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
안녕하세요? 소희, 영성, 지현, 연우, 수정, 현석, 우빈, 혜주 여러분. 저는 중,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40대 중년 여성이에요.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책에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제 어린 시절 모습이 많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어릴 적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단층집에서 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좀 더 번화한 아버지 직장 근처로 이사를 왔어요. 그곳은 3층짜리 빌라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고, 저희 집은 일 층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반 지하에 있는 다섯 집 중 하나였어요. 각 집에는 단칸방과 부엌이 있고 화장실은 외부에 있는 재래식 공용화장실을 함께 써야 했답니다. 그동안 살던 동네와 다른 환경이 낯설었고 쉬는 날만 오시던 아버지와 매일 함께 살게 된 것도 제겐 힘든 일이었어요. 그건 일주일에 이틀만 긴장하면 되던 날이 매일 같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였거든요. 아버지는 너무나 무서운 분이셨고 엄마와 아버지는 자주 다투셨어요. 저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계실 때면 자주 혼나고 매를 맞거나 집에서 쫓겨나기도 있어요. 그런 가정에서 맏딸로 자란 저는 매우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아이였어요. 더욱이 전학을 갔을 때는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고 환경도 바뀌어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지요.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서 혼자 집에 있는데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죽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어린 시절을 무기력하게 살았던 거 같아요.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잘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엄마의 보호막 아래 청소년기를 잘 넘기고 자랄 수 있었지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은 생계 걱정하느라 바쁘셨고 저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 알아서 해야 했어요. 그 덕분에 저는 독립심과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으로 자랐답니다. 회사 다닐 때는 맡은 바를 꼼꼼하게 끝까지 잘 해내서 인정도 받았어요. 그 시절에는 집보다는 전적으로 일에 매달려 살았어요. 새벽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고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잤죠. 어려서 칭찬 받은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나 봐요.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저는 남의 눈치를 많이 봤어요. 좋게 말하면 눈치가 빠른 거지만 항상 다른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고 맞추려고 했으니 저의 초점은 항상 ‘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거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 아이는 저처럼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처럼 어린 아이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자주 화를 내고 혼내고 있더라고요. 내게서 처음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날 제 자신이 너무 싫었답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이를 망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나는 삼십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바꿀 수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을까.’, ‘내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의 아이도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을 텐데.’하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죠. 그러나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원가정도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나로 살아야 한다니 억울했어요.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노력을 쏟아야 할 대상은 미래의 나라고 생각했죠. 내가 원하는 나로 바꾸기로 마음먹었어요. 안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뭐가 됐든 해보자고 말이죠.
그런데 과거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더라고요. 과거에 상처받았던 영혼을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심리 상담 센터를 다니며 펑펑 울고 오는 날이 많았어요. 어느 정도 해소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상담 센터를 오래 다닐 형편이 못 되었고, 오래된 상처는 치유되는 데도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저에겐 책을 읽기 시작한 게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심리 책을 읽으며 나를 좀 더 알아가기도 하고 소설 속 힘든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보며 ‘세상엔 참 다양한 삶이 있구나. 누구나 시련을 겪는구나. 그런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구나.’ 하며 인생을 알게 되고 위안도 얻었죠. 그렇게 제가 바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요. 지금의 저는 많이 편안해진 상태예요. 사랑하는 남편과 현실남매와 지지고 볶으면서도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안아주며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제가 살아보니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마음인 거 같아요. 돈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부자인 사람도 혼자 있으면 외로워요. 사람은 누구나 외로울 때가 있어요. 때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생기더라고요. 근데 그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 자존감이 높으면 좀 더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거 같아요. 여러분 내면의 힘을 기르기를 바라요. 그리고 곁에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도 필요해요.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나를 보여주기 두려워 말고 당당하게 먼저 다가가 보세요. 분명 주위에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여러분의 성장 이야기를 읽으며 많이 흐뭇했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주었고, 용기 있는 청년들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꺼내놓았으니까요.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이만큼 잘 살아왔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 생각하며 힘내요. 우리의 인생 초반부는 힘들었지만 중반부는 내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지난 시간들이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어 줄 거예요. 저는 ‘앞으로의 삶은 나아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믿고 살고 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펼쳐질 여러분의 앞날을 응원하며, 곁에 있을 따뜻한 이들과 함께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24년 10월 어느 날
가난을 먼저 경험한 인생 선배로부터
첫댓글 처음에 쓰려고 했던 편지 형식으로 바꿔봤어요. 이번엔 퇴고를 정말 오래 했어요.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이번 만큼은 잘 쓰고 싶었나 봐요. 하고 싶은 말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글 쓰면서 기자단 샘들에게 참 고마웠답니다~ 제 곁에 있는 따뜻한 사람들~
와~ 영경샘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영경샘의 글과 말에는 힘이 있어요. 어려움을 보여주는 용기와 그것을 극복한 지혜가 담겨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글을 쓰는 시간이 영경샘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헤헤~ 기자단 샘들 덕분에 쓸 수 있는 거 같아요~ 샘들께는 뭘 얘기해도 부끄럽지 않아요. 언제나 절 격려해 주시니까요~😍
그런데 문득 공적인 글쓰기는 인하고 치유의 글쓰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와... 언제 이렇게 멋진 퇴고 글을 올리셨어요. 편지형식으로 하니 이전과 다른 새로운 힘이 느껴져요. 함께 나눌 수 있는 글이면 그것이 곧 공적인 글이 아니겠습니까~ 큰 박수 쳐드리고 싶어요!
함께 나눌 수 있으면 공적인 글이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