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가와 아굴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16:3-5).
사도는 서신을 마치기 전에 많은 분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문안을 합니다. 무려 26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문안하는 중에 제일 먼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①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 합니다.
㉠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였습니다(행 18:2). 이들 부부는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으나,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추방함에 따라 고린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신분(身分)의 높고 낮음이나 학문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자녀들에게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만일 한 가지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이들 부부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자로 업이 같았습니다.
㉢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바울을 만나 동업하면서 바울에게서 신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같이 떠나 선교 여행에 동참했으며 에베소까지 동행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 부부를, “에베소에 머물러 두고” 자신은 안디옥으로(행 18:18-19) 돌아갔습니다.
② 성경은 이들 부부를 말할 때 대부분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해서 부인의 이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편 아굴라보다 부인 브리스가가 신앙적으로 보다 더 성숙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사도행전 18장에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 18:25) 합니다.
㉡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의 설교를 듣는 중에 결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6) 하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이들 부부는 성숙하고 훈련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때도 아굴라보다 브리스가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③ 사도 바울은 “동역”을 중요시하였습니다.
㉠ 16장에서만도 브리스가와 아굴라(3), 우르바노(9), 디모데(21)를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담대함과 능력의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도 동역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의 동역은 물론, 이웃 형제 교회 간의 동역과, 무엇보다도 성령님과 동역하고 있음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님께 여쭈어 보고 인도하심에 민감하며, 의뢰하고 의탁해야만 합니다. 내가 아니면 아니 되고, 내가 해야만 안심이 된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④ 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가 사망하자 이들 부부는 다시 로마로 돌아간 듯합니다.
㉠ 사도는 4절에서 이들 부부가 바울 자신에게 어떻게 섬겼는가를 말씀합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사형 집행자가 바울의 목을 내려치려는 순간, 그 도끼 밑에 자신들의 목을 대신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이렇게 바울을 섬긴 것은,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내 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기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그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은 그들이라면 내어놓지 못할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물질로, 몸으로, 기도로 돕는 좋은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 고린도후서 1:8절에 바울은 에베소(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말씀하고 있는데, 이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5) 하고 말씀합니다.
㉠ 그의 가정을 교회(敎會)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였던(고전 16:19) 것입니다. 교회가 자체적인 건물을 갖게 된 것은 2세기 이후에서나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몇 개의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⑥ 로마교회도 16장을 통해서 볼 때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이 모여서(5, 14-15) 한 지역교회를 이룬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그의 사역 중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고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첫째로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꾼들은 성숙하고 훈련된 소수의 헌신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렘 5:1)을 찾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하고 말씀하십니다.
㉢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양적인 성장을 이룩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집에 비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서 우리는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대형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⑦ 둘째로 주안에서 가정의 역할과, 동역자로서의 부부 사역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세우셨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훌륭한 교회란 훌륭한 가정(家庭)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람들을 가정에서 끌어내는 데는 성과를 올렸으나,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가정으로, 사회로 돌려보내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겸허히 반성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 수만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들을 뒤쫓아가보았을 때에, 그들 가정에 교회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위한 신앙입니까? 그들의 신앙이 가정생활에 있어서 부부관계나 고부간에나 또는 자녀 교육과 나아가 이웃 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맛 잃은 소금이요, 생명력을 잃어버린 신앙인 것입니다.
㉢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에 치우쳐져 있지 아니한가 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그 후유증이 당장에 나타나지 않지만,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 반드시 심은 대로 나타나게 될 날이 올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맛 잃은 소금처럼 외면을 당하는 것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⑧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들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처럼 자기 집을 열어서 이웃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고 친교를 나누는, 작은 교회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 이처럼 가정들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기도처가 되기 위해서는 동역자적인 부부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이 이 점에 있어 취약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점으로는 근원적으로 유치부, 유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의 교육이 재검토되어야만 합니다. 육적인 나이만 차면 결혼적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할만한 신앙성숙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한 가정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바울→디모데→충성된 사람→또 다른 사람들(딤후 2:2)로 이어지는 조직적이고도 철저한 양육과 훈련이 요청됩니다. 훈련된 이들의 만남(결혼)을 통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의 가정들이 건설되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