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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통일한 모택동
☞ 참고 ; 윤덕민,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3)> 신동아 1998. 9
모택동(마오쩌뚱, 毛澤東/ 1893.12.26~1976.9.9)은 호남성(후난성,湖南省, 샹탄현 湘潭縣, 사오산 韶山)의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집을 나와 소학교를 1년 남짓 다니다가 삼국지에 대한 논쟁으로 교사와 다툰 후 퇴학당하고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장사 제1사범학교를 5년간 다녔다.
이 학교 교사 양창제( 楊昌濟, 영국유학, 봉건사성 비판, 뒷날 장인 ) 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대학 철학교수로 영전한 양창제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이대조(리다자오, 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청강하였다, 1920년 상하이에서 진독수(천두슈, 陳獨秀)를 만났고, 다시 장사로 돌아와 24년까지 장사 제 1사범학교의 부속 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 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12명의 대표중 한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부부는 서로 다른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가 양부인은 장개석군에 체포되어 1929년 처형되었다.
정강산에 근거를 잡은 모택동은 교사출신 하사정(賀士貞)과 다시 결혼하였으나 장정 때 그녀는 폭격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여 치료차 소련으로 보내졌다.
연안에서 강청을 만나 동거하다 1945년 결혼하였다. 장개석 부인이 송미령(宋美齡)여사가 5캐럿트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 강청과는 모택동이 1976년 9월 84세로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줄곧 함께 살았다.
1924년 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등을 겸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어지자 농민 홍군 3,000명을 조직하여 주덕( 주더, 朱德 )의 군대와 합류, 정강산(징강산 井岡山 )을 근거지로 삼았다.
모택동은 軍民一致 (전투가 없을 때는 군은 주민을 돕고) , 將兵一致 (계급이 없는 군대)라는 기본원칙하에 적추아퇴( 敵追我退 적이 추격하면 후퇴), 적거아요( 敵據我擾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요를 일으키고), 적피아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 적퇴아추 (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 의 유격전술(遊擊戰術)을 확립해 나갔다.
1928년 장개석이 천하통일을 달성하였다. 이 시기 모․장의 대비는 비적과 제왕으로 비교될 수 있었다. 장개석은 1931년 ~1935년 사이 5차례 걸쳐 대규모의 공비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장개석은 선안내후양외( 先安內 後攘外 ; 먼저 공산군을 쳐서 치안을 확보한 다음 외적 일본을 친다 )라는 현실적인 정책을 폈다.
1931년 강서성( 장시성, 江西省) 서금(루이진, 瑞金)에 중화 소비에트정부가 세워지고 모택동이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군에 쫓겨서 34년 10월 서금에서 섬서성 (산시성, 陜西省 ) 연안( 옌안, 延安 )까지의 12,500 km에 이르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전 기간 368일 동안 268일을 쉬지 않고 걸었으며, 18개의 험준한 산과 24개의 강을 건넌 이 행군은 출발할 때 10만명이 종착지에 도착하여서는 불과 8,000명이 살아 남았다.
모택동은 도중에 귀주성 준의( 쭌이, 遵義 )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연안으로 장정한 모택동은 內戰中止 一致抗日을 들고 나와 공비토벌 대장인 장학량을 상대로 심리전을 펴서 장학량으로 하여금 서안사건( 시안사건, 西安事件 1936 )을 일으키게 하였다. 공비토벌을 독려하려온 장개석을 부하인 장학량이 감금하고 모택동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 사건이다. 이 때 주은래가 중개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수립되어, 모택동 주은래의 홍군은 국민혁명 제 8로군으로 개편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모택동은 칠분항전 (七分抗展, 공산당 세력확장을 위하여 70% 힘을 쏟고), 이분응부 ( 二分應付,국민당과의 협상을 위해 20% 노력하고), 일분항일 (一分抗日, 항일에 10% 힘을 기울려라 )의 지령을 내려 세력을 확장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모택동은 새 중국 건설 문제를 놓고 <연합정부론>을 들고 나와 1945년 8월 장개석과 重慶 회담을 하면서 시간을 벌어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다.
모택동은 1946~48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1958년 제2차 5개년 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이는 철저하게 실패하여 국가 주석 자리를 劉少奇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여 중국을 무질서와 혼란으로 몰아넣어 중국을 크게 퇴보시켰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유소기 (류샤오치, 劉少奇 )를 실각시켰다. 1969년 모택동-임표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임표(린뱌오 ,林彪 )가 反모택동 운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현대 중국은 개방적 실무파와 공산주의 강경파의 투쟁 즉 專과 紅의 투쟁이 계속되어 왔다. 모택동이 홍노선인데 대하여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 등은 실용주의에 기초하여 부강한 현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專의 노선이었다. 모택동은 專이 우세하게 되면 이를 견제하였다. 1950년대 후반의 대약진운동, 1960년대 후반의 문화대혁명, 1970년대 초반의 비공비림 운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것은 문화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 톈안먼사건, 天安門事件) 1) 이 일어나 모택동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