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이 미 숙
점심으로 냉장고에 있는 콩나물무침, 시금치무침 상추 등을 꺼내 고추장 넣고 대접에다 비비면서 침을 삼키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누굴까? 택배나 우편물이라도 온 것일까? 홈오토메이션에 비친 사람은 여자였다. 여자라는 것만 식별이 가능할 뿐 누구인지 구분이 안 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503호라고 했다.
현관문을 열자 그 여자가 떡이 담긴 호일접시를 내밀면서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요즘은 이사했다고 떡을 돌리는 사람들이 좀처럼 드문 일이었는데 아직도 시골의 정서가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이하게 여겼다. 어쩌면 인간미가 있을 것 같은 여자로도 보였다.
남편은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그 여자를 출근하다가 종종 본다고 하였다. 허겁지겁 자동차 키를 쥐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덜 마른 머리를 매만지면서 나가는 걸 볼 때도 있다고 했다.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남편이랑 같이 타고 내려갈 때도 있었는데 남편이 어디 출근하느냐고 그 여자에게 물었더니 무얼 좀 배우러 다닌다면서 구체적인 것은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하였다. 남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묻는다는 것도 결례인 것 같고 그저 인사치례로 의미 없이 물어본 것이라고 했다. 그 나이에 참으로 부지런한 아줌마라고 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얼굴이 검었고 뚱뚱한 몸집으로 후덕하게 보였다. 늘 정장을 하고 나가는데 직장에 출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후 2시쯤 쓰레기를 들고 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그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 남자는 늘 어김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 오곤 했다.
그런데 여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복도식의 작은 아파트가 덥기도 하고 음식냄새가 나서 현관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503호 집은 우리아파트보다 10평이 더 컸다. 그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속이 상했다. 우리는 4식구가 작은 평수에서 사는데 두 식구 사는 503호가 10평이 넓다는데 은근히 속이 상해 그 사람들이 말을 붙이기 전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며칠 전에도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그 여자가 언제 시간 내서 밥을 같이 먹자고 하였다.
날씨가 36도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였다. 현관문 쪽 복도의 유리창을 통하여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여 그날도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503호네가 현관문을 열어놓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집들은 복도식인데 그 집만 계단식이어서 현관문을 열어놓지 않아도 집이 시원할 터이고 뿐만 아니라 에어컨이 있을 터이니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아파트 주변을 산책이라도 할 양으로 부채를 들고 나오다가 나는 비명소리에 뒤로 넘어질 뻔 하였다.
“아악!”
그건 정녕 503호네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이 분명하였다. 살인사건이라도 났단 말인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503호의 현관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었다.
“살살 밀어 넣을 테니 가만히 있어 봐.”
“알았어. 살살 잘 좀 밀어 넣어봐.”
나는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하였다. 나는 토할 것만 같아서 입을 막고 엘리베이터를 향해가면서도 속이 메슥메슥 했다. 그들은 아마 며느리 사위 다 보았을 나이인데 이웃에게 들릴 정도로 초저녁부터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변태 부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사 왔을 때 떡을 돌리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던 말이 의미가 담긴 말이었어. 풍기문란으로 503호를 쫓아내야 할까봐. 그래서 떡을 돌렸구나. 어느 소프라노 성악가도 오스트리아에 유학 가서 그랬다고 하잖아. 아파트에 살면서 발성 연습을 할 때 주민들에게 잘 봐 달라고 먹을 것을 돌렸대.”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이 푹푹 삶아댔다. 달아오르는 볼에 대고 부채질을 더욱 세게 해댔다. 우리는 40대인데도 소 닭 보듯이 하고 사는데 그들은 아마 변강쇠와 옹녀가 만났음이 틀림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뚱뚱한 사람은 성욕도 별로라는 속설도 말짱 헛소리이고 그 여자도 수더분하게 생긴 게 그것을 그리 밝힐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남녀의 일이란 정말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부채질을 해대고 있는데 마침 노래교실에 다니는 304호도 덥다면서 손으로 얼굴에다 부채질을 하면서 다가왔다. 입이 근질거리던 참에 304호를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503호가 정말 이상해. 그 나이에도 섹스를 굉장히 밝히나봐. 그것도 초저녁부터.......우리는 일 년에 섹스를 두 번도 할까 말까인데.......”
“죽어도 좋아 라는 영화도 못 봤어. 노인네들이 좋아서 난리치는 거 봐라. 그걸 열심히 해야 젊어진다더라. 뭐라더라....... 그걸 하면 엔도르핀의 몇 천배가 되는 다이돌핀이래나 뭐래나 암튼....... 좋은 호르몬이 엄청나게 나온다잖아. 그리고 그런 행위는 일종의 스포츠라고도 한다잖아. 자기네가 이상한 거야. 남편한테 503호 얘기하면서 자극을 줘봐.”
“우리 집 웬수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약을 아무리 먹어도 말짱 헛일 이야. 어쩌다 거시길 해도 아무 재미를 못 느껴. 내가 흥미를 느낄 때쯤이면 저만 슛 골인 하고는 벌러덩 나자빠지는 걸.”
“자기네 옆집 사람들이 좀 심하긴 하다. 8시 조금 넘었는데 노인네들이 난리를 치는 건 아무래도 좀 심하지.”
우리들은 이제 그들을 노인네라고 부르면서 더더욱 별종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50대 초반 정도는 노인으로 부르기엔 억울할 정도로 젊었다. 그 여자가 무언가를 배우러 아침 일찍 다니는 걸 보면 아직 노인네라고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나이에도 긴 머리에 청바지차림으로 캐주얼하게 입고 다녔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아가씨였다. 우리는 지금 그들을 질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그런 행위를 이상하게 보지 말고 인정을 해주자고 했다.
계모임이 있던 어느 날, 친구들은 우리 집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우리 집에서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웃고 떠들었다. 실컷 수다 떨던 친구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찬거리를 걱정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또 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귀를 쫑긋했다.
“얘들아, 들었지? 옆집에 강도 들었나봐.”
“아냐. 그런 게 있어.”
“그런 거 뭐?”
“궁금하면 그 집 문 앞에 가서 잘 들어봐”
친구들은 그 집 현관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쫑긋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그 애들도 나처럼 구토를 할 것처럼 입을 막고는 등을 돌렸다.
“별꼴이다. 대낮부터 낮거리하나봐. 목소리는 새 신랑 새 신부 같지는 않던데.......”
“너희들 지금 질투하는 거지?”
“이사 가라고 해. 풍기문란이다, 아이들이라도 들으면 어떡하니.”
“부부를 풍기문란이라고 이사 가라고는 못하지. 오히려 잉꼬부부라고 표창장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들은 메주알고주알 수다 떨다가 엘리베이터가 와서 멎자 타고 내려갔다.
아파트 친구나 내 친구들은 가끔씩 503호를 궁금해 하기도 하고 정말로 이상한 부부라고 했다. 그 비명소리는 가끔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곤 하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갔다.
503호에 대해 무신경해 하던 어느 날, 현관의 벨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보니 503호가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집안일을 끝내고 무료해하던 중이었고 503호네가 궁금하기도 하여서 기다렸다는 듯이 503호네로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수한 된장국 냄새와 생선 튀기는 냄새가 났다. 505호가 뒤따라 들어왔다.
식탁에는 음식이 아주 소탈하게 차려져 있었다. 조기튀김과 부침개, 파김치 오이소박이 고들빼기김치, 시금치무침 등이었고 충청도 토속음식이라면서 아욱을 넣고 다슬기국을 시원하게 끓여서 내왔다. 속리산에 갔을 때 술을 실컷 먹고 난 다음날 술국이라면서 먹어 보았지만 자잘한 다슬기가 몇 개 있을 뿐인 시래기 된장국 같았다. 그런데 503호가 끓인 다슬기국은 새파란 국물에 굵은 다슬기가 서너 숟갈 정도가 들어있는 게 맛이 일품이었다.
그 여자네 베란다에는 난이랑 이름 모를 화초를 예쁘게 가꾸어놓았고 분수대와 연못도 만들어놓아 그럴싸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난향이 그윽하게 풍겨왔다.
유명화가의 그림 몇 점이 벽에 걸려있었다. 거실에는 책들이 집안 가득 있는 것이 좀 남달랐다. 거실의 책들이 장식용의 양장본이 아니고 거의가 단행본의 책들이었다. 아예 거실을 서실로 꾸며놓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들은 호구조사라도 나온 동사무소직원처럼 그 여자네 가족관계, 집, 고향등 잡다한 얘기로 일관했다.
“아침 일찍 나가시던데.......뭘 배우러 다니신다면서요?”
“영어공부를 하러 다녀요. 학원에 가서 배우는데 주부들이 배우는 열기가 대단해요. 다른 시간은 사람들이 다 차서 들어갈 수가 없고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이나 다닐 수 있는 8시대가 마침 비어있어서 허겁지겁 우리 집 양반 아침상 차려주고 나가는 걸요. 손자손녀를 잘 보려면 할머니도 영어를 할 줄 알아야 일등 시어머니라고 해요.”
“대단하시네요. 전 머리가 굳어서 공부하는 건 딱 질색인데.......”
“기억력이 안 좋아서 배운 것도 자꾸 잊어버리지만........재미있어요. 같이 다녀요?”
“난 노래교실 가서 박상철, 태진아, 장윤정 노래나 부르는 게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점심을 먹고 나자 커피와 과일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온 그 여자가 응접세트에서 먹자고 했다.
소파에 앉아서 그 여자네 집 벽에 걸린 그림이랑 베란다의 화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현관문 옆 신발장 뒷면이 있는 벽 쪽으로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인체의 도면이 벽에 붙어있었다. 병원에나 있을 법한 인체의 도면이었다.
나는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있는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남편분이 의사선생님이신가 봐요.”
“아뇨. 정년퇴직하고 애들 결혼시키고 나니 너무 무료하다면서 침술학원에서 침술을 배워요. 혈 자리를 익혀야 된다면서 저런 그림을 붙여놓고 공부해요. 제가 요즘 마루타인 셈이에요.”
내 몸에서는 갑자기 고무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