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베드로 성당 관람을 마쳤을때 한 시 반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물 한 병을 사넣고 걸어서 도착한 곳이 산탄젤로 성.( 성 천사의 성) 박물관이자 관광지다.
기원 후 139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묘소로 만들어졌으나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요새로 리모델링.
유럽 흑사병이 창궐할 때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이 여기서 천사 미카엘의 환상을 보고 난 후 흑사병이 물러났다고 이 때 부터 이 요새의 이름은 '천사의 성'으로 불렸단다.
바티칸에서 멀지 않은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바티칸이 공격을 받을때 교황의 임시 도피처로 사용.
다리 위의 천사 조각들은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해진 후 조명이 켜지면 야경이 아름답다고 밤에 사진을 찍으로 많이 모인다
옥상에 오르니 저 멀리 바티칸을 비롯해 로마 전경이 좋다.
저 바티칸을 지키는 유일한 군인들이 스위스 용병들인데 그 들 이야기.
5백년 전의 스위스 이야기 부터 잠시 하자
13세기 이탈리아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 상업과 금융을 통해 (여러 공국으로 쪼개져 있었지만) 경제적 문화적 발전이 시작 되었을 무렵 스위스는 험한 산지로 인한 작물재배가 어려웠고 추위로 1차산업이란 것이 없었고 궁핍을 면할 수 없는 실정.
한니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진격해 나간곳이 엄청나다는 의미는 엄동의 환경적 영향 외는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었다는 의미.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사이에 국경을 낀 지정학적 위치로 크고 작은 공격들을 받았고 이걸 극복하기 위해 스위스는 국가가 아닌 도시별 자치적 생존을 위한 자위대를 꾸미게 된다.
이 민병들의 농사 도구와 흡사한 장창은 점차 무기로 변해 현재의 스위스 용병의 상징이자 그 시대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창병으로 성장한다
그 후 15세기에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중립국으로 변신. 하도 앞뒤 좌우로 두들겨 맞으니.
그리고 주변국에 비해 농사나 산업보다 100여년 동안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군인들을 수출.
그들은 계약지에서 돈 보다 신의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쳤고 교황청은 그들을 선택해서 고용한다
1492년 선출된 알렉산더 제위기간에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1503년 교황이 된 (우리가 잘 아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사실 이 교황이 없었다면 오늘 날의 바티칸 투어도 없다고 할 만큼 베드로 성당재건의 영웅적 교황 )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9월에 150명의 용병을 스위스에 요청했고 이듬해 1월 22일 도착한다.
이 것이 바티칸 궁전의 스위스 용병 태동이었고,
1527년 'Sscco di Roma' (로마 대약탈)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교황 클레멘스 7세때, 이 교황은 앞서 잠시 언급 했듯이 피렌체 메디치 가문에서 두명의 교황을 배출했는데 그 두 번째 교황이다.
사생아라는 약점도 있었지만 메디치 가문이 얼만큼 위력이 대단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본명은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 출신의 줄리오로 해석하자).
그 시기 신성로마 제국의 카롤 5세가 로마를 침략해서 로마를 약탈한다.
교황청에 들어오는 적에 맞서 스위스 용병은 맹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모두 189명의 근위대 중 147명이 전멸하였고 일부 용병들이 교황을 호위, 탈출 시켜서 이미 농성에 특화된 이 천사의 성으로 대피시킨다.
교황을 탈출시키고 추격하려는 적을 죽음으로 막아낸 이 기록적 사건으로 스위스 근위병의 지명도는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이런 의미를 남기게 된다
'돈 보다 신의로 계약'
지금도 교황청의 경비와 교황의 이동시 사복으로 경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스위스 용병들이고 그 병비병들이 입은 특이한 근무복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이 조각상이 대천사 미카엘.
로마 시내에서 북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테베레 강인데 평소 수량이 많지 않아 강물색이 별로다
하여간 이 성과 주변이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별 감흥이 없다.
너무 열정적으로 다니니 슬슬 에너지 고갈이 돼서 그런가 보다. 에너지 바나 초콜렛 등으로 보충들을 하는데 사탕 한 두개를 비상용으로 넣고 다니기만 할 뿐이고 간식이란 것은 없다
그래도 철인적 강인함을 믿고 변함 없는 속도로 관광을 이어간다
이 산탄젤로 성에서 나오는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위대한 나의 구글신에 의지해서 도착한 곳이 나보나 광장.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광장이다.
마치 응접실 처럼 아늑한 분위기와 100년 이상된 카페들이 있고 여기서 평소 살찐다고 먹지 않는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이태리에서는 모두 이렇게 부르더라)까지 사먹고 힘 내서 관광을 진행.
젤 북쪽에 있는 넵툰(포세이돈) 분수,
이 곳은 로마 최초의 전차경기장(1세기에 건설)이 있었든 자리였고 지금도 그 때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타원형이다
17세기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가 성당과 분수를 건설하면서 현재의 모습.
광장의 중앙에 있는 이 4대강 분수는 이제 좀 아는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으로 나일 강, 라플라타 강,갠지스 강,다뉴브 강을 상징하는 조각물로 장식.
약탈해온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다
이 건맨은 종일 꼼짝 않고 이러고만 서 있는데,
동전을 깡통에 넣어주면 이렇게 셀프 사진을 함께 찍어준다.
광장 남쪽의 모로 분수의 무어인 동상은 주로 바로크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보로미니가 설계.
베르니니와 두 사람은 앙숙관계.
좌측에 첨탑이 있는 건물이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이고 역시 보로미니가 설계했다는데 문들 닫아버린 시간이라 못들어 감.
3일째 아침 부터 숙소에서 걸어서 처음 도착한 곳이 이 분수대
세계 모든 관광객들의 성지가 돼 버린 트레비 분수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 사진찍기에 편하다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웃기지도 않는다
오늘 토요일 아침,
좀 일찍 일어나 노트 앞에 앉았는데 내가 여기 찍어 올리는 여러 이야기들이 혹 숫자나 내용들이 틀릴수고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점 양해 바라며 관점과 자료 출처에 따라 다른 점들 이상할 거 없으니 그냥 소화해주기 바람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7회, 6회, 5회의 그림들이 사라져버려서 다시 올림니다
다음으로 문자 질의는 해놨으나 시원한 답변이 없어 재차 질의해 놓은 상태임.
첫댓글 왜 로마인지를 느끼게 해 주네요. 그네들의 문화에 감탄하면서 또 그네들이
그 문화를 지켜내온 것에 찬사를 보냅니다.
업로드 장애에도 다시 복구 시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