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님의「단군고여록」중
나는 우리나라의 國慶日 가운데 가장 으뜸은 開天節이고, 그 다음은 한글날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인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정치적 판단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글날을 公休日에서 제외시키고, 開天節 행사의 대통령 주재가 슬그머니 사라지면서 形式化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만약 우리에게서 檀君과 한글을 없애 버린다면 이 地球上에 배달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겨레의 핏줄과 뿌리를 소홀히 하고 겨레의 말과 글을 소중히 하지 않는 것처럼 얼빠진 일도 없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혼미만 하더라도 가치관의 전도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제 조상을 업신여기고 남의 조상을 우러르니 그 집안, 그 사회, 그 나라가 올바로 설 리가 없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그래도 다행스런 것은 檀君의 얼과 가르침이 백성들의 몫으로 생명력을 지녀왔다는 사실이다. 온갖 國難과 풍상을 이겨낸 것도 백성들이 檀君의 자손임을 자부한데서 얻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은 배달사람이었는데 비해 지배층은 그렇지 못해 엄청난 비극을 이땅에 몰아왔다. 엄연한 檀君의 자손이요 檀君의 얼을 간직하고 펼쳐야 할 상당수의 지배층이 때로는 중국사람 구실을 하고, 때로는 日本의 앞잡이가 되고, 또 때로는 西洋사람을 신주모시듯 했으니 이른바 지배층의 정신풍토가 어떤 것인지는 설명할 나위도 없다.
예부터 나라의 으뜸가는 명절로 檀君과 弘益人間정신을 기리는 행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있어왔다. 迎鼓, 舞天, 東盟, 天君祭, 弗矩內, 八關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開天節로 이름하게 된 것은 朝鮮朝末 나라가 기울 무렵부터였다. 나라를 연(開國)것을 開天이라 이름하여 하늘을 열었다고 한 것은 하늘의 뜻이 인간을 향해 開闢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太白逸史에 보면 하늘을 열고(開天), 땅을 열고(開地), 사람을 열었다(開人)라고 적혀있다.
■ 李揆行*,「檀君考余錄」『한배달』여름호:통권28호, 사단법인 한배달, 1995.
(*전 한경, 문화일보 사장 회장, 중앙일보 고문, 현 삼진선원 대표·현묘학회 회장)
개천절의 사전적 의미
10월 3일 거행되는 우리나라 국경일의 하나로서, 서기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개천절은 '개천(開天)'의 본래의 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 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도, 이보다 124년을 소급하여 천신(天神)인 조화주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교화주 한웅(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갑자년(上元甲子年: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전통적 명절을 기리는 행사는 먼 옛날부터 제천행사를 통하여 거행되었으니,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등의 행사는 물론이요, 마리산(摩尼山)의 제천단(祭天壇),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등에서 각각 행하여진 제천행사에서 좋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우리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불러,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3일의 3의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겨 왔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뜻을 보다 분명히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명절을 개천절이라 이름짓고 시작한 것은 대종교(大倧敎)에서 비롯한다.
즉, 서기 1909년 1월 15일 서울에서 홍암 나철 대종사(弘巖羅喆大宗師)를 중심으로 대종교가 중광(重光:다시 교문을 엶)되자,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매년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기여하였으며, 특히 대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해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하여 경하식을 행하였고, 충칭(重慶) 등지에서도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계승하여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하고, 그때까지 경축식전에서 부르던 대종교의 <개천절 노래>를 현행의 노래로 바꾸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도 음력으로 지켜 왔는데, 1949년에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양력 환용(換用)심의회'의 심의결과 음·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 행하던 경하식은 국가적 행사에 맞추어 양력 10월 3일에 거행하고 제천의식의 경우만은 전통적인 선례에 따라 음력 10월 3일 상오 6시에 행하고 있다. 이날은 정부를 비롯하여 일반 관공서 및 공공단체에서 거행되는 경하식과 달리, 실제로 여러 단체들이 주체가 되어 마리산의 제천단, 태백산의 단군전, 그리고 사직단의 백악전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올리고 있다. <김정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최남선,『조선상식문답』
개천절을 말씀하여 주시오.
조선의 建國始祖(건국시조) 檀君(단군)(*운영자주: 시조이자 교조이시며, 이신화인하심)께서 인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天界(천계)로부터 내려오신 것을 고마워하여 경축하는 명절이 개천절입니다. 옛날 단군의 자손이 세운 여러 나라에서는 어디서든지 이 철로써 祭天大會(제천대회)를 열어, 한얼님(하느님)과 國祖(국조)께 절을 하고, 나라의 큰 일을 처결하고, 또 갖은 놀이를 베풀어 국민 상하가 다 한가지 이 날을 기념하고 또 즐겼는데, 그 시기는 대개 농사와 다른 수선한 일이 끝나고 국민 전체가 마음을 오로지하여 경축의 정성을 다할 수 있는 때를 가려서 썼습니다.
후세에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그 초사흗날을 신성하게 생각함을 말미암아서,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이 날 가장 정성스러운 고사를 각 집에서 지내고, 혹은 名山(명산) 속에 들어가서 엄숙하게 치성을 바쳤습니다. 이 고사나 치성에는 몸과 집의 부정을 가장 꺼리고, 또 이 고사 지낸 음식은 문 밖에 내지 않고 집안에서만 그 복을 받잡는 것이 옛 법이었습니다.
어느 시기에는 10월의 큰 고사가 이러한 내력의 것임을 잊어버리고, 그저 천지 신명께 정성을 바치는 것이거니 하였으되, 10월 고사를 가장 정성스럽게 지내는 법만은 언제든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 하다가 근래에 단군의 교화가 새로워짐과 함께, 개천절의 뜻이 다 일반에게 알려졌습니다.
10월은 왜 상달이라고 합니까?
1년내 지어 오던 농사가 10월에 와서 끝이 나고 새 곡식·새 과일에 먹을 것이 풍성하여지면, 이렇게 배를 불려 주시고 마음을 흐뭇하게 하여 주시는 하느님이 고마우시고, 일월산천의 신령이 고마우시고, 또 이러한 나라와 우리 집안을 만들어 주신 조상님네가 고마우셔서, 우리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성스럽고 깨끗하게 떡도 하고 술도 빚어서 하느님·신령님·조상님께 감사하는 제사를 바치게 됩니다. 洞內(동내)에서는 堂山祭(당산제), 집안에서는 고사, 산소에서는 時祭(시제)를 지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사람과 신령이 한가지 즐기게 되는 달이므로, 10월은 열두달 가운데 첫째가는 上(상)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천절 관련 기사
개천절은 한 옛날 상달상날에 단군 한배검께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건설하시고자 한울문을 열고 백두천산에 강림한 날이다. 개천절은 예부터 상달상날이라 높여 불렀다. 이날을 기려 거족적인 제천의식이 계승, 전래했다.
옛 부여에서는 영고(迎鼓), '예'와 '맥'에서는 무천(舞天), 마한·변한은 계음(契飮), 고구려는 동맹(東盟), 백제는 교천(郊天), 고려에서는 팔관회(八關會)라는 민족제천 대회를 봉행했다.
이를 통해 국민 대단합과 경천숭조(敬天崇祖)·충효사상 등 민족 고유의 정통윤리를 확립하고 근본을 갚는예절을 전수해온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엽 외래문물의 유입과 몽고의 침략으로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의식은 흐려지고 우리의 전통문화와 종교의식은 민속 및 민간사상으로 숨어들어갔다.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에는 고삿날로 그 잔영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7백여년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결국 우리는 나라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홍암 대종사는 대종교의 중광과 함게 민족 고유의 천제의식을 되살렸다. 뿌리를 찾아 정통신앙으로 국조 단군 한배검에게 귀일(歸一)하는 길만이 겨레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구국일념에서였다.
4252년(서기 1919)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해 해마다 대종교와 함께 경축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4281년(서기 1948) 8월 15일 국내에서 새 정부가 수립되면서 개천절을 거듭 국경일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 가운데 3·1절, 제헌절, 광복절은 일제로 인하여 생겼지만 오직 개천절만이 우리 민족의 정통 명절로 이어진 것이다.
■ 월간 중앙 WIN 98.11월호 p.286.
문헌 고찰
①김교헌,『신단민사』
개천갑자년(開天甲子年) 상달(10월) 초사흗날(3일)에 천신(天神)이 일부(一符)와 삼인(三印)을 가지고 풍백과 우사와 운사와 뇌공을 거느리고 사람으로 화하여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에 사람과 사물을 이치로 자라게 하며 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 신인이 곡식·목숨·질병·형벌·선악의 다섯가지 일(五事)을 주관하며, 인간의 366가지 일을 다스리니, 이에 남녀·부자·군신의 분별과 음식·의복·거처의 제도를 정하며 머리를 땋고 머리를 덮는 일을 행하였다. [신시시대편]
②김교헌,『신달실기』
한인(桓因)·한웅(桓雄)·한검(桓儉), 혹은 단인(檀人)·단웅(檀雄)·단군(檀君)이 곧 삼신(三神)이다. 상원(上元) 갑자(甲子) 10월 3일에 한검(桓儉)이 신(神)으로서 사람으로 화(化)하여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 단목(檀木) 밑에 내려와 신교(神敎)를 베풀어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 때 백성들이 그 교화를 입어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 마치 시장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신시씨(神市氏)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비로소 3천의 단부(團部)를 두었다.
그 후 개천(開天) 125년 무진(戊辰 B.C.2333) 10월 3일에 나라 사람들이 이 신인(神人)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단군이시다. 단목 아래에 내려왔기 때문에 단군이라 한다. 나라 이름은 단(檀)이라 했으며 배달(倍達)이라고 불렀다. [단군세기편]
③김교헌,『단조사고』
◇갑자(甲子)에 한울보람 셋인(印)을 가지시고 한배뫼[곧 태백산(太白山)]배달나무 아래에 나리시다.
《평양지(平壤志)》에 최명길(崔命吉)의 단군사당 귀글에 이르되『갑자에 터를 연 것이니「한얼사람」의 옛 자취 있다』하였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 이르되 동녘에 처음은 임금님이 없더니「한얼사람」께서 한배뫼-배달나무 아래에 나리시거늘 나라사람이 세워서 임금을 삼으니 이「이」가 단군이시라. 고기(古記)에 이르되 한웅께서 사람이 되시어 인간에 나리시고서 천부삼인을 받으시고 한배뫼 배달나무 아래에 나리시니 신시님이라 이르다.
《삼국유사》에 이르되 옛날에 한국(桓國[본책에 국을 혹 인(因)으로 혹 국(國)으로 적는데 여기에는 아주 국(國)으로 적혔으나 인 곧 임으로 많이 쓴다)이 있으니 다음 아들 한웅이 자주 한울 아래로 뜻하여 인간 세상을 탐내 찾거늘 아버님이 아들의 뜻을 아시고 삼위·태백(三危·太伯)[삼위는 구월산으로 태백은 백두산으로 인증(認證)한다]을 나려보시매『널리 인간을 유익케 할지라』[곧 홍익인간(弘益人間)함] 이에 한울보람-인 세개를 주시고 보내서 다스리게 하시다. 한웅님께서 무리 3천을 거느리시고 한배뫼 꼭대기-배달나무 아래에 나리시어 신시라 이르시니 이「이」가 곧 한웅천왕이시다. <중략>
《해동악부(海東樂府)》「태백단가 서(太白檀歌序)」에 이르되, 동녘나라에 처음은 임금님이 없더니「한얼사람」께서 그 무리 3천을 거느리시고 한배뫼 배달나무 아래에 나리시니 신시님으로 이른지라 세워서 임금을 삼으니 이「이」가 단군이 되시다. [단조사고 내편]
④대야발,『단기고사』
환씨전(桓氏典)에, 동방에 부여족이 태백산 부근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한인(桓因)은 관대하고 도량이 커서 가옥의 건축과 의복제도를 시작하고 아들 한웅(桓雄)을 낳으니, 그 뛰어난 모습을 호걸이라 했다.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사람을 널리 구제하시니, 풍백과 운사와 뇌공 등을 거느리고 천평(天坪)에 이르러 음식절차와 혼인규례를 창설하시고 천부경을 설교하시니, 사방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듣는 자가 많았다. [단전(檀典)]
⑤북애,『규원사화』
한큰주신(一大主神; 桓因)은 네 번째로 한웅천황에게 명을 내려 "이제 사람과 그 밖의 만물을 다 만들었으니, 수고하여 만든 것들을 아까워 하지 말고 무리를 이끌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 하늘을 이어받아 가르침을 세우고, 만세도록 후손의 모범이 되게 하라"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이것을 가지고 가서 천하에 펴라."했다.
한웅천황은 기쁘게 명을 받들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풍백과 우사와 운사 등 삼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 곧 백두산이다. 모든 무리들이 천황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초목이 돋아나고 금수가 생긴 후 또 십만년이 지났다. [조판기]
⑥계연수찬,『한단고기』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여, 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삼성기전하편, 태백일사 신시본기]
⑦이유립,『대배달민족사』
해학 선생이 가라사대 삼신 하느님께서 예지한 이를 내심은 그러므로 몸은 하느님을 대신 행하시며 입은 하느님을 대신 말씀하시어서 그 사람에게 명(敎命 가르침)하시느니라.
▲이유립이 가로되 이는 오로지 태백교(커발한) 도통의 말미암아 전하신 바를 직언 하심이니라.
한웅께옵서 조명(안파견[安巴堅] 한인[桓因]의 詔明)을 이어 하늘을 열으시사 글을 만들어 세상을 정하시고, 복희님은 비로소 여덟 괘를 끌어 셈을 가직근히 하여 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치우님은 땅을 개척하시고 회공천명(恢公闡明)하시어 사방으로 오는데 믿고 기쁘게 하시고, 단군 왕검님이 세한으로 토경(內土外境)을 관속(管屬·管束)하시여 대중(有衆)을 혜(惠化) 강(康濟)하게 하시었느니라.
▲한웅·치우·왕검이 모두 하늘로부터 좇아 내려오시사 천왕으로 일컬으시어 세계인물의 조종이 되시었느니라. 언약하지 않아도 민이 믿으며 두려웁게 아니 하여도 민이 복종하나니 널리 보람있게 행하므로 인간세상을 구해 내는데 마땅하시었느니라.
▲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지혜의 평등이 되어 세력을 고루히 하므로 민심을 얻나니 그때 덕화의 성대함을 가히 볼 것이다. 단군의 세상에 역년이 장구하여 세상을 인(仁)하고 수하는데로 오르게 한 까닭에 지나인들이 일찍이 군자의 죽지 않는 나라임을 일컬었나니 모두 실된 기록이니라. [정교증주 태백속경 14장]
⑧『신사기』
삼가 상고하건대, 가르치는 임자인 교화님은 한웅이시니, 한얼님으로서 사람이 되시사, 큰 도리를 세우시고 큰 교화를 베풀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감회시키시되, 한얼님 말씀을 널리 펴시사, 뭇사람들을 크게 가르치시니라. [교화기]
⑨강호석,『교리문답』
[문]「한배검」과 한얼의 관계는 어떠하십니까?
[답] 우리「한배검」은 본래 한얼로서 사람이 되시어「한울인」[천부인(天符印)]세계를 간직하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문]「한배검」께서 어느 때에 나리셨습니까?
[답] 지금[칠삼무진(七三戊辰)]부터 사천 삼백 여든 다섯해앞『첫갑자시월 초사흗날』[태원갑자시월삼일 (太元甲子十月三日)]에 나리셨습니다.
[문]「한배검」께서 나리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답]「한울뫼」[천산(天山)]위에 나리셨는데 그 이름은「강역고(彊域考)」에『불함(不咸)·개마(蓋馬)· 도태(徒太)·백산(白山)·백두(白頭)·태백(太白)·장백(長白)·걸민상견(歌爾民商堅)』의 여덟가지로 적혀있습니다. *「걸민상견」은 만주말에 제단(祭壇)임.
[문]「한배검」께서 인간에 나리신 뜻이 어디 있습니까?
[답] 한옛날에 인간이 늘어갈수록 나쁜 버릇이 많음을 근심하시어『인간을 크게 유익케 하려』 [홍익인간(弘益人間)]하심입니다.
[문]「한배검」께서 나리신 뒤에 인간은 어찌 되었습니까?
[답]「한울뫼」를 복판으로 하여「아홉겨레」[구족(九族)]가「삼천단부(三千團部)」로 모였습니다.
[문] 그럼「한배검」께서 나리신 뒤에야 우리 인간이 비로소「사람다움」을 얻은 것 아닙니까?
[답] 그러기에「한배검」께서 나리심은 우리 인간에 한울이 새로 열린 것이라하여「개천기원(開川紀元)」을 쓰는 것입니다.
개천절 노래
1.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첫댓글 뭐 이렇게 길어?
자세하게 조사했는뎅...
진짜 길다...^^ 힘들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