중도를 비교하기 위해 높은 집중도에 도달하는 시간만 측정했어요. 학습을 위해서는 이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를 간과한 거죠.” _박유하 학생
탐구 활동으로 내가 배우고 느낀 점은?
“저희는 지진과 같은 움직임을 측정할
장비가 없어 손으로 막 흔들어서 지진이 일어나는 상황을 연출했어요. 좀 어설펐지만 그래도 직접 실험을 해봐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에 가면 제대로 연구해보고 싶어요.” _김예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실험하는 과정 중에서 감수성 검사, 항균제의 작용 원리 등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번 실험의 한계점을 보완해 실용 가능한 항균제를 꼭 만들어보고 싶어요.” _ 장수연
“저는 암이나 종양에 관심이 많아서 의대에 지원하려 해요. 이번 탐구를 하면서 <생명과학Ⅱ> 부분을 미리 공부해볼 수 있어 도움이 됐어요.
또 의대 면접을 준비하려면 생명과 관련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안락사나 인간복제 등 생명 윤리에 대해 제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유익했어요.” _홍규원
“뇌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부터 측정 결과를 어떻게 분석할지, 뇌파 측정기의 정확한 원리를 알고 사용할 수 있을지 등 많은 부담과 걱정을 안고 시작한 실험이었어요. 실험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궁금한 점의 범위를 좁혀가면서 실험 주제와 목적을 정했고, 관련 책을 보면서 기초 용어부터 차근차근 정리하는 과정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_박유하
“생명과학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면서 내가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평소엔 동물행동학 말고는 관심이 없었는데, 진로를 바라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수학여행에서도 학특을 준비하느라 영화를 보고 토론한 시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_이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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