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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竹橋(선죽교)
: 파도에 우는 교각은 풀 속에 아득하고
: 선생께서 이곳에서 어진 덕을 이루셨어라
: 하늘과 땅이 다해도 한 조각 붉은 마음 남아 있고
風雨磨來碧血新(풍우마래벽혈신)
: 비바람에 닳아져도 핏빛은 선명하다
: 비록 무왕이 의사를 도왔다 말해도
: 문상이 유민이 되었다는 말 나는 듣지 못하였어라
無情有限荒碑濕(무정유한황비습)
:무정하게도 한서린 황폐한 비석 물기운에 젖어있고
不待龜頭墮淚人(부대귀두타루인)
:돌비석의 귀두는 눈물흘리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열가지 복을 누린 사람--조수삼(趙秀三)/조경유(趙景賠)
1762(영조 38)∼1849(헌종 15). 본관은 한양, 초명은 조경유, 자는 지원(芝園) · 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 · 경원(經?)이며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된 조원문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여항사인이다.
조중묵(趙重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행(德荇), 호는 운계(雲溪)·자산(蔗山). 할아버지는 여항시인 수삼(秀三)이다. 도화서 화원으로 감독관을 지냈다. 1839년 전기(田琦)·김수철(金秀哲)·유숙(劉淑)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의 화평을 통해 그림지도를 받으며 교유했으며, 1847년부터는 여항문인들의 모임인 벽오사(碧梧社)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상화에 특히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 도사와 1852년 철종어진 도사, 1861년 철종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도사, 1872년 태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모사(模寫)와 고종어진 도사에 참여해 활약하는 등 이한철(李漢喆)과 더불어 당시 이 방면의 쌍벽을 이루었다. 1866년에는 고종 명성왕후 〈가례의궤도〉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유작들은 대부분 산수화로 남종화법을 충실히 따라 깔끔하고 정돈된 맛을 풍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형식화가 두드러져 화법의 생기가 부족해 보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산외청강도"와 "하경산수도" · "강남춘의도" 등이 있다.
강진 구곡사 소장 익재이제현상과 백사이항복상 [康津龜谷祠所藏益齋李齊賢像─白沙李恒福像] 이 있다.
이제현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조맹부의 서체를 도입하여 유행시켰으며, 많은 저서와 작품을 남겼다.
이제현 영정은 사유보행상(思惟步行像)으로 약간 동세가 비친다. 복식에서 중국 송대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초상화가 송대 형식을 바탕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1870년 도화서 화원인 조중묵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현 영정 입상은 그림수법으로 보아 조중묵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항복은 이제현의 후손으로 조선 선조 때 정승을 지냈다.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항복 영정은 비단 위에 채색되었으며, 사모를 쓰고 가슴에 모란·공작 흉배를 한 대례복 차림의 전신의좌상이다.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고, 족좌 위에 발을 얹고 곡교의에 앉아 있는 약간 우측면상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중기 공신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이 두 초상화는 18∼19세기에 이모된 것으로 당대의 원본을 충실히 옮겨 그려 초상화의 회화성을 제대로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열가지 복을 누린 역관 조수삼 송석원시사 동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호는 추재(秋齋)로 한양 조씨이다. 그의 후배 조희룡은 그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는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다. 문장력이 넓고도 깊었는데, 시에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사대부의 풍채와 문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이 화원이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직업적인 역관이 아니었는데,28세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처음 중국에 따라갔다고 한다.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다. 그 뒤론 북경 사람과 말할 때에도 필담(筆談)과 통역의 힘을 빌지 않았다.” 역관을 선택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몇년 동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그는 북경까지 가는 길에서 중국어를 다 배운 것이다. 여섯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뒤엔 역관의 신분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서울의 모습이 바뀌자, 전에는 듣고 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조수삼은 그러한 이야기를 71편 골라서 ‘기이(紀異)’라는 시를 쓰고 그 앞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군상의 소묘이면서도 사회변화를 보여준다. “내 나무(吾柴)는 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나무를 팔면서) ‘나무 사시오.’라 말하지 않고,‘내 나무’라고만 말하였다. 심하게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무’라고) 외치다가, 나무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틈이 나면 길가에 앉아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고본 경서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위에도 열두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쪽 거리 북쪽 거리에서 ‘내 나무’라고 외치네. 어리석은 아낙네야 비웃겠지만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다오.” 고본 경서를 읽는 것으로 보아 나무 장사꾼은 양반계층에서 몰락한 지식인인 듯하다. 그래서 차마 다른 장사꾼들처럼 “나무 사시오.”라는 존댓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내 나무”라고 반말을 씀으로써 양반 선비의 마지막 체면을 세웠던 듯하다.
그러나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어도 쓸 데가 없는 것이 당시 사회였고, 그런데도 끝까지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서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에 비하면 조수삼은 행복한 중인이었는데, 조희룡은 그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가지란 첫째 풍도(風度), 둘째 시문(詩文), 셋째 공령(功令), 넷째 의학, 다섯째 바둑, 여섯째 서예, 일곱째 기억력, 여덟째 담론, 아홉째 복택, 열째 장수이다.” 8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여 남의 부러움을 샀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공령문인데, 과거시험 때에 쓰는 시나 문장이다. 양반들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답안지를 쓰기 위해 공령문을 배웠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 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문집에 공령시가 실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의 문집에는 공령시가 57편이나 실렸다. 그가 공령시를 잘 지었다고 소문났지만, 자기가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이 아니라 양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연습한 것이다. 그는 61세에 경상도 관찰사 조인영의 서기로 따라갔는데, 실제로는 가정교사이다. 그는 83세에야 진사에 합격했는데, 영의정 조인영이 시를 짓게 하자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를 지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합격자 명부인 방목에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표시했으니,83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진사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응시했는데, 그는 60년이나 뒤처졌다. 시의 제목은 “진사시 합격자를 발표한 날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입으로 읊은 시”이다. 조인영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기쁨을 시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한 것인데,“가까스로” 합격해 난삼을 걸친 기쁨과, 몇백 짐의 책을 외우고도 60년 늦게 합격한 중인의 한을 함께 표현했다. 그나마 영의정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전문직업을 지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면서도 신분적으로는 60년이나 양반에게 뒤진 것이 바로 중인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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