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여행 두 번째 이야기
타이베이에서 방콕까지, 하늘 위의 서장
— 구름의 바다를 건너, 낮달과 함께한 여정
여행은 때로 낯선 땅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우리에게 작은 깨달음을 안겨 준다.
뉴욕 JFK 공항을 떠나 긴 밤을 날아 도착한 타이베이 타오위안 국제공항. 방콕으로 향하는 다음 비행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미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터미널 2에서 터미널 1까지 이동하려면 셔틀버스나 스카이트레인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환승 시간이 빠듯한 터라 은근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막상 공항에 도착하니 예상과는 달랐다. 국제선 환승객을 위한 별도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니 불과 오 분 남짓 만에 방콕행 탑승구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와 직접 경험하는 현실은 때때로 이렇게 다르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세상의 온갖 질문에 답해 주는 시대이지만, 그 대답이 언제나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세상은 화면 속에서 배우는 것만큼이나 두 발로 직접 걸으며 확인해야 하는 곳인가 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시간은 약 세 시간 반. 장거리 비행에 비하면 그리 긴 여정이 아니기에 항공사에서 배정해 준 좌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뜻밖에도 창가 자리였다.
오랜만에 비행기 창밖의 세상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활주로에는 차이나항공 여객기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다른 항공기들도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단순히 사람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공항의 활주로와 건물들이 빠르게 작아지고, 도시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내 바다가 펼쳐졌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도로와 모래사장, 그 뒤편의 푸른 산들이 차례로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거대한 세상처럼 느껴졌던 도시가 어느새 손바닥만 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땅의 경계는 흐려지고, 하늘은 점점 넓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동행자를 만났다.
달이었다.
뉴욕을 떠나던 밤부터 하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을 그 달이, 이제는 타이베이에서 방콕으로 향하는 나의 창밖에 떠 있었다.
푸른 낮하늘에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둥근 달.
밤하늘에서 보던 달과는 사뭇 달랐다.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달이 아니라, 햇살 가득한 푸른 하늘에 조용히 걸려 있는 낮달이었다.
비행기 날개 너머로 달을 바라보았다.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가도 달은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지내던 벗처럼, 말없이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하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구름은 솜을 뜯어 놓은 듯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어떤 구름은 거대한 산맥처럼 겹겹이 이어졌다. 햇살이 비치는 곳은 눈부시게 하얗고, 그늘이 드리운 곳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언제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던 구름을, 이제는 창가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달라지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구름 아래에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터로 향하고, 누군가는 자식을 기다리며 저녁상을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하루의 고단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그저 고요했다.
문득 고향이 떠올랐다.
전남 나주 영산포, 어린 시절 뛰놀던 갯머리의 하늘에도 지금쯤 저 달이 떠 있을까.
어머니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저녁, 영산강 너머로 떠오르던 달이 생각났다. 그 시절에는 달이 왜 그토록 커 보였는지, 달빛 아래 고향의 들녘은 왜 그리도 포근했는지.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지만,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여전히 하늘에 떠 있다.
그 달을 이제는 먼 이국의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다니.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낯선 곳에서 문득 마주치는 달 하나가 마음을 어린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그때 구름 위로 둥근 빛의 테두리가 잠시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의 그림자 주변으로 무지개 같은 빛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햇빛과 구름이 빚어낸 작은 광학 현상이었으리라.
자연은 때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여행자에게 이런 선물을 건넨다.
창밖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무렵,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작은 식탁 위에 따뜻한 음식이 놓였다.
달걀 요리와 파스타, 채소, 샐러드와 빵, 과일과 요구르트까지. 뉴욕에서 출발할 때 먹었던 기내식과는 또 다른 구성과 맛이었다.
나는 접시를 하나씩 비워 나갔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면 환자의 식욕이 회복되는 모습을 반갑게 바라볼 때가 있다. 물론 식욕 하나만으로 건강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몸이 제 리듬을 되찾아 가는 작은 신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앞의 식사를 말끔히 비웠다.
뉴욕에서부터 이어진 긴 비행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아직 여행을 즐길 기운은 충분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식사를 점심이라 불러야 할까, 아침이라 불러야 할까.
뉴욕에서는 밤이었는데 아시아에 도착하니 낮이 되어 있었다. 몸속의 시계는 여전히 뉴욕에 머물러 있고, 창밖의 태양은 이미 아시아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고픈 시간도, 잠이 오는 시간도, 심지어 화장실을 찾는 습관마저 평소와 달라졌다.
시차란 단순히 시곗바늘을 몇 시간 앞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몸의 리듬을 새로운 땅의 시간에 천천히 맞추어 가는 과정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졸음이 밀려왔다.
따뜻한 음식을 먹은 뒤 찾아오는 나른함에 긴 여행의 피로까지 겹쳤을 것이다.
나는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떠 있었고, 하얀 구름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창문 가리개를 내렸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방콕에 곧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에 눈을 떴다.
창문 가리개를 올리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까까지 구름과 하늘뿐이던 창밖에 이제는 광활한 평야와 농경지가 나타났다. 크고 작은 수로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반듯하게 구획된 농토들이 바둑판처럼 이어졌다.
그런데 자세히 내려다보니 논밭 곳곳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흙빛을 머금은 물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뉴욕에 있을 때 태국의 집중호우와 홍수 소식을 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물이 최근 비로 인해 불어난 것인지, 원래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짓는 논이나 양식장인지는 하늘 위에서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에 잠긴 듯 보이는 들판을 바라보는 순간, 어린 시절 고향의 홍수가 떠올랐다.
장맛비가 며칠씩 쏟아지면 영산강의 물이 불어나고, 애써 가꾼 논밭이 흙탕물에 잠기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해 농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셨는지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에도 쉽게 빠지지 않던 물, 쓰러진 벼 포기들, 진흙 속에서 다시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시던 부모님의 모습.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낯선 나라의 들녘이 어느새 내 고향의 논밭으로 겹쳐졌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나라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비를 기다리고, 햇볕을 바라며, 가을이면 한 해의 수고가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마음.
부디 저 들판에도 큰 피해 없이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비행기가 조금 더 내려오자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
푸른 물결 위에 작은 화물선 한 척이 하얀 물길을 남기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한없이 작아 보였지만, 그 배에는 누군가의 노동과 기다림, 그리고 먼 나라로 보내는 물건들이 실려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요즘, 저 배가 아무런 방해 없이 목적지에 닿기를 바랐다.
사람들이 서로의 나라를 오가며 물건을 나누고, 문화를 배우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어쩌면 여행이 내게 가르쳐 주는 가장 소박한 소망인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는 어느새 방콕의 하늘을 낮게 날고 있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점점 커지고, 도로 위를 움직이는 자동차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활주로가 가까워졌다.
나는 착륙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예상보다 큰 충격과 진동이 전해졌다.
순간 휴대전화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사진은 놓쳤지만, 그 요란한 착륙 덕분에 방콕에 도착했다는 사실만큼은 온몸으로 실감했다.
잠시 후 비행기가 멈추었다.
길고 길었던 하늘의 여정이 끝나고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뉴욕에서는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지만, 이곳 방콕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공기는 덥게 느껴졌으나, 다행히 내가 체감하기에는 습기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시내에 있는 왓 포(Wat Pho)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낯선 거리와 건물들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리의 표지판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도시를 감싸고 있는 공기의 온도도 뉴욕과는 달랐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루가 이어지는 풍경만큼은 어디에서나 익숙했다.
이제 하늘의 이야기는 끝나고, 땅 위의 이야기가 시작될 차례였다.
타이베이에서 방콕까지 이어진 세 시간 반의 비행.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구름의 바다도 있었고, 푸른 낮하늘에 떠 있는 달도 있었으며, 고향의 들녘을 떠올리게 한 낯선 나라의 농토도 있었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일이지만, 때로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고향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뉴욕의 밤하늘에서 시작된 달과의 동행은 타이베이의 푸른 하늘을 지나 방콕에 이르렀다.
이제 그 달은 보이지 않지만, 창밖에서 만났던 고요한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달이 길을 함께해 주었고, 땅에서는 또 어떤 사람들과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기대를 안고, 나는 방콕의 첫 오후 속으로 들어섰다.
— 아시아 여행 두 번째 이야기, 타이베이에서 방콕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