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말, 로마제국이 몰락하자
800년 그리스도교 왕권은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으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전쟁(1095-1291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서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교황권의 약화와 중앙집권적인
왕권국가들의 전개로 이어지고
몽고를 통해서 들어온 흑사병의 유행(1346-1350년)으로
유럽 인구는 1/3이 줄어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중세 유럽은 암흑기로 표현된다.
빛은 무엇이었고
그 빛을 가려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아가 그 어두움의 한가운데에서
빛을 밝힌 이들은 누구였을까?
역설적으로 중세는
비로소 영성에 눈을 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영국과 동유럽까지 전파되었고
수도원들은 복음대로 사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신앙은 생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전쟁으로
남자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여성들이 생산활동에 참여하면서
형성된 평신도 여성들이 모인 ‘베긴’과
여성 신비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베긴(Begijn)은 “기도하다”는 플랑드르어 표현으로,
처녀, 동정녀를 뜻하는 라틴어 Virgo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2세기 라인강변의 빙엔에 살았던
신비가 힐데가르트의 영향이 강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베긴은 독신으로서 경제활동(수공업)을 통해
개인재산을 가진 도시의 평신도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자율적인 결사체로 시작되었다.
제도교회의 형식과 규칙, 나아가 보호를 넘어서
복음에서 영감을 받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종신제가 아닌 입회와 탈퇴가 자유로운
평신도 공동체가 곳곳에 만들어졌다.
12-14세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170여 개의 단체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독일의 쾰른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 1만 5,000명 가운데
10%가 넘는 2,000여 명이
베긴회 소속이었다는 놀라운 기록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과 고통을 따르며
정결과 청빈의 금욕주의적인 삶을 지향했다.
또 사도적 전통을 이어
비정형의 자유로운 가족 형태를 추구하고
이분법적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아가서의 신비적 합일 (결혼)을 모델로
“속죄와 정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
신비체험, 신성에 참여, 일치, 우주적 합일,
영적인 삶”의 전 과정을
여성의 경험을 토대로 이해하였는데,
이 모델의 여성적 경향은
인간 영혼의 여성성을 바탕으로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내적 고통은 영적 체험을 통해서
내밀화되는 과정에서 신비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관상과 활동이 일치하는 삶을 이루었다.
그들은 성체공경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갈망하고
그 신비체험을 토대로 자국의 언어로 작품을 저술하였다.
각 지역에서 영적인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영어 불어 독일어 플랑드르어 등
자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남겼다.
같은 시기에 영국 노르위치에서
신비가, 동정녀로 알려진
줄리안(율리안나.1343-1416년)을 찾아볼 수 있다.
14세기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도시였던
노리치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노리치의 줄리안(1342~1416)은 일찍이
캐로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으며,
중세 여성들이 흔히 사용했던 ‘줄리안’이라는
그녀의 이름도 훗날 노리치의 성 율리안나 성당에서
은수생활을 했던 연유로 수도명처럼 불린 이름일 뿐이지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30세쯤이었던 1373년 거의 죽어가던 줄리안에게
임종을 준비하는 병자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본당 신부가 방문했습니다.
예식 중에 본당 신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줄리안의 발치에서 십자가를 들어 보였습니다.
십자가를 응시하던 줄리안은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지고 육신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줄리안은 몇 시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15가지 환시를 보았으며,
다음 날 다시 결론적인 환시를 보았습니다.
이 환시는 며칠 후에
줄리안이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야 끝났습니다.
신비체험을 한 후에 줄리안은
즉시 자신이 목격한 환시에 대한 작품을
25장의 짧은 구성으로 저술(짧은 책)했습니다.
신비체험 이후에 줄리안은
성 율리안나 성당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은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줄리안이 미혼이었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14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어 과부가 된 줄리안이
전염병을 피해 은수자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줄리안이 은수생활을 시작할 때
수도자 신분이었는지 평신도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줄리안은 은수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삼위일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신학적으로 숙고했습니다
. 결국 20여년 후 줄리안은
환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을
86장의 긴 구성으로 다시 저술(긴 책)했습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였으며,
잉글랜드에 추기경이었던 애담 이스틴(1328/38~1397)은
줄리안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줄리안의 은수생활에 도움을 주었으며,
줄리안이 긴 구성의 작품을 저술할 때에
편집자로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줄리안은 잉글랜드에서 영어로 작품을 남긴
첫 번째 여성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염세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던 시기에
신비주의적 접근을 통해 고난을 딛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1373년 5월 8일, 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16차례의 ‘환시’를 보고,
이를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시」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녀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고통, 수난에 참여하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를 받고,
이를 재해석하였다.
풍요의 영성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 믿음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나아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어머니로 이해하는
모성의 영성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 공간으로 감싸고, 안고, 반기고, 포용하고,
우주적이고, 확장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곧 하느님의 모성은 삼위일체의 속성의 일부이며
성체는 우리를 먹이고 기르고 새로 나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여성성은 하느님의 부성을 조화롭게 보완해 주며,
모성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영성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선포되었다.
하느님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어머니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세의 평신도 영성가들은
그 시대를 앞서 개인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따른
신적 사랑의 합일을 지향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오늘의성인
천주교부산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