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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國弓), 왜 궁도(弓道)여야 하는가
- 활의 유래와 의미를 통해 본 궁도(弓道)
우리의 전통 활(弓)을 국궁(國弓)이라 부른다.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洋弓)에 대응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국궁은 활 자체를 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국궁이란 말을 우리 전통 활쏘기 전체를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양궁을 '보(bow)'라고 하고 서양식 활쏘기를 '아처리(archery)' 라고 칭하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 활쏘기도 포괄적인 용어가 정해져야 한다. 이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규정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궁도(弓道)'와 '궁술(弓術)', '활쏘기' 등에 대한 용어의 혼용이 그 예이다. 특히 이제는 전통 활쏘기도 세계화를 위한 발돋움이 필요한 때가 되었기에 이러한 용어체계의 정립은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여기서는 우리의 전통 활쏘기에 대한 역사고증학 같은 문헌적 접근 보다는 활과 관련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구전설화나 활에 부여된 의미 등을 통한 사상적 접근을 통해 왜 '궁도(弓道)'라는 용어로 통일시켜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활(弓)의 유래와 의미
'궁(弓)'은 우리말로 '활'이라 부르는데 순우리말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활'이란 말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문헌상으로 전해지는 것에는 '활(活)'이란 말이 보이기도 하지만, 발음상의 표기일 뿐 그 유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고곡학적 관점에서 보면, 활(弓)은 범 세계적으로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까지 나타날 정도로 그 기원이 오래되었고, 어느 특정 지역에서 발생 했다기보다는 인류의 보편적 발명품이라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활은 전통속에서 전승되거나 전해지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어 특이하다.
우리 민족에게 활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상고시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종족명칭으로 '이(夷)'가 있다. 흔히 '동이(東夷)'로 칭하는데 중국의 중화(中華) 중심주의 사관(史觀)에서는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로 부회한다. 그러나 '이(夷)'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오랑캐와는 무관한 '활(大弓)'과 관련된 종족명칭임을 알 수 있다.
중국 후한(後漢)시대 때만 해도 허신(許愼)이란 학자가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자전에 "이(夷),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 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을 일컫는 이(夷)가 동방사람으로 대인이며 활(弓)을 추종하는 것으로 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대목을 보면 이(夷) 사람들의 면모가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유 동이종대 대인야 이속인 인자수 유군자불사지국(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이라 하여 동이사람들은 대인으로 풍속이 어질고 장수하며 군자가 있어 죽지 않는 나라로 소개되어진다.
동이를 바라보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기원전 5세기경 춘추전국시대 공자 때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이(夷)'가 오늘날 주장하는 '오랑캐'라는 의미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대인(大人)', '대궁(大弓)'의 의미였음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에게 활(弓)은 어진(仁) 민족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활(弓)이 인류보편적 발명품으로 여겨진다고 하는 것은 그 유래나 전파경로에 대한 흔적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 활의 발명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전래되는 구전설화가 하나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설화의 전거(典據)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활에 대한 우리 옛 조상들의 생각이나 관념을 엿볼 수가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그 설화는 우리의 유구한 전통인 장례(葬禮)와 관련이 있다.
죽은 사람을 문상할 때 사용하는 '조(弔)'라는 한자(漢字)가 있다. '조상하다', '조문하다' 등을 뜻하는 '조(弔)'자의 문자 기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둘 이상의 문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회의(會意) 문자로 활(弓)과 사람(亻:ㅣ)의 합자로 나온다. 그 의미에 대해 "옛날 조상할 때에는 짐승을 막기 위하여 사람이 활을 가지고 갔다고 함"이라 되어 있다. 문상을 가는 데 활을 가지고 가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한자(漢字)는 사실 중국사람들이 창제한 글자가 아니다. 여기서 한자(漢字)를 동이족의 일파인 은(殷)나라의 상형문자에서 시작되었다는 등의 논의를 펼칠 게재가 아니라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한자는 고대 동북아시아에 확산되어 발전된 오늘날의 영어와 같은 세계적 공용어의 문자로 보는 편이 맞겠다. '조(弔)'라는 글자를 활(弓)에 살(ㅣ)을 매긴 모습으로 보기도 하는데, 한자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활을 가지고 가는 문상의 풍속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면 안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활(弓)은 '효(孝)'를 상징하는 기물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활은 사냥의 도구로 알려져 있다. 사냥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면 효(孝)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효(孝) 자체의 상징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오래 전 옛날에 죽은 망자(亡者)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발명된 도구가 바로 활(弓)이며 그로부터 나오게 된 말이 조문을 뜻하는 '조(弔)'라는 글자라는 것이다. 망자는 주로 부모가 될 터인데 부모를 기리며 시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쓰였으니 효(孝)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역사에서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으며 '이(夷)'는 '큰 활(大弓)'을 뜻한다고 기록한 사실을 보나 앞으로 소개할 구전 설화를 보나 우리 민족에게 활(弓)은 곧 효(孝)이다. 이는 '이(夷)'가 어진 풍속을 지녔다고 한 사실과도 매칭되고 있다.
- 문명이 꽃피기 훨씬 오래 전 옛날에, 인간이 아직 동물을 사냥하는 수렵(狩獵)이라는 행위조차도 모르고 나무 열매나 따서 먹고 살던 채집(採集) 생활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땅에 매장하거나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나 짐승들이 시신을 뜯어먹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조장(鳥葬)이라 하여 새에게 시신의 살을 먹게 하는 풍속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호아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호아루는 평소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자(孝子)였다. 호아루도 마찬가지로 자기 아버지가 죽게 되자 들에다 시신을 버렸다. 하지만 자기를 낳아서 길러 준 아버지의 신체(身體)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돌을 던져서 짐승들을 쫓아내고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짐승들이 물러가지 않고 계속하여 틈만 있으면 다시 다가오니, 호아루는 돌을 던지는 힘을 덜 소모하기 위해 탄력성이 있는 나무를 땅에 대고 휘어서 그것으로 돌을 튕겨서 짐승을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무를 휘어 줄에 묶어 그 줄을 당긴 다음 곧은 나무가지를 걸어서 줄을 놓으니 그 곧은 나무가지가 날아가는 것이 돌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다. 그 때에 사람들이 호아루의 심성에 감동을 받아 그들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시신을 지키는 것이 풍속이 되었는데, 모두들 호아루가 만든 그 물건을 가지고 짐승을 쫓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호아루가 만든 것이라 하여 '호아루'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그 말이 줄어서 '활'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계기로 시신을 혼자 지키기 보다는 서로 지켜 주는 풍속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문(弔問)'이다. 조문(弔問)을 오는 사람들도 모두 그 활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망자의 시신을 같이 지켜 주게 되었는데, '조(弔)'는 활과 화살을 말한다. 호아루는 동이족(東夷族)의 먼 조상이며 우리 족속에게서 최초로 활이 나왔기 때문에 활의 제작에서부터 활에 관한 모든 것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족속들이 우리를 일러 '이(夷)'라고 불렀다.
(정읍 수천선생 傳) -
이상의 설화에서는 '활(弓)'이 '호아루'라는 사람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호아루'라는 설화상의 인물이 최초로 활을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 자체를 부정하거나 신뢰하거나 하는 논의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듯 하다. 어차피 설화는 설화이고 그 설화가 전하는 의미만 캐치하면 되는 것이니까. 활이 우리 민족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설화의 결론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왜 우리의 활이 우수하고 활을 잘 다룬 '이(夷)'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의 활에 대한 기원을 얘기하는 최초의 설화라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활과 관련하여 10년전 타계하신 정읍의 한 어른께서 전해주신 활에 대한 가르침 한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동양학에서 말하는 '기(氣)'의 운용측면과 연관되어 전해지는 내용이라 하는데, 생활 풍속으로서의 활쏘기는 활의 기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한 삶을 중시하여 일 년 사계절 중 24절기(節氣)를 의미있게 지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절기란 단어를 잊고 살지만 특히 농경을 주로 했던 옛날에는 절기마다 행사를 벌이거나 그에 맞춰 음식을 먹거나 하는 각종 이벤트가 있었던 것이다. 전통 활쏘기 또한 절기에 맞춰서 마을마다 대대적으로 행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활은 가슴을 활짝 열면서 밀고 당겨야 하는데 그 때 갈비뼈가 벌어지며 가슴이 열리기 때문에, 24절기 날에 맞춰 활을 힘차게 당기면 그 때의 절기에 맞는 자연의 기운이 열려진 몸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대자연의 건강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계절 기운을 잘 타면 사계절 변화무쌍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기운차게 장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든 노인들이 궁력(弓力)이 붙어 활을 당기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이유의 하나도 단순히 근육의 힘을 길러서가 아니라 활의 기운을 타고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여성들의 경우 임신 전의 여성들에게는 활쏘기를 금하였는데 세찬 활의 기운으로 인해 임신이 잘 안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아마조네스 같은 여전사들의 이미지가 그려지는데, 그래서 임신이 더 이상 안되는 중년부인이나 임신이 필요없는 기생들이 활을 많이 쏘았다고 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나 동양학적 측면에서 활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기에는 좋은 내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통 활(弓)에는 유래와 의미가 함께 전래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과연 이러한 내용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보았을까. 결론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은 활(弓)을 효(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효(孝)라고 하면 유교적인 관념이나 사상을 이야기 하는데, 효(孝)는 부모와 자식간에 이루어지는 인류 보편적인 삶의 기초질서이자 규범이다. 다만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들이 부러워 할만큼 생활 속에서 효를 더 강조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는 사실이 다른 점일 것이다. 활을 통한 효(孝)의 실천이라기 보다는 활을 통해 효(孝)를 항상 되새기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서처럼 단지 사냥의 도구나 전쟁에서의 무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군자(君子)는 경쟁하는 바가 없으나 활쏘기에서는 경쟁한다"는 내용이 있다. 정읍에 있는 국궁장 '필야정(必也亭)'의 명칭이 유래한 고사인데, 《논어(論語)》 팔일(八佾) 7章에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 필야사호(必也射乎)"라는 대목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투지 않음에도 활쏘기에서만은 다투고 경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활쏘기가 원초적인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서가 아니다. 군자가 활쏘기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활을 잘 쏘아서 남에게 이기는 차원의 경쟁이 아니라 활을 쏘기 위한 절차에서의 예절을 지키는 행위를 남과 경쟁한다는 것이다. 활을 쏘기 위해 사대에 오르기 전 세 번 읍(揖)하는 행위, 사대에서 내려와 상대를 기다려서 이긴 자가 읍하면 진 자로서 서서 술을 한잔 마시는 행위, 그러한 행위들을 예의로써 온화한 태도로 엄격하게 지키는 행위를 경쟁하는 것이다. 승부를 겨루는 소인(小人)들의 경쟁과는 다르다. 활쏘는 행위 자체보다는 활을 쏘기 위한 절차상에서의 예절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 활쏘기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문무(文武)를 따지지 않는 누구나 익혀야 할 생활습속이자 중요하게 다루어진 오랜 전통이었다. 활을 사냥이나 전쟁에서의 도구나 무기로만 여겼더라면 활쏘기가 그렇게 대단한 전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각 지방마다 경당(經堂)이라는 국가기관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다는 사실에서처럼, 활쏘기를 통해 도리와 예의를 익히는 심신단련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인데 활을 쏘는 행위에는 의미있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민족의 활과 관련한 설화에서 전하는 효(孝) 일수도 있고 공자가 전하는 예(禮)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바로 '궁도(弓道)'라고 하는 단순한 '궁술(弓術)'과는 다른 고차원의 의미부여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궁도(弓道)와 궁술(弓術)
옛날의 활쏘기 시합은 엄격한 예의와 절차가 따랐는데,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전통 활을 '국궁(國弓)'이라 하고 활 쏘는 것을 '궁도(弓道)'라고 하여 활터에 가면 활을 쏘는 데 지켜야 할 도리인 '궁도구계훈(弓道九戒訓)'을 익혀야 한다. '궁도구계훈'의 내용을 보면 활쏘기가 단순히 기예나 기술을 연마하고 익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전통 활쏘기를 '궁술(弓術)'로 본다면 활쏘기를 위한 기술만 익히면 될 것을 굳이 아홉가지 계훈까지 두고 활터에서 예절을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양궁(洋弓)처럼 일정한 규칙과 절차만의 스포츠로 즐기는 차원에서 그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보다 과학화된 양궁에 밀려 아마도 전통 활쏘기는 존립자체가 힘들 것이라 본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 활쏘기는 더욱 단순 스포츠화를 지양하고 '궁도(弓道)'라고 하는 심신수련의 전통으로 삼아야 하는 의의가 있다.
'궁도(弓道)'와 '궁술(弓術)'의 차이에 대해, 옛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연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있다. 세조 14년(1,468년, 戊子) 1월 16일(丁丑) 기사에 세조가 세자에게 짐승을 쏘는 도리를 써서 주는 대목이다.
- "금년 봄에 왕방산(王方山)·보장산(寶藏山) 등지에서 사냥을 하려 하니, 너의 아비의 구적(舊迹)을 추술(追述)할 것이나, 너는 혹 지극한 도(道)라고 이르지 말 것이니, 이는 소년 제왕(諸王)의 일이다. 옛날 내가 바야흐로 연소(年少)하였을 적에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여, 많은 영걸(英傑)과 겨루고 다툴 때에, 기운이 한 시대에 웅장하고 재주가 많은 무리 가운데에 으뜸하여, 힘은 달리는 소(牛)를 제어하고 뛰어서 달리는 말(馬)에 미치었다. 백 번 발사하여 백 번 적중하고, 한번 채찍하여 열을 죽이며, 괘부(掛釜)하는 장소에서 사슴 70을 쏘고, 동위(東葦)의 장소에서 17마리의 노루를 연달아 죽이었다. 날으는 사슴을 죽여 떨어뜨리고, 놓인 준마에서 이탈하여 서는데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궁도(弓道)의 여기(餘技)'이며, 군중(軍中)에서 흑골(黑鶻)의 대(對)로 일컬어졌다. 그 때에 스스로 그 도(道)를 쓰기를, '확강한 도(道)는 굳고, 부리지 못하는 것은 충효(忠孝)뿐이다.' 하였다. 또 부연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재주가 출중(出衆)하지 못함이 부끄러운 것이며, 덕(德)은 어질지 못함이 부끄러운 것인데, 그 재주는 있으되 그 공(功)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만일 부끄러워하면 어진 일을 함만 같지 못하며, 어진 것은 충효(忠孝)뿐이다.' 하였다. 또 강무(講武)하는 도(道)를 쓰기를, '기운(氣)은 반드시 크게 편안하고, 마음(心)은 반드시 확고하며, 말은 준마(駿馬)이어야 하고, 화살(矢)은 가늘어야 한다. 기운이 편안하면 마음에 근심이 없고, 마음이 확고하면 물건(物)에 사이가 없으며, 말이 준마이면 반드시 미치어 가고, 화살이 가늘면 어그러짐이 없으니, 대저 곡망(梏亡)하지 않는 까닭으로 기운이 편안하고 눈앞에 두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근심이 없고 아는 것이 지극히 밝으며, 조수(操守)함에 근본(素)이 있는 까닭으로 마음이 확정된다. 뜻(志)을 정(定)한지 이미 오래 되어, 순(順)을 어기고 동(動)함이 없는 까닭으로 사이가 없으며, 말이 준마인 것은 하늘의 용맹(勇猛)이고, 화살이 가늘은 것은 사람의 공력이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궁도(弓道)를 다한다.'고 하였었다." -
원문에서 '궁도(弓道)'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궁도의 여기(餘技)'라고 한 '여기(餘技)'가 전문적이 아닌 취미로 하는 기예나 기술을 뜻하는데, 바로 궁술(弓術)을 가리키는 말로 여겨진다. 세조가 활쏘기를 잘하여 살생도 쉽게 하는 등 재주를 과시하는 궁술(弓術)에 빠져 궁도(弓道)를 잊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함께 반면교사의 사례를 가르치는 대목으로 궁도(弓道)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렇듯 기록으로도 궁도(弓道)라는 말과 그 의미가 등장하는데 굳이 궁도라는 용어 이외에 다른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요즘 궁도(弓道)냐 궁술(弓術)이냐에 대한 논의가 많은 줄 아는데, 단언하건대 우리의 전통 활쏘기는 '궁도(弓道)'라는 이름으로 정립되어져야 한다. 그냥 활만 잘 쏘아 맞추고 실전 활쏘기라면서 잘 맞추는데만 집중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궁술이자 '궁도의 여기(餘技)'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궁술(弓術)이나 활쏘기 라는 용어를 폐지시키자는 게 아니다. 전국 궁술대회, 전국 활쏘기시합.. 등의 대회명칭에는 그렇게 쓰는 게 맞다. 시합이나 대회는 궁도(弓道)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도대회' 라는 용어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궁도라는 시스템 및 절차를 포괄하는 제도 하에 궁술대회나 활쏘기시합 같은 단순 기예를 다루는 스포츠형식의 경기가 있고, 강습이나 습사(習射) 같은 때는 궁도의 개념과 의미를 적용하고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일본의 규도(kyu-do)처럼 정부차원에서 학교를 통해 전파 강습시킬 수준은 아니더라도, 궁술보다는 궁도여야 차후 배움터인 학교에서도 심신수련 목적 및 전통계승 차원에서 연계발전 가능성이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리의 전통 활쏘기는 과녁과 사대와의 거리가 145m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궁술보다는 궁도의 개념이 더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과녁과의 거리로 세 종류가 등장하고 있는데, 240보, 150보, 80보가 그것이다. 1보(步)가 110cm정도이므로 각각 264m, 165m, 88m가 된다. 150보에 해당하는 165m는 오늘날의 과녁과 거리와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 그런데 145m나 떨어져 있는 가로세로 2m나 되는 크다란 과녁을 맞추는 것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활의 용도와 사용이 줄어들면서 궁술 차원의 맞추기 중심의 90m나 48m는 무의미해져 버렸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궁도로서의 의미만 남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글로벌시대 우리 전통 활쏘기를 발전시키려면 90m와 48m에 해당하는 50m 과녁도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가능해지고 차별화가 눈에 띄게 되는 것이며, 이는 궁술 차원의 발전이자 확대가 되겠다. 즉 궁술대회로써 장거리,중거리,단거리 세 종목이 구축되는 것이고 복합거리까지 포함시키면 최소한 네 종목이 구축된다. 기왕의 대회라는 생활스포츠로써의 다양한 재미도 부여될 수 있다.
궁도라는 용어를 일본에서 먼저 전파시켰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인 듯 하나, 이는 오히려 일본을 의식한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아직도 국궁장에서의 과녁 가운데에 일제시대부터 유래하였다는 일장기의 적색원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짐승 얼굴을 그려 넣은 것과 같이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원래의 과녁에 사용한 궁도의 한가지 마음을 뜻하는 '동(同)'자로 변경해야 한다. 그리고 서구문명과의 교류에 앞서간 일본이 서양에 먼저 소개하면서 용어를 주창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일본 것이라고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 일본은 우리와 달리 각자의 역할이나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대를 이어 물려주고 받을 정도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런 문화적 풍토에 의거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그 일환으로 유달리 '도(道)'자를 많이 사용하여 유도(柔道), 검도(劍道), 다도(茶道) 등의 전문분야에로의 승격화 용어가 많다. 일본에서 유도나 다도 같은 단어에 붙이는 '도(道)'의 의미는 '전문적인 분야로 학문이나 기예'를 뜻하는 용어이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심신수양을 위한 도리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 점에서 착오가 있으면 안 된다.
일본의 '규도(kyu-do)'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A Japanese form of archery'라고 되어 있듯이 단지 궁도의 일본형식일 뿐인 것이다. 어차피 활은 각 나라마다 전해져 왔고 길이가 2m나 되는 긴 활을 쏘는 일본의 '규도(kyu-do)'는 일본 고유의 활쏘기를 말할 뿐이다. 우리는 '궁도(gung-do)'라고 전할 것이고 영어사전에는 'A Korean form of archery'라고 적시될 것이다.
아직 영어단어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지만, 인터넷 위키피디어(Wikipedia) 사전에는 엄연히 '궁도(gungdo)'라는 단어가 'Chinese archery' 및 'Kyudo'와 나란히 소개되고 있었는데,(http://en.wikipedia.org/wiki/Gungdo) 작년부터 슬그머니 '국궁'이란 용어로 바뀌었다. 시류에 따르는 위키의 성격상 누군가의 주장이 먹혀들었겠지만 고려해봐야한다.
궁도라는 말을 버리면 오히려 우리의 국궁은 양궁에 밀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활쏘기로 알리면 된다. 다만 그 전에 용어의 통일과 일원화된 운영체계 확립 및 복장규정 등의 선제적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첫댓글 글쎄요
한국과 일본의 道 개념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그들과의 문화적 차이, 깊이로 인한 것이지, 道라는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라는 것에서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道術에서 術이란 道가 드러나는 한낱 방편이고, 잔재주일 뿐입니다. 일본의 장인 정신은 道보다는 術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백제가 그 術의 화려함으로 망했듯이, 일본도 그 전철을 따를거라 생각합니다. 필야사호(必也射乎)는 활쏘기는 반드시 그래야(無所爭)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거 같은데...
엣날우리조선에서는 유교를 다스림의근본으로삼아 우주의이치와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근본이념 에만 도라는 말를썻고
창칼활 글씨등은 예나술로서 표현했습니다검술 궁술 의술서예등으로씁니다
몇넌전 문화체육부를 통하여 대궁에 왜 궁도 냐고물었더니 궁도구계훈에의거하여 궁도라 하며 용인대 김아무개교수란
사람을시켜 지금처름 실록내용을 들먹이며 궁도라는말이 나오므로 궁도라함이 무방하다 하기에 한자해석실력이 좋지
않는저는 그려려니 하고 승복할려 햇는데 회원님중에 한자원문 해석에 박식하신 분이 해석하여이르되 문맥상으로궁도란말이 활로써짐승을 잡는방법으로 해석이되며 도덕적의 아주높은가치인도를지칭하는말은
아니라고 해석하여주시고 세조는 조선의 기틀을 바로세운 왕인데 활을들고 자식앞에서 이것이 도라고 가르치지는않은것같슴니다 일본도우리의 영향으로 17세기까지는 궁술 검술등술로사용타가 막부시대에 무를 아주숭상하고난후 도라고불렀다합니다
활터에서 이런종류의 이야기를 하면궁도라고 맹신하며 정간에절잘하는사람많습니다
자기나름대로 믿는겄을 이젠저도 더떠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기가좋아 믿고 따르는사람은누구의말도 귀에들어오지않습니다
끝으로 여러사람이 보는글은 존칭은 못쓰더라도 남을 가르치는조로 반말로 끝을맫지않았으면 합니다
괞히 기분별로입니다
올습니다.
엄동2 님의 의견 좋습니다.
그런데 원래 본문은 자기의견을 평어로 쓰는 것이 아닌가요? 가르친다거나 반말로 받아들여졌다면 송구하군요.
유목민님 다른 카페에서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양자강에서 활약하시었다고 하시며 중국의본토가
우리조선땅이라며 강력히 주장하던 분이 있었는데 혹시 그분아니십니까?
글체가 너무닮아생각이납니다
역사 글을 쓰기는 하나, 그 글은 제가 아닙니다.
우선, 일본에서도 '도' 라는 것은 정신수양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습니다. 활쏘기의 기술적 측면과 정신수양적 측면은 적어도 중국, 조선, 일본에서는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근대에 들어와서 무기로서 퇴출이 된 활에 정신수양을 강조하며 그것이 국가주의, 네셔널리즘과 연결시킨것은 일본이 한발 앞서있었지요. 결국 '도' 라는 것은 대단히 근대적인 창조물이며 의도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전통을 표방하는, 그리고 그 전통이 근대 이전의 것을 표방하는 우리 고유의 활과 사법에 굳이 도를 붙여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정신적 수양은 분명히 전근대서 부터 있었던 것입니다만 그것을 굳이 '도' 라고 표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전근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정립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우리가 정하면 되는것이고, 전근대의 사람들이 정해놓은게 있다면 그것에 따르는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결정 입니다. 그러나 어느쪽이건 간에 '도' 라는 것은 위의 엄동2 님이 말씀하신대로 사용되는 맥락이 달랐습니다. 언급하신 조선왕조실록의 '궁도' 라는 표현또한 원문에 입각한 올바른 해석과 맥락을 파악한 그 표현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해야 할거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궁도라는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매우 희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장 근대신문에서만 봐도 궁도라는 표현은 일본의 문화용어의 선점이라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
다. 현재의 우리는 궁도라는 표현을 세조실록에 근거하여 사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1930년대에 일제의 문화적 거대담론의 선점으로 인해 사용할수밖에 없게된 궁도를 사용하는것입니까? 1991년에 발간된 '우리나라의 궁도' 라는 책(조선왕조 실록이 db화 되기 이전)은 궁도를 이미 일반명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조실록을 언급하며 우리의 궁술이 궁도로 치환될수 있다라는 언급또한 없습니다. 정신수양을 표방하는 '도'라는 개념은 이미 일제시대 일본이 선점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세조실록의 그 한구절을 인식하며 궁도를 써왔던것이 사실일까요?
일본이 道라 해서, 우리는 道라 하면 안된다...우리에겐 茶飯事가 일본에선 茶道로 불립니다. 그들에게 道란 그렇게 인위적으로 꾸며내는 그런 作爲적인 것입니다. 術이란 道에 이르는 과정이고 방편일 뿐입니다.
일본에서 말하는 궁도(弓道)를 의식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오히려 우리가 너무 일본을 의식하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궁도는 전통적인 우리의 궁도를 말하는 것이지 일본을 흉내낸 궁도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당연히 현재의 궁도협회를 두둔하는 발언은 더욱 아니고요.
궁도(弓道)란 말이 전거가 별로 없다고 해서 없었던 용어는 아니겠지요. 다만 도(道)의 차원이니까 당연히 기록에 오를 필요가 없거나 감히 올리지 않은 것이겠죠. 궁도만 그런가요? 성리학 관련 서적 아니면 보기 힘든 말입니다. 제 말씀은 궁도가 예전에도 있었던 말이니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도(道)를 찾아서 정립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정신적인 교훈도 필요한 시대이니 일부러 궁도를 세우는게 국궁의 전파와 계승을 위해 더 효과적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궁도가 예전에도 있었던 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근거 자료가 세조의 말 이외에 또 어떤 자료가 있는지 제시해주시겠습니까?
@사랑방지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세조의 말만해도 충분한 근거자료 아니겠습니까. 세조가 없는 말을 지어낸것도 아닐테고 말이지요.
@유목민 활쏘기는 궁도가 아니라 '궁술, 사예' 등으로 불렸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수 백가지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방지기 당연히 도라 칭하는 것보다 술이나 예로 칭하는게 많겠지요. 도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을테니까요.
@유목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바 그대로의 이유로 활쏘기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서 '궁도'를 쓰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사랑방지기 어색하다기보다는 귀한 단어라 일상화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보는게 맞지않을까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궁도는 큰 범주로 보자는것이죠. 당연히 궁술이나 활쏘기란 말이 상용으로 쓰일테니까요.
@유목민 조선의 儒敎에선 선비(士) 외는 모두가 그냥 術이고 禮일 뿐이었습니다. 조선의 유교는 통치의 방편이고 이념일 뿐으로, 그 유교의 명분에만 매달려 인간을 구속하고, 갈래 지웠던 굴레였습니다. 조선의 유교는 우리의 원래 문화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문화입니다.
@처사 유교를 왜곡되게 보시는군요. 조선의 통치이념은 유교가 아니라 성리학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자 사상인 것이지요. 유교란 말은 훨씬 후대에 나온 말입니다. 성리학 같은 철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나라는 역사이래로 없을겁니다. 왕도정치를 성리학적 통치술로 표방하여 도리에 어긋나지않게 다스리려는 도의정치를 펴고자한 나라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그냥 술이고 예의 방편이 아니라 도의,도리를 생활에까지 접목시키려는 도의정치가 조선의 자랑스러운 통치기반입니다.
유교가 후기에 변질되는 모습을 보였다고해서 우리의 원래문화와 동떨어진게 아닙니다. 공자가 중국에서는 도가 펼쳐지지 않아서 한탄할때도 동이에는 군자들이
@처사 살고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선조들부터 유교적 도의,도리가 생활화되어 있었던거지요. 오늘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리,도의가 남아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유교적 도의는 체질화된 우리전통입니다.
그 성리학 이념 때문에 조선시대엔 불교나 仙家가 그렇게 핍박 받았나 보지요.
활을 쏘면 도를 이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