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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증언 자 : 이희승(남)
생년월일 : 1954. 10. 7(당시 나이 26세)
직 업 : 소매업(현재 대리점 근무)
조사일시 : 1988. 11
개 요
이희승 씨는 5월 19일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계엄군에게 맞아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이 골절되는 등 온몸을 구타당했다.
평범한 간장 장사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는 내가 태어나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고향이다.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짓던 평범한 가정이었다. 재산이라고는 논 4마지기와 밭 4마지기가 전부였지만 어려운 생활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유당 시절, 지금의 예비군 훈련과 유사한 '재훈련'(1년에 한 달 정도 받음)을 받다가 사고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내 나이 다섯 살, 형제라곤 유일하게 밑으로 여동생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워낙 어렸을 적 일이라 아버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해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광주에 올라왔다. 광주에서는 혼자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은 나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움을 느꼈고 그런 것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공부보다는 무엇을 해서 돈을 벌 것인가가 내겐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여동생을 내가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나를 어둡고 그늘지게 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곧바로 식료품 도매상을 하고 있던 작은아버님이 소개해 준 간장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월급은 한 달에 2만 원으로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했기 때문에 별다르게 생활비가 들어가지 않아 꼬박꼬박 저금을 하였다. 4년 동안 공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전거를 한 대 사서 도매점에서 물건을 사다 소매점에 넘기는 장사를 시작했다. 간장공장 다니면서 안면이 있던 사람이 많아 그 장사는 그럭저럭 할 만 했다.
2년 동안 장사를 하고 1978년에 영장이 나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독자여서 6개월 동안 방위를 받았다. 제대 후 서울에서 1년 남짓 생활했다. 둔촌동에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인부로 일을 하기도 하고, 동아건설에서는 지하실 양수공 일을 하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나를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1980년 봄, 광주로 내려오면서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여동생을 광주로 올라오게 했다. 10년 이상을 떨어져 살았던 식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군대에 가기 전에 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공장에서 바로 물건을 떼어다가 가게에 넘겨주는 중간상인 정도의 일이었다.
1980년 봄을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각오로 보내고 있었다. 그해 5월은 유난히도 정국이 시끌벅적했다. 먹고사는 것이 큰 문제였던 나는 세상 돌아가는 속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5월 들어 매일 계속되는 대학생들의 데모는 무딘 나를 가끔씩 자극하기도 했다.
곤봉으로 얻어터져
15일인지 16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자전거를 타고 공원 부근에 있는 가게에 간장을 배달하고 나오는데 많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지나갔다. 그중에는 삭발을 한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다. 나는 학생들의 그런 모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함께 해야 한다든가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18일은 오전에 집에 있었다. 우리 집은 사직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비교적 시내 소식은 빨리 듣는 편이었다. '공수부대들이 학생들을 다 잡아간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대검으로 푹푹 찌른다'는 소문이 우리 동네에도 파다하게 돌았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환한 대낮에 군인이 양민을 대검으로 찌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더구나 학생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에 할머님과 어머님이 못 나가게 극구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로동 다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말로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있었다. 공수부대는 어디서 학생들을 잡았는지 줄에 묶어 끌고 갔다. 그들은 지나가는 택시도 그냥 두지를 않았다. 택시를 곤봉으로 수차례 내리쳤다. 그걸 보면서 두려움이 생김과 동시에 걸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기 위해 조금 가고 있을 때 뒤에서 공수부대가 쫓아왔다. 그때는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른다. 무작정 숨으려고 들어간 곳이 연탄가게였다. 그 연탄가게는 내가 간장을 대주는 집이라 아저씨를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쫓아온 공수부대는 다섯 명 정도 되었는데 연탄가게까지 뒤쫓아왔다. 2명이 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나를 때리려고 하였다. 나는 다급한 나머지 나는 학생이 아니고 간장 파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그 연탄가게 주인 아저씨도, "이 사람은 우리 집에 간장 대주는 사람으로 내가 보증할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아저씨더러, "너는 또 뭐냐?"면서 아저씨까지도 내리칠 기세였다. 믿어달라고 애원을 하자, "이 새끼 웃기고 있어." 하면서 곤봉으로 몇 대 치더니 밖에서 같이 왔던 공수부대원이 부르자 그냥 갔다. 아마도 내 자전거를 보고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본 공수부대들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구경이고 뭣이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앉아 있었더니 아저씨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 와서는 할머님과 어머님이 걱정하실까봐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19일,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까지 있는데 우리 집 부근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내게 당부했다.
"사람을 보이는 대로 때리고 죽이니까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
나는 친구에게 내가 당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친구가 가고 난 뒤에 집에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식구들한테는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빠져나왔다. 광주 천변을 따라 충장로 3가, 4가를 거쳐 시내로 나가보았다. 금남로에 있는 가톨릭 센터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한화재해상보험이 있는 건물에 자전거를 넣어두고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가톨릭센터 안에는 공수부대원이 몇 명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성난 시민들이 가톨릭센 터에 있는 공수대들을 쫓아 올라갔다. 나는 밑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한 청년이 옥상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빼앗은 M16 소총을 높게 들어 보여주었다. 그걸 보고 다시 광주은행 본점 사거리 쪽으로 나와서 도청 쪽을 봤더니 관광호텔 앞에 페퍼포그 차와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착검은 하지 않았고 군복차림이었던 것 같다.
시민들이 그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밀고 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사이에 있었는데 공수부대가 밀고오자 시민들이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도망가지 말고 한판 붙자고 했으나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아는 시민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나도 도망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10여 미터 정도를 뛰었는데 내 앞을 뛰어가던 사람이 넘어지는 바람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연속해서 여러 사람이 넘어졌다. 그때부터 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새 공수부대는 쫓아와서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곤봉으로 내리치는 소리, 신음소리,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사람들 틈으로 처 박았다. 그런 와중에도 어렸을 적 시골에서 개구리 잡던 일이 떠올랐다. 개구리를 잡아서 회초리로 때리면 개구리가 쫙 뻗는데 우리들이 꼭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잘 모르지만 대충 10여 분 정도는 구타를 당했을 것이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사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내 주변 길바닥에 사람이 가득했다. 주위에서는 5미터 간격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착검을 한 채 서 있었다. 어디선가 트럭이 한 대 오더니 우리 근처에서 섰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2인 1조가 되어 양쪽에서 잡고는 가마니짝 던지듯이 트럭에 던졌다. 여기서 걸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엉금엉금 기어 서 상업은행 쪽으로 빠졌다. 상업은행을 막 돌아서는데 한 여자가 눈알이 빠져 죽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전거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는 우리 식구들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서 자전거를 가지러 대한화재해상보험 건물로 들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하천을 따라 시내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맞았는데도 집에 도착하기 전에는 어디가 아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쏙 빠지더니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퉁퉁 부어오르고 온몸이 욱씬거렸다. 부어오른 손가락은 아예 구부려지지도 않았다. 양림다리 옆에 있는 김성수 의원으로 가서 우선 오른쪽 손가락을 치료받았다. 5주 진단이 나왔다. 그 후 5주간을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병원에서는 공수부대들에게 맞은 사실을 알고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몸에 외상은 없는데도 머리와 허리가 아파 3개월 동안 한약을 복용하고 침을 맞고 각종 단방약을 복용해 봤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날이 흐리면 유독 더 심하고 조금만 힘든 일을 해도 온몸이 저리고 쑤셔서 오늘까지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다. 물론 손가락도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가 없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나는 손가락에 깁스를 한 채 21일에는 적십자병원에 죽은 사람이 많다길래 또 병원에를 가봤다. 병원은 그야말로 집 나간 사람들을 찾고 다니는 가족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설마 하는 마 음으로 병원에 왔다가 시체로 변해 있는 사람을 확인한 가족들은 의식을 잃거나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는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한시름 놓였다.
여동생 혜숙이는 지금의 KBS방송국 올라가는 입구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우리집은 여성회관 바로 앞이었는데 27일에 보니까 여성회관에도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낮에 동생 가게에 별일이 없는가 보고 올라오는데 여성회관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손을 어디서 다쳤느냐고 물었다. 계엄군한테 맞았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다쳤다고 했더니 바른말로 하라면서 윽박질렀다.
한참 승강를 하고 있는데 지프차가 한 대 왔다. 지프차에 타고 있던 중령이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나는 이 앞집에 사는 사람인데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서 손가락을 다쳤다고 확인을 해봐도 좋다고 했더니 풀어주었다.
5·18 기간 중 이렇게 몇 번의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5월이 가고 6월이 되자 동네 예비군 중대장이 찾아와서는 신고를 하라고 했다. 신고를 하면 쌀을 주네 뭣을 주네 했지만 신고하지 않았다. 그때는 혹시 신고를 하면 무슨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싶게 사람들은 다 자기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나도 6월부터는 다시 간장장사를 시작했다. 1981년이 되자 아는 사람이 중매를 해준다면서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나이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결혼을 했다.
나는 호적하고 본나이하고 두 살 차이가 난다. 내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태어난 지 일년도 못 돼서 죽어버렸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낳자마자 죽는 애들이 많아서 대부분 호적을 늦게 올렸다. 나도 우리 부모님이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다가 태어난 지 2년이 지난 뒤에야 호적에 올려서 실제 나이하고 차이가 난다.
나는 슬하에 남매를 뒀다. 일곱 살 먹은 아들 태양이와 여섯 살 먹은 딸 미지이다. 내가 형제가 없어 자식이라도 많이 낳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있어서 둘만 낳았다. 3년 전에 할머님이 작고하셔서 지금은 어머님과 우리 내외 그리고 애들 둘 모두 다섯식구가 살고 있다. 여동생은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다.
1982년부터 간장장사를 그만두고 충장로에서 노점상을 했다. 옷이나 양말을 주로 팔았는데 단속이 심하고 이리저리 뜯기는 것이 너무 많다.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달라는 소리는 안 하지만 장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다. 괜히 조금 아끼려다가 찍히는 날에는 그나마 장사도 못 해 먹기 때문에 속이 쓰리지만 주는 것이 그 세계에서는 통례로 되어 있다.
1985년까지 노점상을 했다. 노점상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그것도 현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날 벌어 그날 써버리면 물건 떼러 갈 때 애로사항이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1985년에 노점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취직을 한 곳이 지금 다니는 OB맥주 대리점이다. 이곳에서는 맥주 배달하는 일을 하고 한 달 월급은 30만 원 정도 받는다. 이것도 최근에야 그렇게 받는 편이다. 작년 6월 투쟁 이후로 월급도 많이 올랐다. 작년 6월에는 정말로 대단했었다. 나 또한 퇴근 후에 시내에 나가서 새벽 2시, 3시까지 '호헌철폐'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다녔다. 작년에도 하마터면 최루탄에 맞아 크게 다칠 뻔하기도 했다. 그때 행동요령으로 사람을 모으는 방법은 돌로 철근이나 쇠파이프를 때려서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이 모이도록 하자고 했다. 저녁에 중앙대교 쪽 골목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태평극장 쪽에는 전경들이 있었다. 골목에 모인 사람들을 도로에 모이게 하기 위해 신호등 밑에서 독으로 신호등을 받치고 있는 쇠파이프를 쳤는데 저녁이라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소리를 전경들도 들었는지 나를 향해 최루탄을 쐈다. 내가 신호등 파이프 뒤에 서 있었는데 최루탄이 다행히도 쇠파이프를 맞고 밑으로 떨어져 다치지 않았다.
그 6월 투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인 민주화를 이룰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올해 6월에는 YWCA 부상자동지회에 5·18 부상자로 신고를 했다. 부상자동지회를 갔더니 설문지를 주면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내용에는 보상금을 얼마나 바라느냐는 둥 그런 류의 질문이 있었지만 단지 보상을 바라고 신고를 한 건 아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그땐 내가 당할 불이익을 생각하느라 진상규명이랄지 명예회복 등은 생각을 못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그때 억울하게 죽거나 이유도 없이 다친 사람들을 위해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한다. 이건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지금도 TV에서는 시위현장에서 학생들 다치는 것은 안 나오면서 전경들 다치는 것만 보여주니 말이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