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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6 - 스페인에서 해방된 잉카제국의 후예인 페루와 볼리비아!
1. 페 루(1-A : 자력으로 독립전쟁)
페루 공화국(스페인어: 레푸블리카 델 페루)은 남아메리카 서부에 공화국으로 수도는 리마이며
북쪽에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쪽에 브라질, 남동쪽에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태평양 해안과 맞닿아 있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케추아어도 공용어 입니다.
페루(Peru) 란 말은 16세기초 파나마의 산 미겔만 근처에 살았던 지방 통치자의
이름 Biru 에서 유래하였는데, 1522년에 에스파냐인들이 그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알려진 유럽인 가운데서 신세계 가장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더 남쪽으로 탐색하였을 때 이곳이 Biru 혹은 Peru 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니 1529년 Capitulacion de Toledo 로 이 명칭은 "페루 주" 로 됩니다.
옛 잉카의 땅을 이르는 법적 승인을 받은 것인데.... 에스파냐는 아메리카를 4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으니 이 땅은 페루 부왕령이었고 페루 독립전쟁 후 페루 공화국이 됩니다.
페루에서 오래 전에 사회를 이루었던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00년에서 1800년경
사이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성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쿠피스니케, 차빈, 파라카스,
모치카, 나스카, 와리, 치무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며 15세기경 잉카 제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라 콜롬부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안데스 사회는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관개와 계단 농법 같은 기술을 이용하였고,
낙타과(라마, 알파카, 비꾸냐) 동물을 기르고 물고기도 잡았는데 화폐나 시장의
관념이 없었으므로 이들 사회는 호혜와 분배를 기초로 한 사회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12세기에 볼리비아의 망고 카팍은 태양신 인티(Inti) 로 부터 지팡이가 꽃히는 땅으로 가서 국가를
세우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팡이가 땅에 푹 들어갔고, 망코 카팍은
이곳을 새로운 거주지로 삼고 쿠스코 왕국을 세웠으며 이 나라가 발전해 잉카제국으로 성장합니다.
15세기에 쿠스코 왕국은 5대 국왕 카팍 유판키 때부터 쿠스코 계곡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으니 사후 우린(Urin) 일족의 반란을 진압한 잉카 로카는 6대 왕에 올라 페루
를 넘어 볼리비아와 티티카카 호수 지역까지 점령했고 에콰도르 안데스 지역,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서북부 등 남아메리카의 2,000마일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디에고 데 알마그로, 에르난도 데 루케는 스페인 탐험대를
이끌고 잉카 제국을 정복했으며... 그들은 “비루”(Biru) 라고 알려진 전설상의 황금의 땅(페루)이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1524년에 파나마에서 돛을 올리고 태평양 해안을 따라 남하합니다.
급속히 확장하던 잉카 제국이 내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잉카에 대한 정복은 매우 쉬웠으니
잉카의 후아이나 카팍이 1527년에 죽은후 그의 아들들인 와스카르(Huascar)와 아타우알파
(Atahualpa)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투게 되는데 아타우알파는 그의 형제를 물리
쳤지만..... 스페인인들이 도착하던 1532년에도 그의 권력은 아직 굳건해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타우알파는 산악을 지배하는 자가 해안도 지배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 잉카
통치자는 피사로가 1532년 해안선에 도착했을때 그를 무찌르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피사로가 잉카 통치에 반항하는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에도 아타우알파는
보름달이 떴을때 공격을 시작한다는 등 전쟁에 대한 잉카 의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개종을 거부함으로써 1532년 11월 16일
참혹한 카하마르카(Cajamarca)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귀족
호위기사 12명을 처형하고 아타우알파를 잡아서 몸값의 방이라는 곳에 가두었으며 1년
후에 잉카의 수도 쿠스코(Cuzco)가 함락되었고 1534년에 새로운 스페인 정착지로 다시 정비됩니다.
피사로의 신속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디오들은 저항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식민지 시기 내내 주기적
으로 지속되었는데..... 스페인인에 의해서 꼭두각시 황제로 앉혀진 망코 잉카(Manco Inca) 는
1537년에 새로운 통치자들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 잉카”(neo Inca) 국가를 재건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반란을 진압하고 쿠스코 광장에서 투팍 아마루(Túpac Amaru) 를
교수형에 처한 이후에도 계속 스페인 당국에 도전하였는데, 스페인 통치 초기 북쪽은
피사로 군대가 남쪽은 알마그로 군대가 분할해 서로 내전을 벌였으며..... 1537년에
알마그로가 망코 잉카 반란을 제압하면서 쿠스코를 포위하자 둘 사이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1538년에 피사로가 알마그로를 물리치고 처형하였지만 그 자신도 알마그로의 과거 추종자
들에 의해서 3년후 암살되자 피사로의 형제 곤살로(Gonzalo)가 페루 고지대를
장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국왕에 저항하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고 그러자 스페인은 1548년에 피사로 곤살로를 처형한 후에야 권위를 다시 세웁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정복자들이 잉카 황제인 아타우알파를 패퇴시키고 제국을
정복한 이후.... 그 10년 뒤에 에스파냐왕은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을 설치하였으니 부왕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1570년대 이 영토를
재조직하여 은광이 경제 기반이며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제국이 장수할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들의 성공적 관리에서 기인한다고 할수
있으니 스페인은 독립지향적인 정복자들을 통제하는데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곧 왕실의 수입원을
유지하는 것과 인디오 주민들로부터 재화와 노동을 공물로 모으는 것을 위해 신세계에 다양한
기관들이 상호견제하는 관료기구를 만들었으며 지방관료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율성을 누렸습니다.
페루에서 생산된 금과 은괴는 에스파냐 왕가의 수입원이었으며, 유럽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복잡한
무역망에 돈을 공급하였는데, 18세기 은 생산이 줄어들고 산업이 분화되면서 왕가의 소득은
줄어들자 부르봉 왕가 에스파냐 정부는 개혁을 단행해 세금을 올리고, 페루 부왕령을 분할합니다.
정복과 식민통치는 인디오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으니 천연두등 유럽발 질병에 쉽게
감염되어 원주민 인구는 급속하게 감소하였고 18세기에 스페인이 보다 많은 공물금액을
요구하고 광물생산을 증진하기 위해 강제 광산노동(mita) 날짜를 늘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토착문화의 파괴는 인디오들의 알코올 중독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식민통치에 대한 인디오들의 불만은 증가하여 투팍 아마루 2세의 대반란을 촉발하였으니
1770년대에 그는 인디오들에 대한 코레히도르(지방관)의 가혹한 처우에 격분햤고
1780년 11월에 투팍 아마루 2세와 추종자들은 특별히 잔인한 코레히도르
들을 붙잡아서 처형하였으니...... 봉기는 순식간에 전면적인 혁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페루 및 볼리비아의 안데스 지역에서 60,000명의 인디언들이 가담하였으니 1,200명의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는 등 초기에 몇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투팍 아마루 2세는 결국 1781년 5월에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고지대 페루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8세기 말이 되자 크리오요(Criollo, 신세계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사이에서도 스페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게 되었으니 광업과 농업에 종사하던 그들은 스페인 왕실의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역장벽에 대해 반발하게 되었으며 또한 크리오요들은
스페인이 모든 고위 행정직위들을 반도인(스페인 출생)에게만 주는 것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종교재판소도 니콜로 마키아벨리, 드니 디드로,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페인, 장 자크 루소, 존
로크 등의 저작들이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반입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 이들의 사상은
추키사카 지역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크리오요들 사이에서 화제에 올랐으며 고지대 페루의
크리오요들은 처음엔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1807~8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은 남미의 독립투쟁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니
부르봉(Bourbon) 왕조의 타도와 조세프 보나파르트의 스페인 왕 즉위로 인해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독립전쟁 열풍이 휘몰아칠때, 페루는 왕당파 보루로 남아 있었습니다.
페루에서는 상류층인 크리오요들이 해방과 복종 사이에서 주저하였기 때문에.... 페루
의 독립은 1821년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독립을 선포하고, 2년 후인 1823년 9월
대콜롬비아를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가 리마에 입성하여 이듬해 페루를 독립시킵니다.
아르헨티나를 해방시키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 마저 해방시킨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은 칠레에 영국 백작 토마스 코크런을 해군 지휘관으로 초빙하여
육해군 합동 작전을 실행해 북상해서는 1821년 7월 28일에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 라는 호칭을 얻어 페루 국가 원수 자리에 앉습니다.
하지만 페루는 왕당파를 일소하지 못한 탓에 불안정했으니 1822년 7월 26일,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과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만나 남미지역 독립문제에 비밀회담을 하게 됩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미국을 모델로 한 강력한 중앙 정부와 대통령 중심제의 연방국으로
전체 남미지역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현실주의자였던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의
제안은 남미지역의 정치상황과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피력했습니다.
1824년에 산 마르틴이 일선에서 물러난후 유럽으로 망명하니 페루는 다시 왕당파의 손에 들어간지라
시몬 볼리바르는 해방군을 파병해 페루 왕당파를 공격했는데 1824년 12월 9일 스페인 부왕 호세
드 라 셀나가 이끄는 왕당파군을 상대로 한 아야쿠쵸 전투(Battle of Ayacucho) 에서 수크레가
이끄는 해방군이 승리래 페루가 독립하였으며 1825년 볼리바르는 페루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아야쿠초 전투는 페루 독립전쟁중 결정적인 군사적 충돌이었으니 이 전투는 페루의 독립을 확보했고
남아메리카의 나머지 지역에도 독립을 보장했으니... 페루에서는 승자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군대가 1825년까지 상페루에서 전투를 계속했고, 칠로에 요새와 칼라오 요새의 포위
작전이 1826년에 결국 끝났지만 이 전투는 사실상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전쟁의 종식이라 여겨집니다.
1824년 말 왕립주의자들은 칼라오항에 레알 펠리페 요새뿐만 아니라 페루 남쪽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1824년 12월 9일, 키누아 마을 근처 아야쿠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팜파 데 아야쿠초
(또는 퀴누아)에서 왕립주의자와 독립주의 세력 사이에 아야쿠초 전투(라 퀴누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독립주의 세력은 시몬 볼리바르의 측근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이끌었으니
스페인의 페루 총독인 호세 드 라 세나는 부상을 입었고,
전투후 제2대 총사령관 호세 드 칸테라크가 왕립군의 마지막 항복에 서명했습니다.
양군은 처음에는 8천명 남짓한 비슷한 병력이었지만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안토니오 호세
드 수크레의 독립군은 6천명에 왕당파는 7천명으로 여겨지는데 최고사령관은 아구스틴
가마라 장군이고 기병은 윌리엄 밀러, 1사단은 호세 마리아 코르도바(2,300명),
2사단 - 호세 드 라 마르(1,580명) 에 예비역 자킨토 라라 장군(남자 1,700명) 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독립군의 드 수크레는 들에 집결해 있는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
했으니.... "군인들, 남아메리카의 운명은 오늘의 노력에 달려 있다. 영광의 또 다른 날이
당신의 존경할 만한 끈기를 지배할 것이다. 병사들, 해방자 만세! 페루의 구세주 볼리바르 만세!"
스페인 왕당파 군대는 루빈 드 셀리스 대령의 대대가 앞서고 모네 사단의 기동 및 공격이 이어지며
독립주의자들이 점령한 집 위로 발데스의 선봉 공격에 이어 왕립 기병대기 돌격하고 그후
제로나 대대의 왕립 예비군에 의한 분산에 페르디난드 7세 대대, 왕실주의 예비군이 뒤를 받칩니다.
칸테라크가 고안한 작전은 선봉 사단이 독립군인 수크레군 왼쪽으로 부대를 확보하기 위해
팜파스강을 건너 적군을 편향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한편 나머지 왕실 군대는 콘도르쿤카
언덕에서 전방으로 하강하여 높은 지대에서 방어적 위치를 버리고 조직력이 흐트러질
것으로 예상한 적의 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곤 했는데 '제로나' 와 '페르디난트
7세' 대대는 예비군 역할을 했고 어디든 파견할 수 있도록 두번째 줄에 배치 했습니다.
수크레는 왕당파 군대가 자신을 보호하기 힘든 노출된 비탈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밀러 기병대의 지원을 받은 호세 마리아 코르도바의 사단은 흐트러진 다수의
왕실주의 부대를 함께 묶어 전투선으로 형성하지 못하고 산에서 파도를 타듯
내려왔으며 공격이 시작되자 독립주의자 장군 코르도바는 유명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디비전, 아르마스, 데 프렌티, 파소 데 빈도레스" ( 팔은 편안히; 승자의 페이스로, 전진!)
제1차 왕립주의 연대를 지휘한 호아킨 루빈 드 셀리스 대령은 노새들이 끄는
포병을 보호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대가 노출되고 심하게 훼손된 평원으로
부주의하게 앞으로 나아갔으니 자신도 독립파 코르도바 사단의 공격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 당한 불행을 본 왕립파 장군 모네는 평야에서 기병대가 형성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협곡을 건너 코르도바를 상대로 제1사단을 이끌고 가까스로
2개 대대를 편성하여 전투질서를 이루었으나.... 갑자기 독립파 사단의
공격을 받아 나머지 부대들 앞에 포위되었으며..... 또한 전투 편제가 흐트려집니다.
모네장군은 부상을 입고 그의 지휘관들 중에 세 명이 죽었으며 왕립주의자들의 흩어진
사단을 민병대들이 추격했으며, 발렌틴 페라즈 바라우 휘하의 왕립주의 기병대는
모네의 흩어진 좌익을 추격하는 적군을 공격했지만, 보병들의 혼란과 십자포화가
페라즈의 기병에게 큰 인명 피해를 입혔으니 기병 생존자들을 급히 전장을 이탈합니다.
반대편 끝에는 호세 드 라 마르 + 자킨토 라라의 독립주의자 2사단이 일부 독립주의 병사
들이 점령한 고립된 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발데스의 선봉에 선 스페인 왕당파군
베테랑들의 공격을 일제히 저지하는중에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독립주의자들은 곧
강화되어 재공격에 들어갔고 결국 승리한 코르도바의 사단에 의해 도움을 받았습니다.
왕당파군의 혼란을 본 총독 라세르나와 다른 지휘관들은 전투의 주도권을 되찾고 흩어지고
도망치는 군인들을 재정비하려 애썼으니 캔터락 장군 자신도 예비사단을 이끌고 평야를
가로질렀지만, '제로나' 대대는 토라타와 모케과 전투에서 싸운 참전용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올라녜타의 반란에서 이들 사단은 거의 모든 퇴역군을 잃었고 심지어 전 지휘관인 카예타노 아멜러
까지 생포된 부대는 적을 만나기 전에 재빨리 뿔뿔이 흩어졌으니 '페르디난트 7세' 대대가
소극적으로 저항한뒤 뒤따랐고 1시가 되자 총독은 부상을 입고 장교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왕당파군 발데스의 사단이 여전히 전선의 우측을 사수하며 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독립주의자들의 승리였으니 수크레에 따르면, 독립주의자의 전사자는 370명
이고 609명이 부상했으며, 왕실주의자들은 1,800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부상했다고 말했습니다.
발데스는 사단의 잔당들과 함께 간신히 후위병이 주둔중인 언덕으로 후퇴하여, 캔터락 장군 주위에
모여 있던 200명의 기병대와 왕립 사단의 흩어진 몇몇 병사들과 합류하여 도망쳤고,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총격을 가해 재편성하려는 자신의 장교들을 사살했으니 크게 축소된 병력은
독립군을 물리칠 가망이 없는데다 총독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자 스페인 왕실 지도자들은 항복합니다.
볼리바르는 내친김에 상(上)페루(불리비아) 지역도 해방시킨 때가 영광스러운 시기였는데.....
1825년 자신의 대콜롬비아 구상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했으니 국가
건설에 대해 크리올료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 지역마다 대립했고 유럽도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견제했으니 1826년 결성된 연맹은 1830년 해체되었습니다.
볼리바르가 계획한 라틴 아메리카 연합이 실패하고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단명한 가운데,
이 시기에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184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 페루는
라몬 카스티야 대통령 하에서 구아노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증대로 안정기를 맞았
지만 1870년대에 구아노가 고갈되면서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정치 내분이 일어납니다.
1879~1883년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는 칠레에 패배하여, 리마와 안콘의 조약에
따라 아리카 주와 타라파카 주를 잃었으며 전후 내부 다툼이 일어나다가
시민당시대에 안정을 되찾았으나, 아우구스토 레기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대공황으로 레기아는 몰락하고 정치분쟁이 일어납니다.
1968년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난도 벨라운데 대통령에 대항
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새 정권은 국가 발전을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널리 지지받지 못하였고 1975년 벨라스코는 베르무데스 장군의 폭력을
통해 물러났으며, 베르무데스는 개혁에 손을 놓고 민주주의 재확립을 방관하였습니다.
일본계 이민자의 후손인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1989년에 개혁정치를 내세우는 정치
단체 Cambio90 이라는 정당에 참여해 199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자신의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검소하게 선거운동을 치렀는데, 은행 국유화 반대운동
을 펼쳤던 보수 우파인 바르가스 요사가 여유롭게 압승할걸로 예측되었습니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등에서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었으니
페루 원주민들은 요사의 급진적 신자유주의적인 공약과 호화판 선거운동에 불안감을 느꼈고
반면 소박하게 선거운동 하던 후지모리에게 호감을 느꼈던데다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걸로
예측되었던 일본에서 경제지원을 이끌어낼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겹치며 후지모리가 당선됩니다.
2. 볼리비아(1-A 처절한 독립전쟁)
볼리비아 지역은 아이마라(Aymara)족이 볼리비아 서부, 페루 남부, 칠레 북부에 정착한
이래로 2000여년간 살았으니 티와나쿠(Tiwanaku)에 존재했던 문명의 후손으로 서기
400년경에 티와나쿠는 침략 국가로 성장해 세력권을 융가스(Yungas)까지 넓혔으며
자신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페루, 볼리비아, 칠레의 다른 문화들에게 전파 하였습니다.
1438년에서 1527년 사이 잉카제국은 9대 황제 바차쿠티 잉카 유판키와 아들 토파 잉카 유판키
가 침공해 볼리비아 서부 지역 대부분을 획득하고 티티카카 호수 지역을 점령하였으니
잉카 제국은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케추아어, Quechua)를 정복한 영토에 퍼뜨렸지만
티티카카 호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외로 아이마라 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볼리비아인들에게 계단식 경작과 줄매듭에 의한 기록체계인 키푸와 농업기술이 전파되었고 잉카인
들은 뛰어난 건축기술자들이었으며 정교한 도로 체계, 관개시설을 볼리비아 서부와 에콰도르
안데스, 페루,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서북부 등 남아메리카의 2,000마일에 걸친 제국에 퍼뜨립니다.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Cajamarca) 전투가 벌어지고 아타우알파는 스페인군의 포로가 되어
몸값의 방이라는 곳에 가두었으며 1년후 잉카의 수도 쿠스코(Cuzco)가 함락되었지만 인디오들은
저항을 시작하였으며, 스페인인에 의해서 꼭두각시 황제로 앉혀진 망코 잉카(Manco Inca)는
1537년에 새로운 통치자들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 잉카”(neo Inca) 국가를 재건합니다.
스페인인들이 반란을 진압하고 1572년에 쿠스코 광장에서 투팍 아마루(Túpac Amaru)를 교수형에
처했으며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반란들은 18세기 투팍 아마루 2세(Túpac Amaru II)의
대규모 반란을 제외하면 주로 공동체 연장자들과 지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직되었습니다.
스페인 통치 초기 20년 동안에 볼리비아 산악지대(고지대 페루(Alto Peru) 또는 차르카스(Charcas)
의 정착은 피사로 군대와 알마그로 군대 사이의 내전으로 인해서 지연되다가 1538년에 피사로가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에 암살되자 피사로의 형제 곤살로(Gonzalo)가 페루 고지대를 장악했으며
스페인은 1548년 피사로를 처형한 후 그해 말에 식민지 정부가 라파스(La Paz) 시에 설립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저항으로 인해서 볼리비아 저지대의 정복과 정착을 늦추어졌으니 스페인인들은 1561년
산타크루스 데 라 시에라를 건설하였지만 건조한 차코(Chaco) 지역의 식민지식 이름인 그란차코
(Gran Chaco) 는 식민통치 기간 내내 충돌이 잦은 경계지대로 치리구아노(Chiriguano) 족
인디언들은 계속 공격을 행하였으며 스페인의 직접통치로부터 독립된 지역으로 남게 됩니다.
스페인 식민통치 대부분 기간 볼리비아 지역은“고지대 페루”(Upper Peru) 또는 “차르카스”(Charcas)
라고 불렸으며 리마(Lima) 부왕령 관할하에 있었으니 지방정부는 추키사카(Chuquisaca) 또는 라
플라타(La Plata)에 위치한 차르카스 왕립 심의원이라는 기구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며 볼리비아의
은광은 스페인 제국의 부를 책임졌으며 포토시(Potosi) 는 오랫동안 서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식민통치에 대한 인디오들의 불만은 증가하여 투팍 아마루 2세의 대반란을 촉발했으니
1770년대에 그는 인디오들에 대한 코레히도르(지방관)의 가혹한 처우에 격분해
1780년 11월에 투팍 아마루 2세와 추종자들은 특별히 잔인한 코레히도르
들을 붙잡아서 처형하였으니..... 봉기는 순식간에 전면적인 혁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페루 및 볼리비아의 안데스 지역에서 60,000명의 인디언들이 가담하였으니 1,200명의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는등 몇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투팍 아마루 2세는 1781년 5월에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고지대 페루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니
인디오 추장 토마스 카타리(Tomás Catari)는 1780년 초 포토시(Potosí) 에서 봉기를 주도합니다.
카타리는 투팍 아마루 2세보다 한달 먼저 스페인인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교회 관리인훌리안 아파사
가 또다른 반란을 주요하였는데 1781년에 100여일 동안 라파스(La Paz)를 포위하였으며 1782년
에는 아이마라 출신 여자 바르톨리나 시사가 또다른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는등 스페인은
1783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후 수천명의 인디오들을 처형합니다.
스페인 왕실이 나폴레옹 전쟁기간 동안 1808년에 프랑스군에 침략당해 쇠약해지자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증대되었으니, 볼리비아 역사서는 독립선언 시기를 1809년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그 이후
16년 동안 투쟁을 거친 후에야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이름을 딴 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1807~8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은 남미 독립투쟁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니 부르봉
(Bourbon) 왕조의 타도와 조세프 보나파르트의 스페인 왕 즉위로 인해서 고지대 페루의
현지 엘리트들은 갑자기 여러개의 상충하는 권력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충성심
을 시험하기에 충분하였는데 이들중 대다수는 여전히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에 충성하였습니다.
왕당파는 폐위된 페르디난드 7세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스페인의 최고중앙위원회를
지지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식민통치의 개혁가능성을 약속한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열성적
으로 환영했으며, 일부 관료들은 브라질의 포르투갈 섭정왕이었던 남편 존과 함께 브라질을
통치하던 페르디난드의 누이동생 카를로타(Carlota)가 스페인 영토들을 섭정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으며 마지막으로 소수의 급진적 크리오요들은 고지대 페루의 독립을 원했습니다.
1808년에 심의원 의장 라몬은 카를로타 편으로 기울었고 심의원의 관료들은 최고중앙위원회를 선호
하였으니 1809년 5월 25일 의원들은 의장을 물러나게 하고 페르디난드 7세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위원회를 설립하였고 1809년 11월 코차밤바, 오루로, 포토시가 라파스의 위원회에 합류했는데 이
두 반란세력은 페루와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부왕들이 라파스로 파견한 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습니다.
그후 7년 동안 고지대 페루는 플라타강 지역연합(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일부 지역의 독립
혁명연합) 군대와 페루에서 온 왕당파 군대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으니 왕당파들이 아르헨티나의
세차례 침략을 물리쳤지만 게릴라들은 농촌지역을 통제하게 되었으며 6개의 주요한 소공화국
또는 반란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지역적 애국주의는 전면적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820년 이후 보수적인 크리오요들은 차르카스에서 태어난 페드로 안토니오 데 올라녜타
장군을 지지했으니, 그는 1812년의 자유주의적 스페인 헌법의 복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시몬 볼리바르와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지휘
하의 반란군(독립군) 은 물론 자유주의적 왕당파 군대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올라녜타는 페루의 왕당파가 1824년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한후 맺은 항복문서에 그와 그의 군대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놓지 않았으니, 올라녜타는 수크레가 고지대 페루에 대한 스페인
통치를 종식시킨 전투에서 그를 무찌르기까지 수개월 동안 돈키호테처럼 전투를 지속하다 1825년
4월 1일 살해되었고,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8월 6일 볼리비아를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볼리비아 상징은 티티카카 호수인데...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배가 다니는 호수로 안데스 산맥 해발 3,810m , 면적은 8,300㎢에 이르고 동서로 80km, 남북으로
190km이며 호수 주변의 크고 작은 강으로부터 담수가 유입되니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데사과데로강
을 통해 빠져나가는 구조인데 전체 담수량 중 5% 정도만 내보낼 뿐이며 대부분은 증발등으로 소실됩니다.
수심은 평균 130m 정도나 동쪽의 볼리비아 방향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구조라 어떤 곳은 최대 수심
이 276m에 달하는 곳도 있으며 계절에 따라 수면이 올랐다가 내려가는 것을 주기적으로 반복
하는데 수심이 깊은 이유는 2개의 코르디예라 사이에 호수가 있기 때문이니 나스카 해양
지각판이 남아메리카 해양 지각판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지표가 휘어져 습곡이 생긴 것입니다.
섬은 41개나 되고 몇몇 섬은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니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종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물이 맑아서 어획량 자체는 풍부하며 이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티티카카 오레스티아스란
희귀종 물고기가 있었는데, 1930년대에 남미로 이주한 미국인들이 송어를 먹고 싶다고해서 미국
내무부가 송어를 티티카카 호수에 방류했고, 30년도 안되어 송어들에게 잡아먹혀 멸종 되었습니다.
관광도시로서 기능은 페루 쪽이 나으므로 호수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대체로 페루로 가기 마련이니
호수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여행기는 페루를 통해서 가며 그와 함께 마추픽추도 필수 코스입니다.
볼리비아는 과거 칠레와의 전쟁 때문에 해안선 쪽의 영토를 빼앗겨 내륙 국가가 돼버린 나라라서
티티카카호에 해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잠수함까지 운용하는데 딱히 페루와 사이가
안 좋아 해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아니니 볼리비아는 페루와 연합하여 칠레와 전쟁을 치른 적도
있으니 진짜로 앙숙인 나라는 칠레이고 페루에게 진짜 앙숙인 국가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입니다.
이 호수는 이집트 문명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원주민은 발사뗏목이라는 일종의 갈대로
엮은 배를 사용하는데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와
설계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나 이 지역에 존재하는 티와나쿠의 존재도 이런
지역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유적이며 또한 건축양식도 이집트식과 완전히 같습니다.
이 지역의 우루족은 남다른 자부심이 있으니 평지의 인간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케추아족
보다 자신들이 훨씬 오래전부터 존속한 민족이라는 것이며 심지어 태양이
생기기 전부터 자기네 종족이 존재했다는 허풍을 떠는데 혈통 연구 결과 이 지역
원주민들이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으로 판명되었으니 아주 허세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티와나쿠를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여겼지만 나중에야 이 지역을 지배하던 왕국의 수도였음이
밝혀졌고 주변의 오래된 터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항구로 기능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는 이곳이 항구가 되려면 멀찌감치 떨어진 호수와 맞닿아야 하는데, 지질구조상 티와나쿠
쪽이 더 빠르게 융기하는 구조라 역추적해보면 건설 시기가 기원전 1만년 전쯤이어야 한다는...
티와나쿠 자체가 오래되기도 했고 과거 스페인 사람들에 의한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어서 연구를
하는건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지금 남아있는 유적지보다 훨씬 거대했으리라는
일반적인 시각이니 이 정도 시설을 건립하는 문명이라면 농업의 발전 또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인데, 이 곳은 고지대임에도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통적인 농법 덕분에 생산량이 많습니다.
호수의 가운데에는 갈대로 만들어진 거대한 섬이 떠 있으니 우루스 인디언들이 토토라라는
이름의 갈대로 만들어서 그 위에서 사는데 이들은 수세기 전에 아이마라 족과 케추아족
을 비롯한 이웃 부족들의 박해를 피해 육지를 떠났지만 아예 멀리 있는 섬은 아닌 것이,
우루스 인디언들의 주식인 감자, 유카, 오카, 퀴누아들은 호숫가 주변의 땅에서 자랍니다.
또 볼리비아에는 우유니 사막이 있으니 세계 최대의 소금 사막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호수의
소금들이 호수 표면에 결정화되어서 지금의 사막처럼 보이는 형상이 된 것인데 건기에
호수의 물이 말라서 사막처럼 보이긴 해도 소금사막 밑에는 여전히 물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유니의 환상적인 배경도 소금사막의 표피층에 있는 물에 반사되는 것입니다.
사막의 소금량은 볼리비아 국민이 수천년 이상 사용할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양이며 우기
때에 씻기는 과정을 반복해 왔으므로 소금의 순도 또한 높아 바로 씻어서 사용할
수 있으니 간수와 먼지등 불순물이 거의 없어 보통 암염이나 천일염보다 짠 대신
잡맛이 없어 조리에 쓰면 좋은데, 특히 김장 배추 절일 때와 고기 구울 때 뛰어납니다.
국내에 트레살, 안데스 소금으로 파는 소금은 이곳에서 난 소금은 아니고 아르헨티나의 살리나스
그란데스(Salinas Grandes) 에서 나온 소금으로 국내에는 우유니 사막의 소금을 팔지 않습니다.
안데스 산맥(알티플라노 고원)의 영향으로 해발 3,600m에 위치해 있고 총 넓이는 12,000㎢ 로
전라남도와 비슷하며 소금의 총량은 최소 100억톤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소금 사막의
두께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최소 1m 에서 최대 120m 까지 층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우유니 소금 사막이 유명한 이유는 우기에 빗물이 하늘을 비춰 마치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로 불리기 때문
이니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볼리비아 사막을 왔다 가면서 훼손
되고 있지만 우기가 되면 자체 정화돼 처음의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이마라족의 전설에 플라야 주변에 화산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움직일 수 있었으니 그중에
제일 높은 화산이던 투누파가 임신해서 아기 화산을 낳았고, 난데없이 그 아기가 자기 애기라고
생각한 근처의 화산 쿠슈가 아기를 납치했으니 투누파는 결국 아기를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울었고, 그 결과 눈물과 모유의 혼합물이 건조한 땅으로 흘러내려 우유니 사막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우유니 사막이 있던 지역은 바다였는데 태평양 동쪽에 있는 해양 지각판인 나즈카판이 남미대륙판
과 부딪치고, 이 과정에서 나즈카 판이 남미 대륙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면서 바다 속에 있던 땅이
해수면 위로 솟아올라 안데스 산맥을 형성했고, 우유니 사막이 있던 지역은 거대한 내해가 되었으며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말라붙고, 바닷물에 녹아 있던 소금이 남아 소금 사막이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유니 사막 주변에는 같은 이유로 형성된 크고 작은 소금 사막이 존재하고, 남쪽
아르헨티나에도 몇 곳이 있는데 그러나 이들 다른 소금 사막은 우유니 사막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정도로 규모가 작아서 관광지로 거론되지는 못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사막이라는 말 때문에 더울 것 같지만 고산지대기 때문에 실제로는 꽤 추운 편이지만 추운건
아니라 낮에는 따뜻한 편이어서 슬리퍼를 신고도 돌아다닐 수 있지만 밤에는 오들오들
떨 정도로 춥고 일교차가 심하며 100m 올라갈 때마다 섭씨 0.6도가 떨어지는데
우유니는 해발 4,000m에 육박하는 곳이니 지상보다 최소한 24도 더 낮다고 보면 됩니다.
적도에서 가까운 데다가 고도도 높으며, 사막이라 구름 한점 없이 맑은날이 많아 햇빛이 몹시
따가운지라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높으니 선크림과 선글라스, 긴 옷은 필수. 비가 와서 거울
이 되는 날은 경치가 끝내줄지는 몰라도 자외선 폭격이 360도로 쏟아지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우유니 소금사막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는 고대 기차 묘지이니 우유니에서 3km 떨어져
있으며 오래된 기차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도시는 과거에 태평양 항구로 가는 도중에
광물을 운반하는 열차의 유통 중심지 역할을 했으니 철도는 19세기 말에 도착한
영국 엔지니어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유유니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1888년 시작된 철도공사는 1892년 끝났는데 볼리비아 대통령은 철도공사를 통해 볼리비아가 훌륭한
운송 시스템과 함께 번영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철도공사를 그들의 삶에 대한 침해로 본 현지
아이마라 원주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파괴되었으니 이 기차들은 주로 광업 회사에서 사용했지만
1940년대 광물 고갈로 인해 광산산업이 붕괴되면서 많은 기차들이 버려지게 되어 묘지가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