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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폭도가 아니야!
증 언 자 : 소영두(남)
생년월일 : 1954. 6. 16(당시나이 26세)
직 업 : 삼면스텐노동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5월 27일, 휴업하고 있던 회사일이 궁금해서 나갔다가 광천동 파출소 앞에서 공수대에게 붙잡혔다. 그 뒤 상무대에서 끌려가 권총고문, 전기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그해 10월 말에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몸이 불편해 일도 못 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나는 1954년 광주시 광천동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아버지의 원래 고향은 보성군 복내면이었다. 아버지는 미혼이셨을 때 고모님이 운영하는 두부공장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가 어머니와 결혼을 하신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순반란이 일어나자 광주로 피난을 오시게 되었다.
광주 임동에 자리를 잡고 장사하실 때만 해도 농토를 팔아 가지고 온 돈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노름으로 재산을 축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날려버리고 광천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하천 주변 바로 밑에 판자집을 짓고 살다가 7평 정도의 땅을 사서 블록집을 짓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당시 세무서가 있던 자리에 10평짜리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한 달에 4000원씩 20년 상환으로 계약을 하고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것이 1969년이었다.
당시에 광천동은 궁색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방을 얻을 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시장자리의 큰 방앗간 옆에다 천막을 짓고 살았고,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전세를 얻어서 살았다. 그곳에서 오로지 아버지의 리어카 행상에 의지해서 살게 된 우리 일곱 식구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형님은 일찍 집을 나가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했다. 집안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자주 때렸기 때문에 형은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갔을 것이다. 서림국민학교를 나와 전남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달라진 것이라곤 없었다. 변함없는 빈곤한 생활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이 어렸을 때 한번쯤 가져봄직한 꿈 한 번 제대로 꿔보지 못한 것 같다. 내 머리 위에 드리워진 하늘은 캄캄하기만 했다. 공부도 하기 싫고 생활에 의욕도 없었다. 국민학교 때 육성회비를 항상 제때에 못 내 학교에 가는 걸 망설였던 것과 같이 중학교 때도 학교에 가기가 싫어서 자주 빠구리를 쳤다. 답답한 집에 붙어 있기 보다는 밖으로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극락강 근처에 사는 친구집에 자주 갔는데 거기에 가면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강이 있어서 좋았다. 돈 때문에 기 죽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서 친구집에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친구집에 가면 우리 집보다도 더 잘해 주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밥을 주곤 했었다. 결국 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중학교를 중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내가 소년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극락강 친구 집에서 죽치고 살다시피 하던 나는 친구들과 자주 남의 집 닭을 잡아먹곤 했었다. 상습적으로 닭을 잡아먹자 주인이 신고해 소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공장생활을 전전하다
소년원에서는 최소한 1년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착실하다고 인정받아 8개월 만에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있을 때 배운 양화기술을 가지고 곧바로 양화공장에 들어갔다. 처음 양화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이유로 월급을 주지 않다가 몇 달이 지나자 한 달에 3만 원씩 주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양화공장은 태평극장 밑에 있었는데 걸어서 출근하곤 했다.
양화점을 그만둔 뒤 1973년부터는 공업사에 다녔다. 공업사에 잠깐 있다가 다시 '삼면스텐'으로 직장을 옮겼다. 삼면스텐은 중소기업체로 스푼을 만드는 곳이다. 현재는 하남공단에 있지만 당시에는 농성동에 있었다. 내 여동생도 거기서 일을 했는데 동생이 스푼에 무늬를 찍으면 나는 그 옆에서 스푼의 모양을 따는 일을 했다. 내가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월급을 9-10만 원 정도 받았으나 기술이 숙련되어 갈수록 3개월 만에 한 번씩 월급이 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상당한 기술을 익힌 후에 돈을 더 많이 벌 생각으로 1976년에 서울로 올라가 동양물산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삼면스텐에서는 나를 못 가게 말렸다.
동양물산에서는 1977년도부터 월 20만 원 가량 받았지만 광주에서와는 달리 회사에서 별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성실성을 인정받아 조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번 돈의 일부를 다달이 집에 부쳐주었다. 1979년도 7월에 다시 광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삼면스텐에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역발전을 위해 광주사람을 찾으러 왔다며, 광주에 있다가 서울로 간 나같은 사람을 추적해서 왔던 것이다. 삼면을 살려보자고 그들은 간곡히 부탁을 했고, 결국 나는 반장을 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내려와서 보니까 주인이 바뀌어 있었는데 그는 세신에 있다가 온 고영두라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는 나를 특별히 대우했는데 노동자로서는 좀처럼 드문 일인 개별면담도 자주 했다. 나는 원래의 조건대로 반장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장, 차장, 노무과와도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내가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면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들의 월급은 무척 적었다. 197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식구는 내가 버는 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은 시집을 갔고 서울에 있는 형과 남동생들은 자기들 앞길 가리기에도 바빠 집을 도울 여유가 없었다. 1980년 5월, 19일까지 나는 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5·18로 인해 회사는 20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장갑차를 타고
21일 오후에 구경차 시내에 나갔는데 유동 삼거리 부근에 장갑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도와 그 장갑차에 화염병 박스를 막 실어주고 돌아서려는데 장갑차 안에 있던 사람이 내게 총을 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같이 가자고 해서 장갑차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솔직히 겁이 났다. 장갑차 안에는 화염병 2박스와 총 3자루가 있었다. 장갑차를 타고 도청을 향해 가면서 도로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으나 두려워서인지 별로 타지 않았다. 장갑차에는 안에 7명, 밖에 태극기를 든 두 사람 해서 모두 9명이 타고 있었다.
도청 쪽에 있던 공수부대가 건물에 숨어 총을 쏘았기 때문에 우리는 총을 쏘기는커녕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장갑차가 광주백화점을 조금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장갑차의 조그만 구멍으로 총알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탄 장갑차는 사정없이 노동청 쪽으로 도망쳤다. 노동청 앞에 이르러 장갑차를 멈추고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나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모두 부상을 당해 신음하고 있었다. 밖에서 태극기를 들었던 두 사람은 이미 총을 맞아 쓰러졌는지 없었다. 우리중 4명은 부상이 심한 편이었고 나머지 2명은 조금 다쳤다. 일단 모두가 장갑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지나가던 타이탄 트럭을 잡아 환자들을 수송케 하고 나는 혼자 따로 걸었다. 운전기사는 엉덩이에 총을 맞아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장갑차를 운전해 서방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다시 시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광주역 앞에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내가 탄 차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수의 운전 미숙으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바람에 차가 두번이나 넘어질 뻔하였다. 그러나 차에 탄 우리들에게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에는 버스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몇 자루 총을 들고 보초를 섰다. 우리는 화순으로 넘어가는 외곽도로에 조금 있다가 새벽 3시쯤 지원동으로 계엄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쳤다. 그러고는 각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몇 가지 사실을 목격했다. 차 사고가 나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는데 두 번 다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나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속이었거나 운전 미숙으로 인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유동에서 공수부대가 차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 총을 쏴 그자리에서 즉사하는 것을 보았다.
22일에는 이미 공수부대가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뒤라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했다. 내가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주민등록 번호와 총 번호를 적은 뒤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총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지급받지 않았다. 이날은 시내에서 선배들을 만나 술을 마신 뒤 한 선배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그날 저녁 내내 화투를 치면서 밤을 새웠다. 선배가 말했다.
"우리가 뭣을 아느냐. 그냥 집에 있다가 잠잠해지면 나가서 일이나 하면 그만이지."
나는 그 말에 동감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데모를 한답시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외에 주위에서 말리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집안 살림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23일부터는 집에 있었다. 당시 광천동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여섯 명 정도가 시민아파트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역방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로는 M16 3자루와 카빈 1자루가 있었는데 탄알은 별로 없었다. 동네 어른들이 그 일을 같이 하라고 나에게 말했으나 나는 그것마저 사양하고 아예 집에서 쉬었다.
체포되어 살인적 고문을 당하다
그러다가 5월 27일 새벽,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자 회사일이 궁금해서 모처럼 회사에 나가보았다. 그런데 광천동 파출소 앞에 있던 공수부대원에게 난데없이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나를 파출소 뒤로 끌고 가 두들겨패고 짓밟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반항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어찌나 맞았던지 정신이 아득했다. 그때는 코뼈를 다쳤는지도 몰랐는데 4개월 후에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다른 몇 사람을 지프차에 실었다. 정신을 거의 잃은 뒤 짐짝처럼 실려 한참을 가다가 도착한 곳, 그곳은 바로 상무대였다. 그들은 나같이 사정없이 두들겨맞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는커녕 조사를 한답시고 오히려 어머어마한 고문을 가했다. 실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상처 하나 안 나게 기술적으로 때렸는데 그럼으로써 엄청난 타박상을 입었지만 나중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뚜렷한 부상 경위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그때 맞은 것이 석방된 뒤에도 심한 후유증으로 남았고 독한 진통제를 많이 먹었던 탓으로 머리가 무겁고 멍할 때가 많았다. 또 곡괭이에 맞은 복숭아뼈가 비뚤어져버렸는데 그 후 4, 5년이 지나니까 제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구두를 제대로 신지 못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거꾸로 매달아놓고 물을 먹였고, 곤봉을 양팔에 넣어 돌리기도 했으며, 의자에 묶은 뒤 실컷 두들기고 나서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전기고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권총고문이라는 것도 받았다. 탄알을 장진하여 총을 가슴에 대고 위협했다.
"너 같은 것 한두 명 죽여버려도 아무 상관 없어. 죽기 싫으면 어서 말해."
"뭘 말하라는 것인가?"
"사람을 몇 명 죽였는지 자백하라."
거기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음을 자백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얼토당토 않는 소리였다. 나는 차라리 죽여주라고 애원했다. 그곳에서 그동안 안면이 있던 광천동파출소장을 만났는데, 그는 광천동에서 잡힌 다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도록 강요했다.
그곳 형무소에 있는 각 감방에는 60명 정도가 들어가 있었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방에는 시위 도중 알게 된 민성무, 이재호, 김종배, 박남선 씨도 있었는데(박남선 씨는 곧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서로가 모른 체 하기로 했고 시인하기를 강요하는 자백 내용도 일체 부인하기로 했다.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긋지긋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복을 입은 군수사관 앞에서 내용도 없는 자술서 20여 장을 쓰다가 찢기고, 쓰다가 다시 찢기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혹독한 고문과 독한 진통제 때문에 들어간 지 15일 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대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먹지도 못하는 나에게 콩나물에 섞은 밥을 조금씩 먹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A, B, C, D급으로 분류되었다. D급을 받은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D급의 1차 석방때 나오지 못하다가 훨씬 뒤에 나왔다.
원래 있었던 400명 중 내가 재판을 받을 무렵에는 240명이 남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징역 3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 10월 24일 저녁 9시경 그 지긋지긋한 생지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그 뒤 내가 받았던 형은 일을 찾아 여기저기 객지로 돌아다니다가 보니 별 상관이 없었고 1981년도 대통령의 훈시로 사면되었다).
삼청교육 보낸다는 협박을 받고
석방되기 전 그들은 우리를 분류해서 교회당으로 데리고 가 정신교육을 시켰다. 한마디로 말해서 풀려나가면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주는 등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해놓고는 하룻 저녁 나쁜 꿈을 꾼 것처럼 싹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니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다며 모두들 놀랐다. 집에서는 상무대에 잡혀간 지 3개월 후에 광천동 수사관의 연락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몸져 누워 있어야 했으므로 직장을 잃게 되어 집안 살림은 엉망이었다. 돈 나올 데라곤 없었다. 그 당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경찰서에서 세 사람이 나와 협박했다.
"삼청교육을 받으러 가라."
사업계획서를 올리면 500만 원을 융자해 준다고도 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도 인간이냐, 돈같은 건 필요없으니까 삼청교육대에 가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마라, 아니 차라리 그러려면 날 죽여라."
하고 욕을 퍼부었더니 가버렸지만 그 뒤에도 두 번이나 와서 같은 말을 했다.
겁도 나고 그런저런 일로 집에 있기가 힘들어 이리에 살고 있는 결혼한 여동생에게 가 있기로 했다. 이리에서도 치료를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빚을 내어 가끔씩 한약을 먹기도 했었는데, 거기서는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 진통제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형편도 어렵고 해서 1981년 정월 이리 동양물산에 나가서 일했다. 그곳에서 2개월간 있다가 건축업을 하는 선배가 일 좀 봐달라고 해서 광양으로 갔다. 막노동을 했는데 처음에 했던 일은 일당 1,300원을 벌었지만 너무 힘이 들었다. 그 일을 좀 하고 나서 물건 재고정리를 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업장까지 출근하는 데 건강한 사람은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40-50분이나 걸려 애쓰며 다녀야만 했다. 온몸이 울려서 잘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생활을 하던 중 건강이 점점 나빠져 1987년 8월 그곳을 떠나와 광천동 집에서 쉬고 있다. 다른 수입도 없이 전에 조금 모아두었던 돈으로 생활하다 보니 형편이 너무 어렵다. 아직 장가도 못 간 채 61세의 어머니와 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시가로 쳐 800-900만 원 하는데 90년에 상환기간이 끝나면 정부에서 현대식으로 개조를 한다고 한다. 이번에 동사무소에 부상자로 신고를 했다. 처음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신고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형사들이 와서 제재를 가하기도 했지만, 신고를 해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신고하게 되었다. 상무대에 끌려갔을 때 알게 된 평민당 소속 의원인 정상용 씨를 찾아갔더니 그도 역시 신고하라고 권유했었다. 아직도 주위에는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쉬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별로 다치지 않아 피해를 덜 입었기 때문에 더욱 밝히기를 꺼린다.
5·18 부상자동지회에 가입한 뒤 가끔씩 연락이 오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그때 무엇을 했던가?' 5·18 당시에 시민군으로 활동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만 했어도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 할말이라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5월에 장렬히 산화해 갔던 사람들처럼 죽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다시는 5·18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젠 5·18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마땅히 보상을 해야 한다. 보상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진상이 먼저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선에서 관계자들을 처벌, 5·18이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해야 한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