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도사 정공 묘갈(節度使鄭公墓碣銘)
[생졸년] 1657년(효종 8)~1739년(영조 15) / 壽 82歲
절도사 정덕징(鄭德徵) 공이 용인(龍仁)의 풍계(楓溪)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는데, 내가 흘러들어와 살게 된 이래로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비록 문인과 무인의 길은 다르지만 공은 포은(圃隱) 집안의 현명한 자손이며, 또 선비 장수의 풍모가 있었기에 한번 가서 문안하였더니, 풍골이 맑고 시원하며 도서가 가지런하여 속세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당시 국화가 활짝 피었는데, 공이 화분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으니, 만년의 절개를 본받으려는 것이었다.
공의 자는 성유(聖由)이며 영일(迎日) 사람으로 포은 선생은 그의 10대조이다. 증조 휘 종선(從善)은 현감을 지내고 집의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간(侃)은 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주한(周翰)은 영장을 지냈는데, 용맹과 지략이 남달라 일찍부터 나라를 지킬 인재로 기대를 받았으나 성품이 꼿꼿하여 세상과 맞지 않았다. 훗날 참판에 추증되었다. 외조는 능성(綾城) 구민(具旻)이다.
공은 젊어서 글을 배웠으나 곧 붓을 던지고 경신년(庚申年,1680)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당시 나이 스물 넷이었다.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차례대로 승진하여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가 되고 판관(判官)으로 옮겼다. 공은 속습(俗習,세상의 풍습)을 따라 정관(政官)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외직으로 나가 서생진 첨사(西生鎭僉使)로 나갔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중전(中殿,왕비)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공은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부와 나무꾼 사이에 자취를 숨겼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 진안 현감(鎭安縣監)이 되었고, 체직되어 돌아와 부친상을 당하여 예법에 따라 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자 그대로 남아 모친을 봉양하였는데 몸소 밭 갈고 낚시하여 맛있는 음식을 바쳤다.
공이 예전에 길에서 경기의 수령이 되었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여 분상하는 벗을 만나 놀란 적이 있기에 마침내 모친 곁을 떠나 벼슬할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매일 직접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모친이 머리를 빗으려 하면 몸소 빗겨 드렸다. 출입하다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와 바쳤다.
간혹 제수하는 명이 내렸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또 남의 막하(幕下)에 비장(裨將)으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연루되어 유배당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물으면,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데, 누구를 영화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저자에 발길을 끊은 지 거의 십수 년이었다. 간암(艮菴) 이공(李公, 이희조)이 무변 중의 은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단 한 번 나주 영장(羅州營將)으로 부임하였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마음을 다했다. 관할 하의 수령이 혹 체모를 잃으면 이름난 관원이라도 조금도 봐주지 않으니, 고을 수령들이 모두 공경하고 조심하였다.
나주는 평소 바쁜 고을로 알려졌는데, 공은 오랫동안 겸관(兼官)으로 있으면서 물흐르듯 판결하고 은혜로운 정사를 많이 베풀었다.
나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여 마지 않는다. 호남 병영에 있으면서 진휼을 감독한 공로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동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羽林衛將, 從2品 무관직)이 되었다. 당시 흉인 유봉휘(柳鳳輝, 1659~1727)의 상소가 나라의 근본이 이미 정해진 뒤에 나왔기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토죄(討罪)를 청하려 하였다. 공은 자손들에게 가서 참여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부임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성곽과 무기를 깨끗이 일신하였다. 얼마 후 흉도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또 이듬해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제한을 이유로 사직하고 체차되어 훈국에 예속되었다.
당시 김씨 궁인의 일 때문에 상소와 계사가 번갈아 나왔는데, 갑진년(甲辰年, 1724, 경종 4)에 이르러 무신(武臣)도 당시 간신배의 뜻에 영합하여 연명으로 상소하려 하였다. 아들 찬술(纘述) 역시 군문에 있었는데, 공이 의리상 흉인의 상소에 동참할 수 없다고 하며 즉시 성묘한다고 말미를 청하였으나 주장(主將)이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였다. 찬술 역시 참여하지 않았다. 흉도들이 미워하여 유배보내려 하였으나 결국 하지 못하였다.
경종(景宗,조선 제20대 국왕)이 새로 즉위하여 나라의 형세가 근심스러워졌다. 공은 한창 군문의 일을 맡고 있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동료로 있는 동종(同宗)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힘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여 우리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말라.”
하고,
활을 뽑아버리고 강한 것으로 바꾸더니,
“위태롭고 의심스러울 때는 무비(武備)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1), 정국이 바뀌자 함경남도 절도사에 발탁되었다. 공은 날마다 무비(無備)를 갖추는 것을 일삼아 비나 눈이 내리지 않으면 매일 활쏘기를 연습하여 몸소 장사들의 앞장을 섰다. 또 봉수대를 엄하게 신칙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임기가 차서 체직되자 훈국 별장에 차임되고, 또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길에서 시사(時事)가 갑자기 변하여 흉인 이삼(李森, 1677~1735)이 주장(主將)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마침 시관(試官)에 의망되었으나 세 번 소명을 어겨 파직되었다. 이삼의 당파가 몹시 성을 내어 체포하여 심문하기를 청하고 고신(告身)을 전부 빼앗으니, 공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 4) 봄, 변란이 일어나자 다급히 달려가 성상께 문안하고 원종공신이 되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 외직으로 나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자 탄식하기를,
“내 나이 칠순이 넘었으니 이번에 직분을 다하지 않으면 어찌 또 나라에 보답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사사로운 일을 끊어버리고 무기와 관청을 수선하는 일에 전념하느라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따로 창고 하나를 지어 저축을 쌓아 급한 일에 대비하였다. 또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하여 군졸들이 비석을 세워 그리워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거문고를 연주하고 책을 읽으며 즐겼다. 문앞에 작은 못을 파고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잊었다. 회포를 읊은 시를 지었는데,
공명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 功名如脫屣
고향으로 돌아오니 세상 생각 드무네 / 歸田世念疎
이제부터 하는 일 없이 / 從此無所事
못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구경하리 / 臨淵弄游魚
라고 하였으니, 말년의 흥취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난리에 몸 바치겠다는 뜻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 군장을 옆에 두고 또 군마를 준비하여,
“죽기 전에 불행히 급한 일이 생기면 이미 몹시 늙어서 앞장서서 적을 치지는 못하겠지만, 한걸음씩 임금 계신 곳으로 달려가다가 기운이 다하여 죽는 것이 옳다.”
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736, 영조 12), 공의 나이 여든으로 가의대부에 올랐다. 기미년(己未年, 1739, 영조 15) 8월 11일 풍계정사(楓溪精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였다. 유언으로 염습에 심의(深衣,예전에,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 )를 쓰게 하였다. 처음에는 모현촌(慕賢村) 우산(愚山)에 장사 지냈다가 8년 뒤 왕곡(旺谷,現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묘좌(卯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니, 모두 같은 현(縣)의 땅이었다.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공보다 십 년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장사 지낼 때 부장하였다. 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지녔으며 묘지(墓誌)가 있다. 공은 단정하고 말수가 적었다. 평소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로하였으며 잠시라도 피곤해 누운 적이 없었다.
책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고, 만년에는 예서 및《주자강목(朱子綱目)》읽기를 가장 좋아하였다. 때때로 흥이 나면 거문고를 연주하였는데, 예스럽고 담박함을 추구할 따름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돌아가신 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팔순이 된 뒤에도 서글픈 마음이 솟아 눈물이 흰 수염을 타고 흘러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했다.
생일에는 자제들에게 잔치 음식을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선조를 추모하는 일에 더욱 힘을 썼고, 잘못을 답습하는 제례(祭禮)를 바로잡아 한결같이 선현의 정론을 따랐다. 한번은 포은의 묘소 곁에 새로 재실(齋室)을 지었고, 또 8대조 설곡공(雪谷公 정보(鄭保)의 비석을 다시 세워 절의를 드러내었다. 자손들에게 학문을 우선하고 속된 선비가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모든 행실이 옛날의 독서한 군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만년의 절개는 더욱 탁월하여 볼 만하였으니, 포은 집안에 어진 후손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찬술(纘述)은 그의 장남으로 통어사를 지냈으며, 출계하여 백부의 후사가 되었다. 차남은 찬지(纘志)이며, 두 사위는 윤찬(尹燦)과 이익겸(李益謙)이다.
찬지의 아들은 주(鑄), 찬술의 계자는 건(鍵)이며, 건의 아들은 익제(翼濟), 성제(聖濟)이다. 윤재경(尹在慶)과 윤재도(尹在度), 윤재후(尹在厚), 이기정(李基鼎)은 두 사위의 소생이다. 찬지가 친한 이웃이라는 이유로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깊이 사랑하는 효성과 / 深愛之孝
깨끗이 물러나는 절개는 / 恬退之節
선비들 중에서도 / 雖在儒行
필적할 이가 드무네 / 尙少匹敵
더구나 무인이었으니 / 矧伊櫜鞬
기특한 일이 아니겠는가 / 不亦奇事
갑주 입고 방패 들고 / 甲冑干櫓
충신과 인의를 지켰으며 / 忠信仁義
골짜기에 살면서 / 一壑婆娑
도서 읽고 소요했네 / 蕭散圖書
거문고 타고 학 기르며 / 彈琴馴鶴
지팡이 짚고 물고기 보았네 / 拄杖觀魚
구성(駒城 용인)의 동북쪽에 / 駒城東北
선영이 바라보이네 / 梧檟相望
벼슬길은 달랐으나 / 仕雖殊塗
늙어서 한 마을 살았네 / 老則同鄕
한 그루 국화꽃 / 黃花一盆
두 사람 말년의 마음이었네 / 暮年兩心
먼 옛날 포은의 / 圃翁遙遙
가르침을 찾을 수 있네 / 詩禮可尋
아, 후손이여 / 嗟哉後人
변함없이 계승하라 / 承受勿替
나는 그 미덕을 명에 남겨 / 我銘厥美
영원히 보이노라 / 用眎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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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절도사 정공 묘갈 :
이 글은 정덕징(鄭德徵)의 묘갈명이다. 정덕징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성유(聖由)이다. 1657년(효종8) 태어나 1739년(영조
15) 8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여주 …… 사직하고 :
《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에 65세가 넘으면 외직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정덕징은 1724년
(경종4) 여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주03] 김씨 궁인의 일 :
신임옥사(辛壬獄事=辛壬士禍)에 연루된 김성절(金盛節)의 공초에 김씨 궁인을 시켜 어선(御膳)에 독약을 타게 하였다는 언급이
나왔으나 끝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다.《景宗實錄 2年 8月 26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