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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영암의 인물⟩그리운 그 사람 박종대, 지워지지 않은 기억...고향을 지켜야지요, 영암지킴이는 숙명입니다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 곳에서 묵묵히 서 있는 한 구루 소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했다. 소나무를 보면 마을의 유래(由來)를 찾아볼 수가 있고, 마을 환경(環境)을 읽어볼 수가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생활풍습(生活風習)도 엿볼 수 있다.
마을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분을‘터줏대감’이라고 한다. 오랜 나무를‘당산(堂山)나무’라고 부른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당산나무처럼 사람도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오로지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는 분을‘터줏대감’이라고 붙여주며 살아있는 역사로 어께를 무겁게 한다.
마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 소나무는 허리도 다리도 팔도 온 몸이 꿋꿋하지 못하고 휘어졌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고풍스러움이 느껴진 운치난 소나무이다. 그 마을의 영혼은 당산나무이며, 당산나무의 신이 마을의 모든 소사를 살피면서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적절하게 불어준다. 당산나무로 신성시하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오랜 고목나무인 당산나무처럼, 마치 자신이 삼신할머니인양 마을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을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게 찾아볼 수가 있다.
토박이 마을 지킴이 박종대 전 군서면장이 마을을 지키는 소나무가 자신의 모습인양, 그는 소나무가 마을 터줏대감으로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지키며 서있듯이, 그도 고향을 지키는 진실한 한 구루의 굽은 소나무이다.
영암군서울사무소장, 군서면장, 영암읍장을 역임한 박종대 전 읍.면장은 전남 영암 군서(평리)가 고향이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나고 자라 고향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공무원 생활로 한 곳에서 인생 반세기 가까이 보냈다. 70세를 바라보는 그는“고향은 언제나 영원한 고향이다”라는 고향사랑에 빠지며 고향을 떠나지 않고 영암 터줏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가슴 뭉클한 존재이자 사랑과 헌신의 대명사이다. 신은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어머니를 대신 보냈다는 말이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신밖에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위대한 존재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절대적 존재이듯 마을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나 터줏대감도 그런 존재성을 띠고 있다.
나의 존재의 고향 그 근원에너지에 접속하고 나의 소망을 이루는 일, 마을 지키는 자에게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다.
“고향은 내 기억에서 존재하는 곳이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은 있다. 도시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랐든 첩첩산중 산골짜기에서 산토끼.다람쥐와 뛰어놀았든 모두에게 고향은 지문처럼 남는다. 행정가였던 박종대 전 면장에게도 고향은 특별하다.“아무리 고향에 태를 묻었다한들 고향의 귀신마저 되려하나 이 사람아!”친구들로부터“이젠 고향이 지긋지긋하지도 않는가, 여행도 다니고 다른 환경에도 접하며 여생을 보내거나”하는 농담도 섞인 핀잔을 받을 만큼 고향 영암을 그리워해왔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박종대 전 면장에게는 영암은 어떤 곳이기에 고향 사랑이 이리도 절절한 걸까?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고향이 좋기도 하지만 내가 고향을 위해 할 일이 있어서 고향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남들처럼 문화 환경이 잘 갖춘 혜택이 좋은 도시에서 살지 않고 있는 것은 고향 발전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집념이 생겨서 그랬다고 한다. 어머님 품 같은 고향은 나를 품고 있기에 나도 그 품속에 안겨 숨결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뛰는 심장소리에 나에게 전하는 전율이 내가 있어야할 곳은 이곳이구나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아 고향을 지킨다는 박종대 전 면장이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형제나 친구는 남아있어도 전 같지는 않다. 고향이 있어도 결국 철없이 살았던 어릴 적 그시기에 기억인 고향인거다. 현재의 영암은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다 변했다. 너무 달라진 고향은 엣 향수를 더 자극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고향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현지인, 인사이더
박종대 전 면장은 어딜 가나 항상‘인사이더(insider, 내부자)’라 한다. 행정가였던 내가 아웃사이더(outsider, 외부자)가 되면 고향을 사랑한다고 볼 수 없고, 고향 발전을 논할 수 없다고 본다. 이방인(異邦人, stranger) 정서보다‘현지인(現地人, native)’정서가 그에겐 잘 어울린다.
마을마다 이름 있고 산과 들, 논과 밭 그리고 골과 등성이마다 이름 있고 뜻이 있다. 선비들은 마을마다 좋은 이름 찾아내고, 일꾼들은 논과 밭의 들 이름을 지어내고, 아낙네들은 산과 들의 나물 뜯으면서 이름을 지어낸다. 또한 나무꾼들은 이산 저산 이 골짝 저 골짝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면서 이름을 지어내고, 옛사람들 거쳐 간 곳마다 이름이 없는 없고 뜻이 담겨져 있으니, 봄이면 벚꽃.살구꽃 곱게 피는 향기로운 고향마을, 그리움에 아름다운 옛 이름, 철마다 곱고 고운 꽃피워 주면 옛 마을 이름 따라 그립고, 마을 사람들 땅이름에 정들고, 바빠 살아가는 요즈음 옛 정취는 사라져도 이름만은 옛날 그대로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박종대' 빛내겠다
박종대 전 면장은 고향의 환경은 나날이 변해도 마을 이름은 변하지 않기에 그도 부모가 지어준 이름‘박.종.대’라는 이름을 마을이름이 그러하듯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의 이름을 빛내려고 노력한다. 그렇듯 자신이 태어난 영암군과 군서면과 마을 평리라는 이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어디 가서든 내가 태어난 고향, 내가 자랐던 고장, 내 태(胎)가 묻어진 마을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토리를 엮어내고 풀어낸다.
박종대 전 군서면장은 영암읍장도 했다. 그는 영암군서울사무소 초대 소장을 했던 장본이다. 그는 그런 화려한 경륜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고향을 지키고 있고 고향을 알리고 있다.
영암군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박종대 전 면장은‘고향에 남아있는 우리들이 과연 고향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가?’그는 스스로 반문한다.
고향을 떠난 분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올 때까지 고향을 잘 가꾸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어쩌다 도시로 나가 살지 못하고 고향에 태(胎)를 묻고 오도 가도 못하고 눌러앉아 버린 것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으로 칭송받게 되다니 하고 그는 여러 번 고개를 젓는다.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략 두 가리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진취력(進就力)과 적응력(適應力)이 없어 낯선 곳의 두려움에 외지(外地)에서는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고향에 눌려 앉아 있는 형태요, 다른 하나는 조상들 덕에 밥술은 먹으나 굳이 낯선 타지에서 모험과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며, 개척과 변화보다는 전통과 안정을 추구해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타향인 외지에 나가 있는 분들은 용기와 진취력이 있고 능력과 자신감이 있어 도시로 진출했다는 해석도 나올만하다.
영암지형의 풍수설(風水說)로는 초년에 고향을 떠난 사람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운세이고, 영암의 부자는 삼대(三代)를 거느리지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는데 정말 그런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고향이 아름답고 그립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내 고향 영암은 정말 아름답고 포근하고 정겨운 곳이다.
박종대 전 면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영산강에는 조깃배들이 개매기를 하였고, 양지 바른 마을에서 병풍같이 둘러싸인 월출산의 기암괴석 사이로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월출산의 서릿발 같은 정기(精氣)에 영암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웃어른들의 말씀에 어떤 큰 인물이 날 것인가 하고 꿈을 꾸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고향은 영암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왔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영산강은 농토로 변했고, 없던 도로가 새로 생겨나고, 마을마다 농사로 인한 축사나 원예시설이 생겨나는 등 영암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영암군의 숙원이었던 국립종자원도 건립하고, 금정면 활성산에는 옛 서광목장에 골프장이 들어서고, 심지어 이곳에는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서있다. 영암은 영암읍에서 목포로 가는 지방도 819호선 도로에는 벚나무가 조성되어있는 데 벚나무 주변에는 국회의원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낭산 김준연 선생, 가야금 창조자 김창조 선생, 대한민국 국수 1호 조훈현 국수 등 여러 기념관과 대한민국 국민가수이자 트로트여왕 하춘화 가수 트로트가요센터(박물관)가 들어서 있다.
특히 영암이 사통팔달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한 곳이라고 할 만큼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져있는 고장이다.
고향 파수꾼...고향지킴이로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되어가는 고장을 보노라면 가슴이 뿌듯하고 대견함을 느끼면서 고향의 추억거리 하나하나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 영암 인구가 이제 6만을 밑돌고 있고, 아는 얼굴이 하나 둘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고 서글픈 느낌을 받는 것은 역시 나이를 먹었다는 징조일 것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많이 든다는 박종대 전 면장은 고향지킴이 나섰다.
영암은 나름대로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타 지역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다. 앞으로 더 지금의 모습을 더 낫게 하거나 새로 만들어낼 일들이 많다. 행어 영암이 시대에 부흥하지 못해 희망을 잃을까봐 걱정되는가하면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 될까봐 밤잠을 설친다는 박종대 전 면장은 고심에 빠졌다.
사재를 털어가며 고향 일에 발 벗고 나섰던 선배님들, 김삿갓을 찾아내려고 전국을 헤매던 분들, 왕인 박사 국내 행적과 일본 행적을 정립시키고자 역사기록서적을 뒤적이며 이론을 정립했던 분들, 장흥.강진.해남으로 가는 도로가 어디로 통과해야지 그리 가면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지르던 애향 열성파들, 어쩌면 이런 분들이 진정 고향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온 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그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타계하시고 우리 세대가 영암을 지키는 원로로 남아 있기에 더욱 책임을 느끼면서 맡은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란 어떤 특정인들이 아닌 고향에 서는 모든 분들을 총칭하는 것이며, 자기 생업에 충실하며 내 고장 발전을 위하여 진정한 마음으로 협조하는 분, 다시 말하면 고향을 빛낸 사람들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못한 평범한 우리 서민들 전체라는 것이다.
영암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하는 박종대 전 면장,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어릴 때부터 성인되고 중년이 되도록“고향이 좋아 영암이 더 좋아”하며 고향에 머물고 있다.
월출산 산행 때 들른 고향, 황금빛으로 가을이 익어가는 고향은 거기엔 철없이 어릴 적의 희망과 청춘, 고뇌와 추억들이 수없이 어려 있는 곳, 구겨진 넥타이와 바지 같은 꼬부랑 가을 들판과 도랑 길 따라 한창 가을걷이로 바쁜 정겨운 결실의 황금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숨바꼭질하던 동네 골목마다 노란 감과 빨간 홍시가 마치 소싯적 운동회 줄다리기나 어께동무 친구처럼 주렁주렁 열리고 있었다.
가끔 월출산 가을풍경을 보기 위해 10월이 되면 찾아보곤 하던 고향 영암, 고향을 갈 때면 늘 교훈과 설렘이 앞선다. 왜냐하면 10월의 고향은 씨 뿌려 거두는 농심의 철학과 결실은 곧 노력의 결과라는 알찬 교훈이 늘 상존하는 현장이요, 고향은 늘 자기 정화를 위한 삶의 밑거름이요, 행복의 중요한 나침반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 장년 세대에게는 고향과 어머니는 이 험한 세상,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장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마지막 원천이 아닐까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고향의 현상은 어떤가?
마을과 들판, 심지어 산속까지 곳곳에 농막이라는 이유로 온통 컨테이너 천국이다. 지상천국은 옛 시골풍경이 아닌 현대판 컨테이너 같은 흉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향을 찍은 항공촬영에서 보여준 사진들을 보면 온통 현대식 건물들이 옛 풍경을 밀어내고 차지한다. 컨테이너 시설 같은 중축시설은 대부분이 행정력이 못 미치는 불법이다. 고향 산천 곳곳에 흉한 불법 축사의 악취와 전원주택 단지나 별장과 공장, 매너 없는 귀촌인과 귀농인 등 무분별한 개발과 침입으로 옛 고향 정취의 상징이었던 고향의 맛과 멋이 이미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이런 상황은 영암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국이 다 난립하고 있어 전통적인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남을 만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고향의 오랜 전통과 정서와 경로우대와 고향사랑 정신 등 농촌의 생활방식을 완전 무시하고, 논밭의 농작물을 제 멋 되로 뽑아가고, 마을 일에 나 몰라라 하는 귀농 및 귀촌 인들의 밤낮 없는 심각한 작태와 현지 주민과의 갈등도 문제다. 꼭 외지인들이 들어와 그런 것만이 아닌 것 같다. 토박이들도 한목을 하고 있고 더 부추기고 있다. 고향이 온통 심한 중증의 몸살을 앓고 있는 셈이다. 우리들의 고향, 현재진행형의 자연생태계와 고향 풍속도가 빛의 속도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곧 다가올 선거철에는 또 어떤 공약들로 고향 어른들의 마음을 흔들까 걱정된다. 고향의 맛과 멋이 늘 함께 있던 고향 풍경이 더욱 그리워지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필자의 고향도 마찬가지다. 영암 군서 해창리도 전통이라고는 옛 정취보다 근래에 이루어진 건물들이 난립하게 느껴질 정도로 혼란스럽고 서글픔마저 든다. 영산강을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강과 산 사이에 걸쳐진 동네, 살기 좋은 아늑한 지역, 80호 이상 될 정도로 집성촌을 이룬 옹기종기 사는 곳, 평균연령이 70세 이상이다.
지난 시대의 농어촌 탁상공론 정책들이 증오스럽다. 아쉽고 개탄스럽다. 정부와 지자체의 어이없는 각종 정책과 작태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참 어이가 없다. 어이는 맷돌 손잡이다. 이미 어이가 사라지는 고향의 현실은 한평생 고향을 지키고 있는 어른들만 알 것이다.
아직도 고향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 무척 다행이다. 필자의 고향 군서면에는 우뚝 서 있는 월출산 자락인 문필봉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사시사철, 사방팔방으로 농심을 지키는 파수꾼이요, 농민의 소득증대와 미래 영암에 이르기까지 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진정한 영암지킴이 박종대 전 면장이 있다. 그는 영암군청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면서 영암군을 대표하는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의 파견 공무원인 영암군서울사무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을 받아 김철호 군수시절과 김일태 군수 시절에 거쳐 영암의 홍보와 중앙과 군과의 일을 원활하게 역할을 해줬다. 그런 그는 소장의 임무를 끝내고 영암에 내려가 군청에 있으면서 영암읍장과 군서면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서면장을 끝으로 모든 공직생활을 마치고 자연인으로서 나름의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는 이젠 영암군 발전을 위해서 또 다른 꿈을 꾼다. 영암이 바로서고 영암이 더 위대해 지도록 하기 위한 생각을 키우고 있다. 그는 이젠 행정의 달인 공무원이 아닌 정치의 달인‘정치가’로서 고향발전의 리더로 나서고자 한다. 그는 오늘도 농심의 견인차 역할을 크게 하고자 농심을 불태우고 있다. 그의 고향 사랑은 고향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 자연생태계를 24시간 지키고 있는 유일한 파수꾼이다.
종대가 곧 농심
종대(鍾大)는 곧 농심(農心)과 화합(和合)의 상징이다. 발전과 번영의 배터리다. 안정과 평화의 지름길이다. 고향 영암은 면적 612.5K㎡로 행정구분은 2읍과 9면, 121개 법정리, 395개 행정리와 725반으로 되어있다. 인구는 27,372세대 54,383명(2020 2월말 기준)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역과 연령, 학력, 남녀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어쩜 고향의 지킴이 박종대가 고향정신과 향토문화를 계승하고 꽃피우는 진정한 촛불정신의 나침반이 아닐까싶다.
늘 가을 고구마처럼 이웃사촌끼리 모여 나누어 먹었던 넉넉한 인심이 있던 고향, 우리가 돌아갈 수구초심(首丘初心) 같은 고향을 이제 우리의 고향은 누가 지킬 것인가? 바로 박종대 전 면장이 아닌가한다.
박종대 전 읍.면장은 서울소장으로 있으면서 영암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출향 인들이 고향을 잊지 않도록 더 애정을 갖게 그는 가교역할을 띠며 고향의 소식을 전하고 타향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고향 영암에 알리는 등의 중간자 역할로 소임을 다했다. 그는 소장을 마치고 다시 군청에 근무하면서 영암 발전을 위해 행정에 소홀함이 없이 열심히 뛰었다.
그는 군서면장에서 영암읍장, 다시 군서면장으로 있으면서 주민들과의 소통하는 등의 현장행정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했고 주민들의 삶을 더 유익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쩜“지역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는 오로지 평생 고향에 주소를 두고 살면서 고향의 미래를 걱정하며 발전을 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 정신은 멈추지 않고 있으며 아마 그는 보여주지 않았던 뭔가를 분명코 감동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꿈꾸는 자는 아름답다. 박종대의 꿈은 영원하다.”
마치 자신의 슬로건인양 그는 꿈꾸는 박종대로 매사 열심히 임한다. 고향 분들에게 희망이 되고자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박종대’를 두고 삼행시로
▶박-박력(迫力)있게 나아겠습니다. 보다 더 위대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종-종결(終結)답게 이루겠습니다. 훨씬 더 아름답게 그려내 보이겠습니다.
▶대-대단(大壇)하게 펼치겠습니다. 무지 더 훌륭하게 담아내 보이겠습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박종대 전 면장은 영암지킴이로서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는 이 시대를 이끄는, 이 시대의 인물‘영암人’이라는 이름으로 영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영암 사회와 세상을 그려내고자 그는 꿈꾸는 아이처럼 꿈동이가 된다. 영암의‘꿈발전소’하면 박종대라는 수식어가 붙도록 그는“뜻은 높고 꿈은 원대하게, 현실은 냉혹하게 그리고 당당히 나서자”며 강한 의지로 불태우면서 희망을 키우고 있다. 박 전 면장은“꿈이란 꿈꾸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라는 신념으로 그는 꿈이란 꿈꾸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고 믿고,‘붕몽의생(鵬夢蟻生)’이라는 말처럼 꿈은 붕새처럼 원대하게, 활동은 개미처럼 원대한 꿈을 이루어보고자 노력한다.
그에게는 삶의 철학이 있다. 중학 때부터 좋아하는 말이다. 실천철학으로‘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하자. 지금 내가 할 일이면 더 잘 하자’그는 이런 철학을 고수한다.
그리고 성경구절 중 제일 좋아하는 말은“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다. 그는 이 말을 신조로 삼고 있다. 어린 시절의 독서는 그의 인생에 영향이 컸다. 동화책은 아이디어를 주었고, 위인전은 큰 사람을 만들게 도와주었다.
토박이 나무, 소나무처럼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고 싶다는 그는 환경을 극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들 모두를 존경한다. 특히 설리번 선생님, 세종대왕, 이순신, 김구 선생님을 존경한다. 물론 영암의 대표적인 인물인 왕인 박사나 도선국사와 최지몽 선생도 추앙한다. 사실은 사람 모두가 존경스럽다고 말하는 그다.
그의 나이 60대 중반에 들어서며 그는 인생 2모작을 이루고자 꿈꾸고 있다. 벼는 모판에서 길러서 논에 심어진다. 한 포기 한 포기 심어진 어린 벼는 자라서 낱알을 맺어 황금들판을 만들고, 노랗게 익어진 벼는 농민의 손에 의해 수확으로 쌀을 만들어낸다. 박종대의 농심은 그런 벼처럼 푸른 들판과 황금들판과 차곡차곡 쌓인 곡식창고와 흰쌀밥이 놓여 진 풍성한 행복식탁으로 그려지기를 영암의 진정한 일꾼이 되고자 농부가를 부르고 있다.
그가 부른 농부가에는 어떤 가사가 쓰여 질지, 영암에서 또 다른 제2의 인생길을 행정(行政)에서‘정치(政治)’로 걸어볼 생각이라니, 박종대 전 면장의 빛날 횡보가 궁금해질 정도로 그의 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낭산 김준연 선생 못지 않는 정치가 기대
그는 일본 도쿄대학을 거쳐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정치와 법학을 연구한 이후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낸 일제감정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초대국회의원,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했던 애국지사로서 조국의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낭산 김준연 선생 못지않은 영암의 정치가로서 기대가 된다.
영암의 푸른 솔, 소나무는 굽었지만 어떠한 모진풍파에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서며, 마을을 지키고 있는 내공이 쌓여진 나무다. 역사를 간직한 소나무이기에 그는 마을을 지키는 소나무처럼 영암의 역사를 대변하고 영암의 군민, 면민, 마을주민들의 삶을 보듬어주는 정자인 소나무가 수호신(守護神)으로서 상징성(象徵性)으로서 역할을 띠듯이 그도 소나무처럼‘늘 푸른 소나무 박종대’란 타이틀을 내걸고 당당하고 의젓하게 서려한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늘 푸른 소나무 박종대를 기억해달라고, 소나무예찬에 그를 끼워놓았다. 그는 또 진정한 고향지킴이, 월출산‘큰바위얼굴’은 나다하며 근엄한 자태로 그려내 보이고 있다.
박종대 전 면장은‘인사가 만사’라는 신문보도에 따르면 전동평 군수는 인사에서 일 중심을 기준으로 반영한 부분을 꼽기를 박종대 신임 군서면장을 들었다. 박 면장은 군서면장(2014.7.1~2015.6.30)으로 있었다가 영암읍장(2015.7.1~2015.12.31)으로 온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다시 군서면장(2016.1.1~2016.12.31)으로 발령했다고 했다.
국립종자원 유치 기여
박종대 군서면장이 2015년 영암군의 가장 큰 사업이었던‘국립종자원’유치 당시 민원해결 노력이라든지, 굉장히 열심히 활약하는 등 많은 부분을 담당하셨다고 했다. 2016년부터 실질적으로 국립종자원과 관련된 일들이 많을 것이라 판단하고, 박종대 면장이 이 부분에서 가장 일을 잘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전 군수는 2016년은 민선6기의 골든타임이라며 그래서 올해 결정된 사업들이 계획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일 중심의 인사를 단행하게 됐다고 했다. 전동평 군수는 인사에서 노력하며 능력을 발휘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인사시스템으로 공직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할 계획이었다.
공직사회에 자율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실과장 중심으로 책임행정을 구현하면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능력 있는 공직자들이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 수 있도록 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에 박종대 면장 같은 공직자들 중 엘리트들이 많아 이들이 실력 발휘를 충분히 하도록 때로는 고속 승진도 해줄 것이고, 동기부여에도 충실히 접근해 실력 있는 공무원들이 책임성을 가지고 일을 잘 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전 군수의 인사원칙에 박종대 면장은 전 군수가 꼽은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서의 인사배경에 본보기가 됐다.
전 군수는“지방자치경쟁력에서 전국 2위, 군 단위에서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군수가 잘해서가 아니라, 바로 영암의 변화에 비전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면서“영암군 전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물적 자원’과 유능한‘인적 자원’에 그 가능성을 높게 봤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영암의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서는 박종대 면장을 들었다. 그런 분들에 의해 영암군의 지방자치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영암의 인적 자원에 있어서 크게 기여를 한 인물에는 박종대 전 면장을 꼽을 수가 있고, 그를 영암군 참된 공무원상의 본보기로 삼았다. 군민들은 그를 영암의 참된 일꾼으로 여긴다.
박종대 전 면장은 소통의 현장행정으로 주민들과 가까이 하면서 의견을 수렴하고 숙원 사업을 해결해주는 등의 주민이 주인이라는 신념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그는 늘 주민들과 의논하면서 함께 일을 보려고 한, 한 시대를 밝게 연 진정한 지역일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국무총리상인 모범공무원상 수상
박종대 전 면장은 영암군서울사무소장을 부임하여 2008년 1월에 국무총리상인‘모범공무원상’을 수상했다.
그는 서울사무소장으로 부임해 영암군이 첫 서울 지역에 파견한 공무원으로서 영암군행정이 전혀 미치지 못한 낮선 땅에 맨땅에 헤딩하듯이 영암의 지평을 넓이는 등의 개척하겠다는 정신으로 지방공무원의 새로운 업무영역을 개척하고, 중앙의 각 부처를 방문하여 영암의 인지도를 높이고, 중앙부처의 현안업무 신속파악, 각종 예산 확보 등 주요 사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또한 영암군에서 생산하는 각종 농특산물 등 지역특산물 판매촉진이 이루어지도록 시장개척에도 힘써왔던 공로로 인정을 받아 정부로부터 국무총리상인 모범공무원상을 수여했다.
그는 공직자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민원 위주의 행정추진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그의 헌신적인 열정은 룰 모델이 될 만큼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샀고 타의 귀감이 됐다.
박종대 전 면장은 소장시절‘영공회(靈公會)’란 재경 영암출신 중앙부처 공직자 모임을 결성하여 매년 3회 이상 서울에서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영암군 현안사업 및 홍보활동에 기여했었다.
전국기초자치단체 서울사무소연합회 초대회장 역임
박종대 전 면장은 이외에도 영암군서울사무소장으로 있으면서 본인의 명예와 위상을 드높이는‘전국기초자치단체 서울사무소연합회’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전국 서울사무소 근무자 상호간의 상부상조와 친목을 도모하고 기초자치단체 서울사무소의 활성화를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전국기초자치단체 서울사무소연합회’초대회장을 하면서 자신의 입지는 물론 대외활동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바가 있다.
초대 소장으로는 영암군 사업 개진과 홍보 그리고 예산 확보 등을 추진하는 데 어떠한 축적된 지식과 자료가 많지 않을 정도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만 되는 상황인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향우들이 아니면 쉽게 중앙부처 관계자들과 만남이 어려웠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 열약한 환경에서 뛰어만했던 박종대 초대 소장은 그럴수록 강한 의지로 영암군을 반드시 알리려고 애를 썼다. 영암군에 많은 애정을 보이도록 영암군 홍보와 함께 확보 및 유치 사업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등 종로에 영암 배나무 한 구루 심겠다는 심정으로 헌신했다.
접근하기 어려운 비포장도로를 신속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아스팔트도로 만들어낸 진정한 영암건설에 이바지한 박종대 소장이었다. 영암의 이미지를 서울에 심어주는 일은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했어야했다. 지성감천(至誠感天),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고 했듯이 그의 정성에 어둡던 하늘은 밝아졌고, 생명수 같은 물길은 영암으로 흘러내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천지 개척자
그런 그를 두고 영암의 식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서울 땅에 영암의 식물을 심는‘프론티어(신천지) 개척자’라고 불릴 정도로, 불모지를 황금으로 바꾼 열심히 뛰었던 독특한 시각과 통찰력으로 개척한,‘개척자 박종대’소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로 인해‘영암건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영암이 전국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가장 경쟁력과 영향력을 갖춘 채 어께를 나란히 하며 대열에 우뚝 서게 된 것도 또한 그가 그 분야의 리더로 급부상한 것도 그런 신천지 개척 덕이다. 그는 낮선 타향에서 영암군 공무원으로서 대표하며 일을 추진하는 파견소장의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박종대 자신만의 정치적 플랫폼 구축, 즉‘리브 Next’를 출시해 새로운 영암정치 운영체계를 만들어 보이려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이시대의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한다.
박종대 전 면장은 순천농업전문대를 나와 동신대학교 행정학과에 편입하여 졸업 후 영암군 주민자치, 영암군서울사무소장, 주민생활지원 행정담당, 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을 역임한 후 군서면장으로 발령받아 영암읍장을 거쳐 다시 군서면장을 끝으로 30여 간의 공직생활을 모두 마치면서 영예스러운 모범공무원상으로서 족적을 남겼다. 전동평 군수가 일의 성과를 크게 낼 정도로 전문성을 잘 갖춘 엘리트적인 인물로서의 인정을 할 만큼, 소명의식과 책임감으로 담당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특출한 행정실적을 거두는 등의 업무가 탁월하고 인품이 훌륭한 참된 공무원다운, 성실한 인물로서의 모범적인 공무원상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명예로운 퇴직을 했다.
종대바람...대청마루에 스치다
종대바람,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박종대 전 면장은 종대바람은 삶의 에너지를 불어주는‘종일 부는 바람’으로 그 바람은 봄날 살랑살랑 부는‘샛바람(높새바람)’이요, 여름날 솔솔 부는‘맞바람(마파람)’이요, 가을날 서늘서늘 부는‘하늬바람(갈바람)’이요, 겨울날 사각사각 부는‘뒤바람 혹은 된바람 또는 높바람’이다 라며 축복의 땅, 영암의 자연 환경에서 만들어진 계절을 느낄 수 있는 계절마다‘대청마루’에 스치는 바람(상생의 기운)이 되고 싶다고 했다. 대청마루는 영암가족인 전지역의 모든 마을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담소도 나누고 음식도 즐기고 쉬기도 하는 편안한 삶을 보내는 대청마루(영암군)이며, 이곳에서 앉아 고향의 내음(情.愛.安.健.壽.福.康.寧.富)을 느껴보게 하겠다는 종일 부는 대청바람, 종대바람이다.
정자나무는 나의 분신
박종대 전 면장이 영암읍장보다 군서면장을 더 선호할 만큼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이웃 월곡리(월산마을)에는 천년 가까이 수령을 한 느티나무가 있다. 이 가을 곱게 물든 느티나무를 눈 시리도록 바라볼 지면 우리의 마음도 저렇게 곱게 채색되었으면 싶어 한다, 지방도 819호선 큰 길 옆에 가을이 환하게 펼쳐있다. 느티나무 정자에 여름내 입고 있던 짙푸른 녹색 옷을 가을이 되자 저마다 화려한 옷으로 바꾸어 입고 치장하고 나왔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다. 빨강.꽃자주.연노랑.갈색.황금색과 아직 물들지 않은 초록.연두색으로 가지가지의 천연색을 한 온갖 색채의 향연이다. 한껏 치장한 색채의 마술이 황홀하다. 설악산 단풍이 곱다고, 내장산 단풍이 화려하다고 달려들 가지만 나는 바로 옆 동네 도로가에 있는 느티나무 가을잔치에 초대되었다. 이 정자나무가 멋진 풍경을 이룬 날, 삼삼오오 그 나무 밑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정겹고 화려한 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박종대 전 면장은 세상의 어떤 화가인들 저리도 곱고 화려한 색채를 재현해낼 수 있을까, 지난봄에 연두색 싹을 틔워 그 청순함이 마음이 빼앗더니 이제 곱게 화장한 모습으로 또 한 번 눈길을 사로잡는다고 분신 같은 군서면의 자연을 예찬했다.
또한 지방도 819호선을 끼고 있는 군서에는 벚꽃나무가 봄에는 화사한 꽃으로 눈을 황홀하게 하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으로 운치를 더해주는 등 끝이 보이지 않는 가로수 길이 미인대회라도 여는 듯 같은 길에 서 있는데도 같은 색깔의 나무가 하나도 없이 저마다의 개성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군서의 나무들은 청명한 햇살을 받아 색은 더 곱고 현란하다. 사람의 노년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걸까?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중후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여기뿐인가 이맘때면 온 나라가 만산홍엽에 금수강산이 된다. 영암 월출산, 영암 곳곳도 그렇다. 우리의 가을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이 계절을 한껏 가슴에 들여놓을 일이다.“영암은 더 그러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박종대 전 면장은 자신한다.
비바람을 이겨냈고 올여름의 더위는 얼마나 혹독했던가? 셀 수 없이 많은 잎을 거느리며 모든 고난을 겪어 내고 저렇듯 당당한 모습으로 도영해 있는 나무들의 위용이 대견스럽다.
"마을을 지키는 정자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소나무, 느티나무 등 정자나무는‘장수목(長壽木)’으로 천년을 사는 나무다. 넓은 품속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아늑한 품 안은 뙤약볕 농사에 지친 농사꾼들의 안식처이며,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회의 장소요, 광장이 되기도 한다. 노인들의 쉼터로, 아이들의 놀이터로 늘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함께 살아온 정겨운 나무이기에‘나무의 황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박종대 전 면장도 마을을 지키는 정자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이므로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 를 나타냈으며, 비바람, 눈보라의 역경 속에서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굳은 절개, 강인한 의지, 씩씩한 기개, 꿋꿋한 지조, 깨끗한 순결, 정성된 성실, 활기찬 생명' 그리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 를 상징한다. 옛날 식자층에서는 소나무를 정개의 표상으로 삼아, 율곡 이이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송(松).죽(竹).매(梅)로 꼽았다. 박종대 전 면장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으며 낙낙장송을 한 소나무를 자신의 벗과 모델로 삼고자 한다.
꽃면장-꽃님군서
그는 면장시절 '꽃면장' 이라고 별칭을 붙여줄 만큼 군서 구림천 주변 자전거도로를 따라 왕복 5K㎡와 유휴 짜투리 땅 5천 평에 코스모스 산책길을 조성하거나, 회사정이 있는 뜰에 꽃무릇을 심어 꽃길 조성으로 지나가는 분들에게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하도록 식물과 교감하며 피로감과 우울감과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등의 군서가 삶의 정서를 가꾸고 힐링과 치유를 하는 아름다운 매력의 고장, '꽃님군서' 가 되게 했다.
역사와 문화의 발상지 유서 깊은 영암, 인물도 훌륭하다
영암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선사시대부터 영암은 인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으며, 사람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고 꿈과 희망을 키웠다. 마한시대의 토대가 되고 번영을 기했던 발전소 같은 곳이었다. 영암의 문화는 찬란하다. 고거에는 영앙은 영암군 군서면에 위치한 덕진포와 상대포 지역이 백제 및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었다. 영산강으로 연결되어 배를 통한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 백제 때는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했다. 상대포는 백제의 근초고왕 및 근구수왕 시기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비롯한 학문을 전파하였다. 영암은 월출산의 정기를 입어 이곳으로부터 타 지역으로 전파를 시키는 등의 서남해 지역의 문화발상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고장으로서 영암은 사람들이 기운차있다. 강한 의지력을 갖춘 채 세상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뛰어나다.
영암군서울사무소장, 군서면장, 영암읍장으로 기억
그리운 고향, 기억에 남은 일들, 그 하나를 꺼낸다면‘영암인(靈岩人)’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움이 남는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그 사람, 바로 박종대 전 면장이다. 박종대하면 기억나는 것은 천리 길 한양 땅이었던 서울의 허허벌판을 개척했던‘영암군서울사무소장’과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고향 발전을 위해 전력가로 나선‘군서면장’그리고 영암의 가장 중심도시인 영암읍을 엣 영화를 다시 재현시켜 영암에서 가장 위대한 핵심도시로 만들려고 읍성에 들어선‘영암읍장’을 역임한 일과 그는 다시 태어난 군서로 가 면장을 하면서‘국립종자원’을 고장에 건립한 애향심 등이 그의 훌륭한 업적으로 기억되고, 그를 행정의 달인으로서 뛰어난 행정가(行政家)로 인식됨이다.
국가관과 사명감 그리고 책임의식 강한
청백리 관료 박종대
필자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는 데 남들은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들도 저처럼 열심히 일했던 확고한 국가관(國家觀)과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갖춘 책임의식(責任意識)으로 공직수행을 한 참되고 성실한 공무원, 진정한 일꾼으로 기억하지 않을까한다.
박종대 전 면장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국가관을 가진 애국가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자나 깨나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용모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는 사람 그리고 각 구성원과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고 서로 간에 신뢰를 구축하여 모두를 포용하는 넓은 포용력과 친화력을 발휘하여 국가가 국민이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만든 사람으로 평가된다. 또한 '청백리(淸白吏)' 라고 여길 만큼 그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 근검(勤儉), 도덕(道德), 경효(敬孝), 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 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군청과 읍면 및 기관 등 관료들에게 청백함이 뛰어난 영암군에서 뽑은 관직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사명감과 국가관을 몸에 익히고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들려고 하는 훌륭한 위인으로 보기에 그런 인생관이 뚜렷하고 시대를 빛낸, 고장을 자랑스럽고 명예스럽게 한,‘박.종.대’라는 이름 석 자가 우리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생활신조
박종대 전 면장은 대학(大學)에 나오는‘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자신의 신조로 삼고 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의 공자가 말한 명언으로,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 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을 줄여‘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한다.
박종대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 먼저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있다. 그런 후에 집안이 가지련해진다는 것을 알고, 집안을 가지련하고 반듯하게 한다. 그러렇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본다. 집안을 가지런히 한 후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그러면 곧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믿고,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아 실천하고 있는 박종대 전 면장이다. 평천하를 위해서는‘치국(治國)’을 해야 하고, 치국을 위해서는‘제가(齊家)’를 해야 하고, 제가를 위해서는‘수신(修身)’을 해야 한다 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천하를 평정하려는 자는 우선 자신부터 갈고 닦아야한다. 즉 자신의 심기체(心氣體)를 갈고 닦아야 가정을 정갈히 할 수 있고, 나아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평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으며, 큰일은 작은 일을 돌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박종대 전 면장은 이런 정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여‘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루려고,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그런 후 집안을 다스리고 나서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겠다는 정의에 불타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