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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을 평화적으로 해소할 ‘제3의 선택’
- 최원식 인하대 교수 · 국문학
필자가 ‘동아시아’를 처음 거론한 것은 1982년이다. ‘한국민족주의론’(창작과비평사)에 기고한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에서 “제3세계론의 동아시아적 양식을 창조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분위기는 암울했다. 박정히 암살 직후 찾아온 ‘서울의 봄’이 또다시 신군부의 집권으로 배반당한 1980년대 초,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반유신투쟁의 선봉에 섰던 1970년대 민족문학운동 역시 느닷없이 엄습한 한파 속에 혈로를 암중모색하는 처지였다.
자연히 1970년대를 되돌아보며 숨을 고르는 형국이었으니, 지식사회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앞 시기의 민족문학론들을 검토한 글이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이다. 물론 초점은 1970년대인데, 그 가운데서 1970년대 말에 제기된 제3세계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제3세계론의 동아시아적 양식’을 거론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1970년대 민족문학론은 제3세계론과 결합함으로써 세계로 통하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출구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약간의 우려가 없지 않았다. 서구(또는 동구) 문학을 전면 부정하면서 아랍 ? 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새로운 전범으로 설정하는 일종의 제3세계주의적 경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3세계주의는 서구주의나 동구주의 못지않은 타자애(他者愛)의 표출인지라, 우리가 딛고 사는 이땅의 소외를 부추기는 것이다. 민중의 숨결이 밴 독특한 장소들을 지우고 모든 것을 시간에 복속시키는 자본의 운동을 염두에 둘 때, ‘장소의 혼’과 소통하는 작업은 언제나 핵심적이다. 이 점에서 제3세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속이론과 함께 새로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라틴아메리카는 한국 또는 한반도와 처지가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당시 한국도 개발독재 드라이브 속에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초미의 문제였지만, 빈부격차가 거의 ‘두 나라(tow nations)' 수준으로 격화된 라틴아메리카보다는 사회적 이동이 훨씬 유연하다고 판단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이름 있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결국 옛 식민지 모국, 즉 유럽 문학의 비판적 확대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그 ‘장소의 혼’에 훈습하여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안했든, 한국문학은 한반도 또는 동아시아의 문맥에 충실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의 종자는 반유신투쟁의 전설이었던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에서 그 싹을 틔우게 됐다. 1980년 출옥 후 김지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에 새로 주목하면서 동아시아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그렇다. 서구로, 동구로, 중동 ? 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로 우회하지 말고 우리가 딛고 사는 동아시아로 귀환하자. 이 회향 속에 ‘제3세계론의 동아시아적 양식의 창출’이란 활구(活句)를 얻었던 것이다.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북한을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배제한 채, 남한의 문맥에서 접근하는 반국주의적(半國主義的) 시각을 넘어 북한을 시야에 넣은 한반도 차원의 일국주의로 나아간 것이 민족문학론이라면, 다시 일국주의를 넘어 한반도가 자리 잡은 지역(region)을 숙고하자는 것이 동아시아론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운동론보다는 문명론적 감각이 승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자본주의와 그 대안을 자처한 소련식 사회주의, 양자 모두를 비판하며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혜를 바탕으로 제3의 선택을 모색하는 일종의 동도론(東道論)에 기울었던 것이다.
필자는 우선, 서구의 도착 이후 더욱 깊은 분열에 빠져든 동아시아 세 나라, 즉 한 ? 중 ? 일을 함께 묶어서 사유하는 훈련을 시작하고자 했다. 임형택과 공편(共編)한 ‘전환기의 동아시아문학’(창작과비평사, 1985)은 그 소박한 첫 작업이다. 서구의 충격을 전후하여 동아시아 삼국문학의 전환기적 면모를 점검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의 편집과정을 거치면서 필자는 동아시아를 하나의 분석단위로 삼는 방법의 풍요로움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색기를 거쳐 필자는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창작과비평’ 1993년 봄호)을 발표했다. 이 글은 무엇보다 소련의 해체(1991)에 의해 촉발됐다. 기왕의 문명론적 시각을 발전시킨 이 글의 초점은 동아시아의 화약고인 한반도의 분단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극복하는가에 있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1989) 이후 도도한 탈냉전의 물결이 동아시아에도 급격한 변모를 가져왔다. 한반도의 분단을 계선으로 남방 삼각동맹(한국 ? 일본 ? 미국)과 북방 삼각동맹(북한 ? 중국 ? 소련)이 완강한 대치하던 것이 한국이 소련과 수교(1990)한 것을 기점으로 월남전에서 싸웠던 한국과 베트남이 정식 수교(1992)하고 급기야 한국전쟁의 적대적 두 축이던 한국과 중국의 수교(1992)로 이어지면서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냉전을 가로지르는 교차수교는 탈냉전의 물결이 동아시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바, 이와 같은 국제적 환경의 변화는 국내 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냉전의 짝패로 출현한 남한 군사독재의 점진적 유연화 과정을 둥지 삼아 마침내 1993년 문민정부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에 고무되어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찬미하면서 유일패권국 지위에 올라선 미국의 일방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지구화(globalization)란 이름 아래 자본의 공세가 전세계적으로 본격화된 것이다. 적화통일의 위험에 시달리던 남한에서도 독일통일에 고무되어 남에 의한 북의 흡수통일을 기대하는 논의가 은연중에 퍼져나갔다. 군사력이 아니라 자본에 의한 통일을 꿈꾸는 이 흡수통일론은 그동안 한갓 대내용이었던 북진통일론의 새로운 부활에 가깝다. 한국의 자신감은 남한경제의 성공에 기초한 것이다.
아시아사회의 자본주의 불임론(不姙論)를 전개한 막스 베버(M. Weber)의 판단을 뒤집고, 주변부사회의 중심부 진입 불가론을 폈던 종속이론을 수정하면서, 남한을 비롯한 타이완 ? 홍콩 ?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의 ‘네 마리용’이 반주변부로 뛰어올랐다. 전후의 폐허에서 부흥한 일본경제를 선두로 동아시아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출현한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시장주의적 미국모델의 몰락과 국가주의적 아시아모델 또는 일본모델의 찬미가 울려퍼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자본주의진영뿐 아니라 소련 붕괴 후 옛 이름으로 복귀한 러시아와 시장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한 중국에서도 은연중에 흥기하는 형국이었다.
특히 유교의 본고장 중국에서 이 경향은 더욱 눈에 띄었다. 그래서 동아시아형 자본주의의 변종인 유교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이 글에 묻어두었던 바, 유교자본주의와 제휴한 반북주의적 경향의 은근한 확산 앞에서 필자는 동아시아론의 중추에 분단문제를 배치했다. 이는 백낙청이 편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동아시아론과 탈국가주의
분단체제의 극복을 동아시아론의 기초로 삼을 때, 한 ? 중 ? 일 중심의 동아시아 연대가 반북동맹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제어하는 한편, 이 담론이 동아시아지역주의로 한정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익하다. 다시 말하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요즘 6자회담으로 실현되었듯이, 분단의 극복에 있어 한반도 주변 4강(미 ? 중 ? 일 ? 러)의 협의를 생략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이 점에서 이미 동아시아의 일원인 러시아는 물론, 특히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음에도 이 지역 전체에 깊은 존재감을 드리운 미국을 동아시아론의 틀 안에서 고려하는 작업은 핵심적이다.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에서 주변 4강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걸치는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동아시아론의 알파요 오메가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최근 분단체제 극복을 중심축에 둔 동아시아론을 다시 풀어보고 있다. 백영서의 제안으로 시작된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문학과지성사, 2003)를 함께 편집하면 주변이라는 시각을 조정중이다. 동아시아를 하나의 분석단위 또는 사유단위로 묶는 데서 출발한 동아시아론이지만 이제는 내부의 불균등에 주목하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계체제의 중심/주변은 이 지역 안에서도 복제된다. 특히 탈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체제 또는 제도적 차이가, 물론 아직도 중요한 변수지만, 탈경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지역 안의 비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지구자본의 포섭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냉전시대의 위계가 목하 복잡한 재편의 도정에 들어선 것이다.
동아시아는 하나가 아니다.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어보는 훈련과 함께 일즉다(一卽多)의 관점으로 풀어서 보아야 한다. 북한과 타이완 ? 홍콩 ? 마카오와 오키나와(옛 琉球)의 관점에서 동아시아라는 주변적 시각을 다시 주변화하는 이중의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동아시아론에도 국가주의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 지역의 중심국가들 ‘중심’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론이 이 지역에 특히 심한 일국주의 또는 국가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훈련이라면, 국민국가를 분해할 수 없는 원자로 실체화하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유연해져야 할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관점
국민국가의 안과 밖에 포진한 독특한 주변부와 함께 국민국가 사이의 경계를 가로질러 분산된 디아스포라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 중 ? 일 ? 미 ? 러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널리 흩어진 한국 ? 조선 동포,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 화교, 그리고 중국의 안과 밖에 걸쳐 있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은 그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틀들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국가간 관계는 국민국가의 해체가 가시화하는 날까지 여전히 중요한 상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급이라는 심급이 주변의 관점으로 인해 유실되어서는 안 된다. 기존의 틀을 감싸되 동아시아론의 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적 거점으로서 ‘주변의 관점’을 내세울 필요가 절실하다.
위기 속에서도 남북간 협력이 힘겹게나마 증진돼가는 대세 속에 동아시아 3국(한 ? 중 ? 일) 사이의 경제협력도 부단히 강화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만의 긴 평화를 누리면서 동아시아의 탈냉전을 실험하고 있는 작금의 정세는 고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경제협력의 증대가 더 높은 단계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출구를 아직은 찾지 못한 실정이다.
이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주변의 관점은 요긴하다. 국가 중심의 교류협력이 동아시아에서 특히 일본의 동향과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반일감정은 한국과 중국에서 계기가 주어지면 일거에 타오를 수 있는 강력한 인화물질이다. 이 때문에 지구화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유연화하는 일반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음에도, 오히려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주의가 강화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현실적으로 교류협력 추세가 진행될수록, 그에 대한 경계심리도 함께 발동되는 이중성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특히 심하다. 아슬아슬한 가운데 순조로운 친교가 진행되다가도 순식간에 그 상태를 무로 돌릴 만큼 강력한 휘발성을 지닌 이 이중성을 어떻게 해체하는가?
결정적인 대국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교적 지역협력이 잘 이뤄지는 동남아시아와 달리 경쟁하는 대국들과 그를 부추기는 분단 한반도로 구성된 동북아시아에서 아세안(ASEAN)이 좀체 출현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鼎足의 터전
동북아시아에 나타나는 지구화의 불균등성을 상생의 조건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한 훈련으로 이제 앞서 거론한 주변들과 함께 도시 사이의 교류를 진지하게 사유할 때다. 지방도시들 사이의 지역주의적 교류가 거꾸로 각 나라 안의 지방분권을 촉진함으로써 이 지역에 우심한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선순환의 효과를 거두리라고 낙관해도 좋을 듯싶다. 바로 이 점에서 동아시아론을 지방분권과 단단하게 결합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지방분권의 실현이 권력지향적 정치주의를 해체하면서 우리 사회의 고질 중 하나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지역감정은 지방에 대한 절망이 중앙권력에 대한 질주로 분출한 일종의 전도(顚倒)현상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할 길이 있다면 구태여 서울을 애타게 바라볼 이유가 없을 터인데, 이 취약점을 박정희 이후 군사 독재정권들이 악용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던 것이다. 그에 대항한 민간 정치 지도자들 역시 싸우면서 배우는 적대적 동반자로 변모하면서 지역감정은 일종의 구조로 내재화했던 터다. 이것이 해체되지 않는 한 동아시아시대의 개화도 없다.
동아시아론의 실험은 곧 한반도 생존전략의 모색이다. 20세기를 지배해 온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그에 대항했다가 몰락한 소련 중심의 세계질서, 그 틈바구니에서 20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했다. 그리고 이제, 중국혁명의 성공 이후 긴 잠행 끝에 중국은 탈냉전의 물결 속에서 부활을 꿈꾸고, 일본은 구미의 후원 아래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군림하다가 탈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주춤거리고 있다. 이 복잡한 합종연횡의 중추에 한반도가 존재한다. 이 십자로에서 한반도가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는가?
탈냉전 이후 20세기적 이념의 구도는 무너졌다. 사실 탈냉전의 기미는 이미 1960년대의 중 ? 소분쟁에서 싹텄다. 사회주의 형제국 소련과 중국이 서로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뜻밖의 사태는 결국 1971년 핑퐁외교에 이은 1979년 중 ? 미수교로 구현됐다. 그런데 중 ? 미수교는 중국으로 하여금 제3세계 지도국으로서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초래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發 평화의 메시지
아시다시피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 아프리카 회의가 열림으로써 ‘제3의 길’로서 비동맹이 처음으로 출현했다. 이 세계사적 회의의 기원은 1954년 인도 델리에서 개최된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어라이(周恩來)의 회담이다. 당시 동아시아는 냉전의 격렬한 충돌장으로 변모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발발에 자극받은 인도와 중국은 이 회담에서 ‘평화5원칙’을 선언함으로써 다음해 성사된 ‘반둥10원칙’의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반둥 정신은 그 후 아프리카에 신생 독립국이 속출하고 라틴아메리카가 가세한 1960년대에 절정을 이룬 뒤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는 자본주의 1세계와 사회주의 2세계 사이에서 제3세력으로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는 대신 다시 분할됐다. 아프리카는 구 종주국 유럽에 포섭되고,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뒷마당으로 편입되었으며, 아시아는 미 ? 소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각축의 축에 한반도가 존재한다. 비동맹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1960년대, 한반도에서는 냉전과 맞물린 분단체제가 본격적으로 작동됐다. 비록 38선의 부분수정으로 휴전했지만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무력통일의 불가능성을 확인했다. 주변 4강 누구도 한반도가 일방의 전일적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남북 양쪽에서 통일은 어느 순간 정권을 보호한ㄴ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 남북 사이에 격렬한 체제경쟁이 시작된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전반적 퇴화과정에서 남한이 반주변부로 올라서는 가운데, 탈냉전의 세계적 물결 속에 분단체제가 흔들리면서 마침내 6 ? 15정상회담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분쟁의 축인 한반도의 분단을 평화적으로 해소하여 동아시아에서 탈냉전을 완결할 절호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비로소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동아시아의 20세기로부터 탈주할 출구가 나타났다. 동아시아론은 이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제3세계론이다.
그런데 동아시아론은 동아시아를 미국과 소련 또는 미국과 유럽연합을 젖혀놓고 새로운 중심으로 내세우려는 패권론이 아니다. 세계적 차원뿐만 아니라 지역 안에서도 일국의 패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냉전의 발화점으로서 탈냉전시대에도 여전히 휘발성을 내장한 한반도의 분단을 평화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형성의 새로운 원리를 탐구하는 동아시아론은 한국발(發 ) 평화의 메시지인 것이다.
<읽어볼 만한 책> ♣ 최원식,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7. 동아시아론을 최초로 제기한 비평집. ♣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0. 중국현대사 연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론을 모색한 사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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