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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갈로그어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뜻)
필리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히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교단.
이 교단은 1914년 펠릭스 마날로가 교회를 세웠을 때 하느님의 선민인 필리핀 민족 안에서 초대교회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1945년부터 급속히 성장하여 20세기 후반에는 교인수가 60만 명에 이르렀고, 국가 전역에 화려한 예배당을 세웠으며, 펠릭스의 아들 에라뇨 마날로 주교를 중심으로 부유한 중앙조직을 갖게 되었다. 지도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헌신과 선거 참여 등을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확고한 정치적 압력단체로 만들었다. 신학은 유니테리언적이고, 필리핀어, 필리핀 전례, 필리핀 음악을 사용하는 이 교단은 반(反)서구적인 영적 독립운동을 대표한다.
정식 이름은 필리핀 무역법(Philippine Trade Act of 1946).
미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필리핀 공화국이 신생함에 따라 이에 관한 경제적 조건들을 규정한 미국 의회제정법.
이 법은 필리핀 경제를 미국 경제에 예속시키는 말썽많은 규정들을 담고 있었다.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이 독립했을 당시 그 경제는 제계대전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따라서 필리핀은 미국 정부의 전쟁배상금 지불 및 자본 유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벨 무역법은 미국에 대한 필리핀의 수출 할당량을 정하고, 필리핀의 페소와 미국 달러의 환율을 2 대 1로 고정시켰다. 또한 양국간에 8년 동안 자유무역을 행하다가 이후 2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관세를 적용할 것을 규정했다. 천연자원 개발과 공공시설 운용에 있어서 필리핀인과 동등한 권리를 미국인에게 허용하도록 필리핀 헌법의 개정을 요구한다고 해서 '평등개정안'으로 속칭된 이 법안에 대해서 많은 필리핀인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이 협상과정에 참여했던 몇몇 필리핀 권력자들은 타협을 통해 이권을 얻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미국측은 8억 달러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필리핀에게 무역법을 비준해 줄 것을 요구했고, 필리핀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후에 벨 무역법은 필리핀에 보다 이익이 되는 로렐-랭글리 협정(Laurel-Langley Agreement)으로 대체되었고, 이것은 1956년부터 발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초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포로들이 강제적으로 행한 행진.
1942년 4월 9일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한 대열은 산페르난도까지 88㎞를 강제 행진했고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했으며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를 행군했다. 이들은 행군과정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낙오자는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하는 등 숱한 박해를 받았다. 결국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중에 사망하고 단지 5만 4,000만명이 수용소에 도착했으며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뒤, 그 행진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행한 일본군 사령관 홈마 마사하루 중장이 기소되었으며 1946년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미국 군사위원회의 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4월 3일 처형되었다.
필리핀의 초기 정착촌.
이 말은 원래 말레이족 정착민들이 보르네오 섬에서 필리핀으로 타고 온 배의 이름인 발랑가이에서 유래했다. 각 배에는 대가족이 타고 있었으며, 배의 선장은 가족 정착마을의 지도자인 다투가 되어 마을을 통솔했다. 바랑가이 각 마을에는 30~100가구가 살았으나 서로 고립된 상태로 존속했다. 이슬람교 최초의 거점인 민다나오 섬을 제외하면, 필리핀 군도 어디에서도 큰 정치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수월하게 정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는데, 이것은 원주민의 저항이 고립 분산적이어서 전혀 단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바랑가이를 각 섬에서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 삼았다.
Huk Rebellion이라고도 함.
필리핀 루손 중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휘하에 일어났던 농민 봉기(1946~54).
이 운동의 이름은 '항일 인민군'을 뜻하는 타갈로그어 'Hukbo ng Bayan Laban sa Hapon'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은 1950년대에 들어 거의 승리를 쟁취하는 듯했으나, 그뒤 필리핀 정부에게 지원된 첨단 미제 무기와 카리스마적인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행정개혁으로 인해 급격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루손의 중부평원은 수많은 농민들이 광대한 영지에서 소작농으로 일하고 있던 기름진 농업지역이다. 부유한 소수와 가난에 쪼들리는 대중들 간의 확연한 대비로 필리핀 역사상 스페인 통치시기에 농민혁명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곤 했다. 1930년대에 루손 중부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적인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표면화되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필리핀인들은 일본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바탄이 일본에 점령되자(1942. 4) 조직화된 유격대들은 일본에게 점령된 지역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중 후크발라하프 조직이 가장 성공적인 유격투쟁을 벌였는데 이들은 수천 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에 협력한 부유한 필리핀인들을 암살의 주요대상으로 삼았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루손 중부의 광대한 영지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들은 지방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거두어들였으며 자신들의 법을 집행했다.
필리핀의 미군은 후크단의 지휘권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간주했다. 후크단과 필리핀 정부 사이에는 곧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후크단은 그들이 보유한 약 50만 자루의 총을 정부에 반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필리핀 정부를 과두 독재정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은 1946년 7월 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4월에는 새 정부의 고위직 선거가 실시되었다. 후크단은 이 선거에 참여해 그들의 지도자 루이스 을 하원의원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몇몇 후크단 후보들과 함께 집권당이 된 자유당이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크단은 밀림지역으로 후퇴하여 오랜 저항운동에 착수했다. 독립 직후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록사스는 후크단에 대한 '무력정책'을 천명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사기는 매우 저조했으며 정부군이 주민들에 대해 무차별 보복을 가함에 따라 후크단의 입지가 강화되어갔다. 이후 4년 동안 마닐라 정부는 서서히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가는 반면 후크단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1950년에 이르러 후크단 유격대들은 마닐라 근교로 접근했으며 공산주의자 지도자들은 권력쟁취를 위한 적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마닐라에 있던 그들의 지하본부가 정부관리들의 습격을 받아 후크단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정치 지도부 전체가 하룻밤 만에 체포되었다. 동시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고하고 마닐라 정부에 다량의 군수물자를 지원할 것을 허가함으로써 후크단은 다시 한번 타격을 입었다. 후크단이 패배하게 된 또다른 요인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라몬 막사이사이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1953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중들은 마닐라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1954년 후크단 지도자 타룩은 밀림에서 나와 항복했으며 후크발라하프 반란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그러나 후크단 운동과 그 지도력은 주로 팜팡가 지방(루손 섬)을 거점으로 해서 지속되었다. 이후의 필리핀 행정부가 오랜 기간 약속했던 토지개혁을 실행할 수 없게 되자, 후크단은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고 어떤 지역에서는 새로운 폭동집단과 통합되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1970년대까지도 적극적인 반정부조직으로 남아 있었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날짜를 최초로 명시한 법령(1933).
대공황 시기에 필리핀의 설탕 및 코코스야자 기름과 경쟁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 농민들과 독립정부를 구성하려고 애쓰던 필리핀 지도자들의 압력으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932년 12월 상원에서도 통과되었으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후버의 예상을 뒤엎고 그가 거부한 법안은 하원에서 즉각적으로 재가결되어 이 법안은 1933년 1월 17일에 정식 법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필리핀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필리핀의 정치지도자 마뉴엘 케존은 이 법률이 필리핀 군도에 미국 군사기지를 무한정 허용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 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34년에 이 법률과 근본적으로는 비슷하지만 부분적으로 약간 다른 티딩스-맥더피 법령이 필리핀 상원에서 통과되었다.
미군과 혁명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1899~ 1902).
이 봉기는 스페인 통치에 대한 필리핀 혁명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파리 조약(1898)이 맺어져 필리핀에 대한 통치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옮겨졌지만 마닐라를 제외한 전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던 필리핀 군부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02년 봉기의 종결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후 몇 년 동안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조지 듀이 제독은 1898년 5월 1일 아침 마닐라 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지만 그후 3개월 뒤 육군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닐라를 점령할 수 있었다. 8월 13일 마닐라는 무혈의 '전투'를 치른 뒤 점령되었다. 스페인 총독 페르민 하우데네스는 자신의 명예유지를 위해 저항하는 척하다가 비밀리에 항복했다. 미군이 마닐라를 점령하고 필리핀 혁명세력이 그 이외의 전국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 전쟁은 1899년 2월 4일 밤 마닐라 외곽에 대한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1899년 봄 내내 미국 군대는 북쪽으로는 중앙 루손 평야까지 밀고 올라갔고, 그해 말 필리핀 장군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접근하기 어려운 북쪽 산악지역으로 후퇴했다. 재래식 전투는 끝났으나 봉기 지도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격렬한 유격전을 계속했다. 1901년 사마르 섬에서 더욱 격렬하게 전투가 벌여졌다. 유격대에 의해 미군이 학살된 데 격분한 제이콥 F. 스미스 장군은 잔혹한 보복전쟁을 벌여, 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퇴역했다. 1902년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미군 당국은 나머지 유격대들을 도적으로 간주했다. 시메온 올라가 이끌던 1,000여 명의 게릴라들이 1903년말까지 투쟁했고, 마닐라 남부 바탕가스 지방에서는 마카리오 사카이가 지휘하는 군대가 1906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미국인 정권에 대한 마지막 조직적 저항은 1904~06년 사마르에서 일어났다. 이곳의 평화로운 마을을 불사르는 봉기자들의 전술은 실패했다. 이후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명실상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1946년까지 통치했다.
300년 이상의 스페인 식민통치 후에 벌어진의 독립투쟁(1896~98).
이 혁명은 스페인 통치의 무력함을 폭로했으나 필리핀 군도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1898년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가 종식되었지만 필리핀 혁명세력과 미군과의 유혈전쟁인 필리핀 봉기가 일어났다. 종교적 성격을 띤 수많은 봉기들은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를 중단시켰지만 그 누구도 유럽인들을 몰아낼 만큼 충분한 단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교육수준이 높은 필리핀 중산계층의 부상과 함께 필리핀 독립에 대한 열망도 더욱 커갔다. 1872년 전까지의 반대투쟁은 주로 필리핀 성직자들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었는데, 그들은 필리핀 군도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스페인 사람들의 권력 독점에 분개했다. 그해에 스페인에 대항해 소규모 봉기인 카비테 봉기가 일어났는데, 스페인 정부는 이를 핑계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카비테에서 봉기한 사람들과 은밀하게 봉기 계획을 추진했던 필리핀인 세신부 호세 부르고스, 마리아노 고메스, 하신토 자모라의 순교는 국민들의 반스페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개혁의지가 넘치는 필리핀인들은 유럽에 피난해 선전운동으로 알려진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호세 박사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 운동의 지도적인 선전가로 부상했다. 그의 소설 〈사회의 암(癌) Noli me t ngere〉(1886)은 마닐라 스페인 사회의 부패를 폭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했다. 1892년에 이르자 스페인 식민정부의 개혁의지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독학한 창고점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에서 이라는 비밀혁명단체를 조직했다. 회원은 계속 늘어 1896년 8월경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무렵 스페인 당국도 이 조직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보니파시오는 즉시 무장봉기를 호소했다. 그때 스페인 정부는 리살 박사를 체포했는데, 리살은 개혁은 부르짖었지만 혁명은 동의하지 않았다. 1896년 12월 30일 리살 박사의 공개 처형은 필리핀인을 격분시켰고 나아가 이들을 단결시켜 스페인의 계속적인 권력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897년 3월혁명의 주도권은 젊은 장군 에밀리오 에게 넘어가 보니파시오를 선동죄라는 죄목으로 총살했다. 그는 필리핀 용병들에 의해 보강되던 스페인 군대의 무력타도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1897년 말 아기날도의 혁명군은 마닐라 남동쪽 산악지역으로 밀려났다.
1897년 12월 15일 비아크나바토 협정이 공포되었다. 비록 세부조항들은 그후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일단 협정으로 인해 필리핀 혁명이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 아기날도와 다른 혁명 지도자들은 무력투쟁의 포기 대가로 홍콩으로의 망명과 40만 페소의 돈, 그리고 스페인의 실질적인 정치개혁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충실하게 협정조항들을 준수한 것은 아니었다.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돈을 썼고 스페인도 개혁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898년 5월 1일 미해군 사령관 조지 듀이가 마닐라 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전멸시킨 뒤 아기날도는 즉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는 새로 미국에 대항하는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스페인의 패배에 따라 미국이 필리핀 통치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기날도는 1901년 미군에 체포된 이후 필리핀인들에게 미국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미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일본 연합함대와 미국 제5함대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중의 해전(1944. 6. 19~21).
미군의 사이판 상륙과 함께 벌어진 것이었는데, 미국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중 가장 큰 항공모함 전투'로 유명하다.
전투는 1944년 6월 19일 아침 일본의 오자와 지사부로[小澤治三郞] 제독이 미국인 침입자들과의 결전을 결심하고, 430대의 전투기로 4차례에 걸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한 미국 함정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결과는 일본의 참패였다. 전투 첫날 일본은 300대 이상의 전투기와 2척의 정규 항공모함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함대가 오키나와[沖繩] 안전한 항구를 찾아 북진하는 중에 다른 1척의 항공모함과 100대 이상의 전투기를 잃었다. 반면에 미국은 2일간의 전투중에 130대의 비행기와 약간의 전함손실을 입었을 뿐이었다. 일본군의 빈약한 전투력에는 여러 요인이 있으나 병력과 군수물자 부족이 특히 주요한 원인이었다. 몇몇 일본 조종사들은 채 3개월도 훈련받지 못하고 실전에 투입된 반면,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이 만 2년의 훈련을 받았다. 일본 전투기는 기동력이 뛰어났고 미국 전투기에 비해 비행거리가 길었지만 몇 가지 점에서, 특히 부적합한 무기 방어장치와 자동 봉쇄 연료 탱크의 부족이라는 면에서는 미국 비행기에 뒤졌다. 이 전투에서 미국 잠수함 또한 적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미국 지휘관에 전달하고 일본 전함을 격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다.
Philippine Commonwealth and Independence Act라고도 함.
필리핀에게 독립을 부여하기 위해 미국이 입안한 법안(1934).
이 법안에 의하면 필리핀은 미국 정부에 의한 10년간의 과도통치를 거친 후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도록 되어 있었다. 1934년 3월 24일 프랭클린 D.루스벨트가 서명한 이 법안은 필리핀 상원으로 이송되어 같은 해 5월 1일 승인받았다(이전에 필리핀 상원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호스-커팅 법안을 부결했음). 이 법안에 따라 필리핀은 7월 10일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했으며, 루스벨트는 1935년 3월 23일 필리핀 헌법을 승인했다. 그해 11월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 이끄는 필리핀 정부가 출범했고, 이후 10년 동안 필리핀은 미국 관할권하에 놓여졌다. 필리핀의 외교·국방·재정은 미국의 권한에 종속되었으나, 다른 모든 국내문제는 필리핀 정부가 주관했다. 미국의 과도통치를 거치는 동안 점차 필리핀의 의무가 증대되었고, 1939년에는 무역에 관한 조항들이 필리핀에 유리하게 개정되었다.
옛 이름은 Clark Field.
필리핀 루손 섬 북서부 팜팡가 주에 있는 미국국의 공군기지.
면적은 약 30㎢이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77㎞ 떨어진 카부실란 산맥 기슭의 작은 언덕 가까이에 있으며, 미국-스페인 전쟁(1898) 후 미군 제5기갑부대의 주둔지로 설정되었다. 이 기지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공군 조종사 해럴드 M. 클라크 소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타이완에서 발진한 일본군 폭격기들이 클라크 비행장을 공습의 주목표로 삼아 미국군의 극동지역 항공기의 절반 이상을 파괴했다. 일본군의 필리핀 점령(1941~42) 후 이 비행장은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의 주요작전기지의 하나가 되었다. 1944년 미국군이 필리핀 탈환전을 개시했을 때 일본 최초의 가미카제가 날아간 것은 클라크에서였다. 베트남 전쟁중 클라크 공군기지는 전략보급기지 겸 전투기대대의 기지 역할을 했다. 이 기지의 연병장 부근에 있는 옛 구역에는 세기말 식민지시대풍의 아름다운 집들이 있어, 베트남 전쟁중에 건립된 건물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기지 부근에 있는 자치도시 안젤레스에는 군인들을 위한 쇼핑 시설과 그밖의 서비스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서쪽으로 약 22㎞ 지점에 있는 크라우 계곡은 공중폭격과 포술 훈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70, 1980년대초에 미국과 필리핀 사이에 클라크 공군기지와 필리핀 국내에 있는 그밖의 미군 시설들의 지위에 관한 협상이 계속되었다. 1991년 피나투보 산의 분화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고, 클라크 공군기지도 화산재로 뒤덮였다. 이에 기지의 처리를 둘러싸고 협상이 개최되었으며, 미국 정부는 화산재로 뒤덮인 기지를 포기했다.
정식 명칭은 Kataastaasan Kagalang-Galang Na Katipunan Nang Manga Anak Nang Bayan.
스페인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1892년에 설립된 필리핀의 민족주의 단체.
회원수는 10만~40만 명 정도였다. 필리핀 민족주의자 에밀리오 아귀날도를 지도자로 한 이 단체는 스페인에 맞서 훌륭하게 싸웠으며, 회원 대부분이 타갈로그인들이었다.
200명의 필리핀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카비테 조병창에서 일으킨 일시적 봉기(1872. 1. 20).
스페인은 이 사건을 필리핀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지 당국의 무자비한 대응은 도리어 민족주의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반란 자체는 금방 진압되었지만 반동적인 총독 라파엘 데 이스키에르도 치하의 스페인 식민당국은 이 사건을 확대과장해 이를 정부개혁을 요구하던 필리핀인 탄압을 위한 구실로 활용했다. 무수한 필리핀 지식인들이 체포되었으며 반란자들과 공모했다는 죄로 고발되었다. 간단한 재판이 열린 후에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 마리아노 고메스 등 성직자 3명이 공개처형되었다. 이 세 사람은 이후 필리핀 독립운동의 순교자로 상징되었다.
정식 명칭은 필리핀 자치법(Philippine Autonomy Act).
"필리핀에 안정된 정부가 수립되면 필리핀 제도에서 미국 총독부를 철수시키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도를 천명한 법률(1916).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필리핀을 획득했으며, 1901년부터 미국인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지배되는 필리핀 위원회를 통해 입법권을 행사했다. 존스 법으로 필리핀 위원회는 선거에 의한 의회로 대체되었고, 최저재산자격만을 조건으로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모든 필리핀 남자 국민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존스 법은 또한 권리장전(미국연방헌법 수정 제1~10조)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존스 법은 새로 구성된 필리핀 의회에서 통과시킨 모든 법적 조치에 대한 거부권을 총독이 보유하는 규정을 둠으로써 사실상 미국인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었다. 프랜시스 B. 이라는 진보적 성향의 총독에 의해 이 거부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공직에서도 미국인 대신 필리핀인을 임명하는 작업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1921년 해리슨의 임기가 종료될 즈음에는 필리핀인들이 국내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존스 법은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TydingsMcDuffie Act)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사실상 필리핀 헌법으로서 효력을 지녔다. 존스 법에 의한 궁극적인 절대 독립의 약속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장래 정책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1921년 필리핀에 파견된 미국의 진상 조사단.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워런 하딩은 1921년 3월 필리핀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 사절단은 필리핀은 아직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1913년 우드로 윌슨은 자유당원인 프랜시스 B. 을 필리핀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해리슨은 필리핀의 국민에게 독립을 준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필리핀 사람들을 그들의 국내적인 업무에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1916년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존스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용기를 얻은 해리슨은 필리핀 내의 미국인 공무원들을 필리핀 사람들로 대체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의 공화당원들은 해리슨의 필리핀화 정책은 시기상조이며 필리핀 사람들에게 업무를 인수시키는 것은 단지 공무의 현저한 질적 저하를 초래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화당원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하딩은 레너드 우드 장군과 W. 캐머론 포브스를 필리핀에 파견했다. 두 사람은 1921년 10월 필리핀 제도는 독립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고등 교육을 받은 필리핀 사람들은 계속해서 미국의 가르침 아래 있기를 희망한다고 보고했다. 우드-포브스 보고에 관한 소식을 들은 필리핀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후 우드는 6년 동안 필리핀의 총독을 지냈는데, 그는 비록 정직하고 유능한 행정관이었지만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필리핀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자(CPP-ML)의 전투부대.
혁명적인 봉기를 통해 필리핀에서 권력장악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자 조직이다. CPP-ML은 모택동주의파로, 원래 1968~69년에 극히 소극적이고 소련 지향적이었던 필리핀 공산당에서 이탈해 나와 곧바로 신인민군(NPA)을 만들었다. NPA는 곧 페르난도 마르코스 대통령 정권에 대항해 정부관리들을 암살, 군부대를 매복습격하는 등 게릴라 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점점 힘을 길러 1971년 350명이었던 부대원들이 1980년대말에는 2만 명이 넘었다. NPA는 루손 북부에 있는 원래 기지에서 필리핀 열도의 모든 섬으로 퍼져나가면서 지지자들의 연락망을 먼저 시골에, 나중에는 도시에까지 만들어나갔다. 1980년대말까지 NPA는 새로 뽑힌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정부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으며, 정부와 협상하는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필리핀에서의 미국 군정 종식을 요구한 1901년의 군비특별지출 법안(Army Appropriations Act)에 대한 수정안.
파리 조약(1898. 12)에 따라 필리핀 제도의 주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의 통치에 저항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필리핀의 저항은 군사정부의 무자비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푸너 수정안은 1901년 7월 출범한 민간정부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에게 통치권을 이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필리핀의 게릴라들은 수년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이양받을 때, 스페인 수도원 소유의 대규모 토지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
300년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필리핀의 스페인 식민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동안 가톨릭의 3개 수도회(도미니쿠스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레콜렉투스 수도회)는 필리핀의 개간지 중 1/10을 소유했다. 필리핀 농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하여 오랫동안 불만을 표출해왔으며 이것이 1896~98년에 일어난 필리핀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스페인-미국 전쟁을 결말지은 파리조약(1898)에서 미국 정부는 수도원의 토지소유권은 보호해주기로 약속했으나 수도사들이 그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양국은 미국 정부가 700만 달러를 내놓고 약 17만㏊의 땅을 사들이는 데 합의했다. 이 토지는 다시 할부로 필리핀 소작농들에게 판매되었으나 이것도 만족스러운 해결안은 아니었다. 즉 측지의 정확성과 토지대금의 상환조건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Sakdalista Uprising이라고도 함.
1935년 5월 2일에서 3일 밤 필리핀 중부 루손의 농업지역에서 일어났던 농민 반란.
신속하게 진압되기는 했지만 삭달인들(삭다리스타)의 봉기는 억압적인 토지소작 상황에 대한 필리핀 농민들의 불만을 표현한 경고 역할을 했다.
삭달(타갈로그어로 '고발'이라는 뜻) 운동은 불만을 가진 전 관청 서기 베니그노 라모스에 의해 1930년에 시작되었다. 읽고 쓸 줄도 모르며 토지도 갖지 못한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이 운동은 빈농에 대한 파격적인 조세감면과 대토지소유제의 철폐를 포함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이 운동은 미국으로부터 점진적인 독립을 받아들인 여당인 국민당(Nacionalista Party)의 정책에 반대하고, 필리핀과 미국의 모든 관계를 즉각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1930년대 초기에 삭달 지지자들은 간디가 인도에서 벌인 비협력운동에서 시사를 받아 정치불참과 선거와 납세 거부를 추진했다. 1933년 이들은 전술을 바꾸어 정당을 조직했다. 삭달 지지자들은 1934년 필리핀 선거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싸웠고, 이에 고무되어 이들은 다음해 봉기하게 되었다. 5월 2일 밤 부분적으로 무장한 군중들이 14개 도시에서 시청을 장악했다. 이 봉기는 1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다음날로 진압되었다. 라모스는 도쿄[東京]로 달아났고 삭달 지지자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농촌 상황은 여전히 좌절과 분쟁의 온상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다른 유사한 농민반란들이 일어났다.
1944년 10월 23~26일에 벌어져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꿔놓은 해군·공군전.
이 전투로 일본의 연합함대는 궤멸되고 미국은 필리핀 진공에 성공했으며 연합군은 태평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10월 20일 필리핀 중부의 섬에 대한 미국의 상륙 공격으로 개시되었다. 일본군은 쇼고[捿號] 작전으로 대응했다. 일본의 작전은 미국의 제3함대를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부터 북쪽으로 유인하는 한편 3개 군(軍)을 레이테 만에 집결시켜 미 상륙군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의 제1공격군은 북쪽으로부터 시부야 해를 건너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해 남하하고, 제2공격군과 제3공격군은 남쪽으로부터 민다나오 해를 건너 수리가오 해협을 통해 북상하기로 했다.
일본군이 레이테의 남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미국 제7함대의 잠수함들은 제1공격군을 발견하고 10월 23일 팔라완 서쪽에서 중순양함 2척을 격침했다. 잇따라 시부야 해에서 지상과 공중전이 계속되었고, 미국의 제3함대는 일본의 유인 선단을 추격했다. 10월 25일 마침내 레이테 만 전투의 3대 결전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수리가오 해협에서는 제7함대 소속의 전함과 순양함들이 제3공격군을 격멸하고 제2공격군을 격퇴했다. 한편 제1공격군은 무방비의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사마르 근해에서 제7함대의 항공모함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미 상륙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순간 갑자기 퇴각했다. 북쪽에서는 엥가뇨 곶 근해에서 제3함대의 일부가 일본의 유인용 항공모함들을 격침하고 남은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제1공격군을 공격하며 추격했다
출처: 필리핀유랑단
첫댓글 감사합니다.핀리핀을 좀더아는 계기가되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