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 있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좌절할 때면 교본 제39장(“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의 23번(“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다”)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아무리 정성과 열정을 다해 오랫동안 활동해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레지오 단원은 본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목표로 활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없다는 느낌 속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한 채로 계속 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럴 때 단원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교본 451쪽 새 번역)
이처럼 레지오 단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어두운 밤 폭풍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1986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신의 유다인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은 그의 자전적 소설 「흑야」(Night)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의 폭풍과도 같은 어두운 밤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전쟁이란 참상 속에 부조리와 불의가 횡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비인간적 조건에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기막힌 현실을 보고 겪게 되면서, 유다교 신자였던 엘리 위젤은 신앙심이 흔들리게 된다. 그는 죄 없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우주 만물의 영원한 주인이며 전지전능한 신께서는 왜 이러한 참상 속에 그저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러한 신에게 아직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조롱 섞인 기도를 바치기도 한다. “우리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선택하시어 밤낮 고문을 당하게 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이 화장장에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보게 하신, 우주의 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제단 위에서 학살되게 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시다.”(「흑야」, 가톨릭출판사, 71988, 83쪽)
특히, 한 어린 소년이 어른 두 명과 함께 사형을 집행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충격적인 기억을 엘리 위젤은 고백한다. 두 어른은 교수대에서 금방 숨이 끊어졌지만, 어린 소년은 몸무게가 가벼웠던 탓인지 반 시간 이상 목에 밧줄이 감긴 그대로 매달린 채 버둥거리다가 서서히 비참하게 죽어갔다. 몸부림치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어린 소년을 바라볼 때, 이를 강제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여러 사람 중 어느 누군가가 혼잣말로 질문하였다.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엘리 위젤은 바로 그때 자신의 내부로부터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81쪽)
이것은 바로 인간의 비극과 참상 속에서 제기되는, ‘신의 침묵’에 대한 물음의 절정이다. 모든 것을 아시고(전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전능), 또한 어디든지 계시고(무소부재/편재), 선(善) 자체인(전선) 분이라고 하는, 신의 존재성을 묘사하는 전통적 표상 방식에 대한 의문이고 도전이다.
신은 왜 그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지금 여기에서 자행되는 비극적 고통과 악의 현장에 개입하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는가? 신은 잠자고 있는 것인가? 신은 혹시 출장이나 휴가 중에 있는가? 아니면 신은 가학적이어서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보며 즐기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절망을 넘어서 체념과 조소 속에 제기되던 ‘신의 침묵’에 대한 질문이 끝내는 ‘신의 죽음’이라는 최종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이처럼 인간의 비극을 방관하거나 외면하는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는 인도주의적 무신론(humanistic atheism)에 도달한 것이다.
신과 관련한 모든 추상적 진술이 여기에서 심각한 의문과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너무도 끔찍한 악(惡)의 구체적 실재 앞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종교적 설명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지를 많은 이가 질문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죄 없는 의인들의 고통이 허락되는지 우리는 아직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구약 성경 「욥기」의 저자가 처절하게 질문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욥기」에서는, 악의 실재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고 허락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질문과 항의가 처절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온갖 재앙과 그로 인한 인간 고뇌 앞에서 마주하는 ‘신의 침묵’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 큰 불가사의가 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무고한 이들의 시련과 아픔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고통받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 중에 헛수고의 어려움을 겪으며 이러한 질문과 좌절에 처할 때,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아픔과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의 좌절과 고통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오히려 우리와 함께 깊이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악이 번창하고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시며 마음 아파하신다(창세 6,5-6 참조).
의인들의 이유 없는 좌절과 고통은 아직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직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신비일 것이다. 아직 미몽과 어둠 속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기”(1코린 13,12ㄱ) 때문이다.
아직 우리의 앎이 부분적이고 한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깨우쳐 이 신비를 온전히 알게 해 주실 것이다(1코린 13,12ㄴ 참조).
다만 지금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좌절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고통받고 아파하신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엘리 위젤의 책에 나오는,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하는 문장은, 교수대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한 어린 소년의 고통을 보면서 자신이 믿던 신의 존재도 함께 죽어갔음을 뜻한다.
이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하느님을 이제는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지오 단원들은 똑같은 대사와 문장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통 속에 죽어가는 어린 소년 옆에서, 당신 스스로 그 고통의 심연을 함께 느끼고 계신 하느님의 통애(痛愛)이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6년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39항에서, “구속자이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 하느님의 ‘고통’이 구체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레지오 활동의 시련과 좌절에 마주할 때,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을 느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느님을 향해 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