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申砬)장군의 묘...임진왜란, 탄금대 배수진으로 대패한
1546년(명종 1)에 태어나, 1592년(선조 25)에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성 밖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가, 패배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67년(명종22)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3년 두만강 방면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물리쳤다.
1587년에는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키기 위하여 출진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良家의 처녀를 첩(妾)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1588년 여진족부락을 공격하면서 이유없이 부하를 참형에 처했다하여 다시 탄핵을 받고 좌천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宣祖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物)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한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이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에서 6,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쳐들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安敏)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 오자, 조령(鳥嶺.새재)에서 왜군을 맞이하자는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쳤으나, 조총을 휴대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하였다.
탄금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포기하고, 충주에 배수진(背水陣)을 친 전략에 대하여 지금도 그 평가가 다르다. 오합지졸인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치루기 위해서는 배수진 전략이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신립은 만주벌판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면서 기마병(騎馬兵)을 잘 활용하여 승리하였는데, 이에 대한 과신(過信)으로 인한 오판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더구나 충주의 진지(陣地)는 갈대밭이어서 기병(騎兵)이 활동하기에 부적합하였고, 전날 비도 와서 기병들은 꼼짝 못 하였다고 한다.
신립장군을 믿고 있던 충주 백성들은 피난도 가지 않아 어느 지방보다 피해가 컸고, 신립을 믿었던 선조는 이 전투에서 패하자 평안도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한다.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으므로, 그 屍身을 찾을 수 없었으나, 후일 뱃사공이 시신을 발견하였으나 신원을 알수 없었고, 시신에서 나온 옥관자를 官에 신고하였더니 그 옥관자가 신립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옥관자를 묻었다.
문란했던 사생활..그리고 포악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벼슬할 만큼 용맹하였지만 , 전략에는 약했던 것 같다. 그는 육군(陸軍)만으로 충분하다며 수군(水軍)의 폐지를 상소하기도 하였다.
아래는 가족묘들... 평산 신씨 (平山 申氏)
신립의 오판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기록에 유성룡과 신립의 대화가 적혀있다. 이 대화는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로 신립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조만간 변란이 있게 되면, 장군이 마땅히 맡게 될 것이오.장군의 생각에는 倭의 적세(敵勢)가 어떠 하오? " 유성룡이 이렇게 물었으나, 신립은 심히 일본을 가볍게 보아 걱정할것이 못된다고 하였다.그러자 유성룡은 일본은 과거 근접전(近接電) 무기만을 애용하였으나, 지금은 鳥銃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 맞추리오"라고 반문하였다.
유성룡은 " 국가가 평화를 누린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군사들이 겁내고 약하니 만약 급한 일이 잇다면 사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나의 생각으로는 수 년뒤에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해지면 혹시 수습할 수 있겠으나 처음에는 알 수 없으니 나는 매우 걱정되오.." 신립은 귀닫아 듣지 않고, 유성룡에 절하고 물러났다.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전투하면서 기마병으로 그들을 소탕하였던 신립..그도 역시 자신의 조그마한 과거의 승리에 도취하고 있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의 기록에 의하면 신립이 단월역(丹月驛)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몇사람만 데리고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펴보았다. 그를 수행하였던 김여물(金汝物)은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 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신립은 '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신립은 애초부터 자신의 특기인 기마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진족 소탕에 성공한 기마전술..그리하여 조령을 포기한다. 그리고 배수진(背水陣)을 친다. 배수진은 정말 극단적인 처방이다.죽음아니면 승리라는 공식을 두는 것이 배수진인데, 이는 치밀한 작전과 아군의 예봉이 적군에게 강타당하였을 때에 분위기를 타는 것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다.
일 탄금대를 방문한 다산 정약용은 과탄금대(過彈琴臺)라는 詩를 지어 탄식하였다.
영애도진지척개 嶺隘度盡地倜開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강심용출탄금대 江心湧出彈琴臺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 나왔네
욕기신립여론사 欲起申砬與論事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해보았으면..
계문납구계위재 啓門納寇溪爲哉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회음약재성안허 淮陰若在城安墟 회음이 만약 성안에 잇었던들
적치개과정형래 敵幟豈過井荊來 적의 깃발이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아방위조계용한 我方爲趙計用漢 그때 우리가 조(趙나라)이었는데,한(漢)의 꾀를 썻으니
결주색검진불재 刻舟索劍眞不才 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마기지수입수거 碼旗指水入水去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 들었으니
만부용명양가애 萬夫用命良可哀 목숨바쳐 싸운 군사들..그 얼마나 가련한가.
지금인화야심벽 至今燐火夜深碧 지금도 밤이 되면 도깨비불 출몰하여
공사행인간담최 空使行人肝膽催 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