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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초등학교17회
 
 
 
카페 게시글
☞ 아름다운 시집 ☜ 스크랩 강은교 시모음
윤응구 추천 0 조회 74 06.02.12 15: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을의 서                                 강은교


가을의 서(書)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 걸


보아라.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거리 시                                   강은교


거리 시(詩)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ꡒ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ꡓ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바람의 노래, 문학사상사, 1987






겨자씨의 노래                             강은교


겨자씨의 노래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 성서에서 인용


바람노래, 문학사상사, 1987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강은교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黃沙) 날아가는 무덤 가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는 허리띠,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毒),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毒), 물의 독(毒), 공기(空氣)의 독(毒), 흙의 독(毒).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강은교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헤매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몹시 부는 바람 속으로, 지난 밤 번개에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이 고름 된 들판으로, 어디다 집을 지을까, 어디다 집을 지을까, 우리의 얇은 날개 쉼 없이, 뼈뿐인 마른 나무들 어루만졌다.


어느새 한낮, 들판 끝 혼자 서 있는 바위 위에서, 이슬 맺힌 우리 눈 문득 키 큰 햇살을 보았다. 구겨진 낙엽마다 오래 전 잃어 버린 노래 한 자락. 소리치며 웃으며 우리 둘이는 달려갔다. 있는 힘 다해 얇은 날개 마주 잡아, 사랑이여 사랑이여, 햇살 위에 걸터앉았다. 노랫자락 허리 깊이 쓰다듬으며, 흐르고 흐르는 그 속 천만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러나 그날 저녁 노랫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큰걸음으로 햇살도 어둠 따라 가버렸다. 등 뒤에서 울려오는 긴 긴 흐느낌, 바람은 날개 사이로 불며, 어디서 나타난 천둥 무서운 고함, 가거라 가거라 사랑이여, 서둘러 우리 둘이는 날개를 거두었다. 흐린 하늘 아래 뼈뿐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이 고름 된 들판으로, 쫓겨난 채 우리 들이는, 다시 헤매며 우리 둘이는.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그대의 들                                 강은교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로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이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작으냐 작으냐, 라고


벽속의 편지, 창작과비평사, 1992






그 여자 1                                 강은교


그 여자 1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 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낙동강의 바람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붉은 강, 풀빛, 1984






눈발                                      강은교


눈발&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단가 세 편                                강은교


단가 세 편


  □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 늪


옥황상제가 온다.

옥황상제가 온다.

엄마 등에는

4천 년 묵은 늪이

황톳물이

묻혔다 다시 묻히는

아아 4천 사내의

떼죽음.


  □ 가는 곳


달이 뜬다,

산너머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돌아                                      강은교


돌아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가는

길 모퉁이


연탄재며 밥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모래가 바위에게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바람노래, 문학사상사, 1987






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물방울의 시                               강은교


물방울의 시(詩)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빈자일기, 민음사, 1977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강은교


바리데기의 여행(旅行)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배추들에게                                강은교


배추들에게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봄 무사                                   강은교


봄 무사(無事)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붉은 강 1                                 강은교


붉은 강 1


가서는 안 옵니다.

그대는 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림자가 되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뵈지 않는 하늘에다 목매달아

빼곡히 골목골목 어둠이 되어


그래 여긴 사철

눈물이 모래알들을 눕히는지요?


나무란 나무 가지마다

터럭이란 터럭 끝마다

피묻은 그림자 주렁주렁 열리는지요?


그대는 깊디깊은 강

슬픔들은 저녁 되어

그 누더기 옷을 벗으니


그대의 온몸은 빨갛게 물듭니다.

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

비틀거립니다

몰래 춤춥니다.


붉은 강, 풀빛, 1984






새                                        강은교


새&


자네, 여름에

타는 모래 위에서 보았어.


자네, 가을에

흔들리는 풀섶에 서 있었어.


겨울에 자네 그림자

내리는 눈 속에 펄럭이더니


지난 봄 피는 꽃 사이로

그리운 기침소리.


우리 여기 있노라

날개 결코 사라지지 않노라.


그런데 지금 어디

어느 황혼 허리 넘으며


청태(靑苔) 꿈밭에 애써

자네 핏방울 서너 점 뿌리고 있는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생자매장 -1-                              강은교


생자매장(生者埋葬) -1-


오는가, 누구

저 닳은 들 밖에서

울리지 않는 종

소리 울리며

바삐바삐 다가오는 이.


뼈의 그늘을 핥고

핥아 속속들이 어둠 빛으로

타오르면서

무한궁륭(無限穹隆) 넘고 넘어

결코 멸하지 않으면서.


추어라

불의 춤을 추어라

오는 강 오는 바람

끝없이 뒤척이는


떨어진다, 여자들은

구렁으로

소리친다, 산[生] 것 모두

함께 부둥켜 안아.


오라 친구

달콤한 잠

와서 가만가만 여기

살[肉]내 나는 재[灰]를 묻어라.


이슬의 대지에

다만 녹으라 녹으라

명령하며.

다음 일어서라 일어서라

구원하며.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생자매장 -2-                              강은교


생자매장(生者埋葬) -2-


죽어도 죽지 않는

피[血]의 소요를.

살아도 살지 않는

살[肉]의 평온을.

언제나 있는 슬픔의

언제나 없는 슬픔을.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태아(胎芽).


눈뜨고 이렇게

쓰러져 누운 벌레들 짐승들

은빛 비늘 반짝이는 물고기들

입술 부비며 침 흐르며

저녁 연기 사방에

쏘다니는 것들.

눈뜨고 이렇게.


흐르는 자는 복되도다.

한 번 흐르고

다시 흐르는 자는

은총받도다.

핥아라, 네 어둠이

구름을 벗기고

구름 밖 기다리는

그 사람


무릎에 재[灰]로

잠들 때까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생자매장 -3-                              강은교


생자매장(生者埋葬) -3-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어둠이 저를 이끌고

빛이 저를 묻으니

사자(死者)는 복되라

사자(死者)여 그리워라.


나 오래 여기 있었네.

먼지 길 바쁜 내 가슴

파도 늘 울리는 발의

바다, 아침에

나 벌써 저녁을 기다렸네.

저녁에 다음 아침

탐내 꿈꾸듯


눈물이던 한때 내 얼굴

게거품이던 한때 내 입술도

한밤중 없는 이마 헤매어 맞추던

내 잠도

여기 입다문 나팔꽃 실뿌리 되어

앉아 있네 튼튼히 살아 있네.


오라 즐거이 썩으라

엉켜 잊지 못하는 자들

이 나팔꽃 꿈속

어둠아비보다 더 넉넉히

꽃피우라 노래하라.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생자매장 -4-                              강은교


생자매장(生者埋葬) -4-


수레야 달려라, 연기가 간다

이끼 짙은 지붕마다 눈부비고 일어나

허허벌판 돌아보며 돌아보며

그리워 아주 눈감고 간다.


수레야 달려라, 구름이 간다

버릴 수 없는 사랑 빗물로

잠깐 잠깐 쏟으며

동그란 눈물산 여기저기

이루며 간다.


수레야, 아무도 뵈지 않아

수레야, 아무도 멈추지 않아

캄캄한 길을 누웠다 일어나는

누웠다 일어나는 해 얼굴 뿐.


수레야 달려라. 풀이 간다

일어서 바람에 꺾이며

엎드려 바람 피하며

괴로워 다시 제 씨앗 뿌리며

간다.


간다, 바다가 간다

물새들 날개, 새우들, 게들 비린내

심장기슭에 묻혀

굽이굽이 몸부림

사라지고자.


달려라, 황금수레야

데려가라, 이 수만 발자국

그대의 광야, 결코 돌아옴 없는

포근한

소멸의 방(房)으로.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섬                                        강은교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에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에 넘치는가

우리는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 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灰].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소리  1                                   강은교


소리  1


어서 가요, 어머니

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

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

힘주어 흔들리는데.

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

이 햇빛 따라가요.


갈 곳 몰라

헤매는 저 구름덩이들과

살 틈마다 웅크려 누운 고름들

울창한 어둠일랑

쓱쓱 베어내고

잡초 베어내듯

쓱쓱 베어내고.


바람도 우리 등 밀어 주네요

마른번개도 데려와

와르릉 쾅

앞산의 그림자들

죄 걷어 가네요.


이 골 저 골 부르튼

발들이여 모여라

없는 길 만들어

씽씽 달리게

이제야 이제야

불함산(不咸山)*으로 달리게.


    위의 복은 등에 지고

    아래 복은 머리에 여

    앞의 복은 안아들여

    옆구리 복은 껴들여


아, 이제 보이네요.

벌판 따라 일어서는 길 저 끝으로

춤추며 반가운 아리라*

핏멍 맺힌 뼈

마디 마디마다

첨 보는 꽃들 웃으며 오고

한숨 수북 쌓여 있는 가슴께에선

신천지라 신천지라

잔물결 이는 소리.


하늘님이여

복 주신 우리네 하늘님이여

아리라 찬물에

지난 길 모두 씻어

흰 돌 맑은 신단(神壇) 세우리니

부디 거두어 주사이다

님의 큰 옷섶에

거두어 주사이다.


* 불함산(不咸山): 백두산(白頭山)의 고명(高名)

** 아리라: 송화강(松花江)의 고명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소리  4                                   강은교


소리  4


님이여, 아 멀리 계시는 님이여

허구헌 날 불어 대는 저 바람소리처럼

형체도 없으신 님이여

지금쯤 어느 진흙구렁을 지나시기에

어느 산 깊은 그림자에

젖은 옷깃 담그고 계시길래

지새는 밤이면 밤마다

손 닿지 않는 별빛만 보내오시고

동구 밖 시든 풀 줄거리엔

무서리 가득가득 던져 놓으시는지

아무도 뵈지 않아라.

훤히 뜬 내 두 눈엔

넘쳐나는 눈물 기어코

눈발 되어 쏟아져라.

그날 님과 잘라 가진 반쪽 거울엔

비추이느니 피울음 황혼, 황혼뿐

지는 달도 반만 번뜩이는데

어찌하리, 여기엔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 너무 많으니

그 이름들 밤이면 무서리로 내려 내려

온 땅 하얗게 우는 걸 어찌하리.

님이여, 아 행방불명하신 님이여

허지만 어딘가에서 자꾸 오고 계실 님이여

내일이면 불현듯 눈처럼 달려오셔서

이내 몸 환히 알아보시라.

밤 끝에 해는 더 높이 일어서고 있으니

튼튼한 솔잎 너머 까치 울음소리

오늘 따라 가까이 내려오고 있으니

가실(嘉實)님, 나의 님이여.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소리  7                                   강은교


소리  7


그 때 노인은 바람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풍선 서넛 목매단 차양 아래

햇살은 진창길 할퀴며 달려나오고

우리는 잠시 등 뒤를 손가락으로 털었다.

목마는 얼씬대는 구름 그림자 하나 없이

쇠기둥에 매달려 안간힘 안간힘인데

개펄 노인의 뺨에선 땀방울이 헐레벌떡 모래 누운 길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요, 길 한복판

    버얼건 입김 허공에 펄럭대며

    구겨져 누운 저 남자

    가슴에서 다리에서 허리에서

    너울져 내리는 피의 폭포

    휩뜬 눈 서리서리

    감기는 해덩이


저길 좀 봐요, 바람 굽이굽이

시퍼런 시퍼런 하늘 건너

눈물들 한바탕 우짖는 길 건너

한 입 피 베어문 달 어느새

산그림자 위에 앉았네요

날개 펴고 활활

나네요.


저길 좀 봐요,

몰매 맞은 나무와 풀들

퍼덕퍼덕 온 들판에 까무라쳐

허공 향해 뿔뿔이 드러눕는 것을.

사색이 된 강물

한 큰 바위 아래 가까스로 멈추며

휘날리는 꽃잎 꽃잎 가슴결 틈틈이 동여매는 것을.


    그날 우리는 보았지.

    살빛도 못 가리는 우리네 옷섶마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빗방울이며

    그리 사랑하던 이

    황산벌 풍경마다 볼 비비며

    볼 비비며 끌려가던 것을.


어디로 가시나이까, 왕(王)이시여


    바라보면 얼기설기 구름뿐

    헌데투성이 백강(白江)의 하늘

    젖은 모래밭엔 매달리느니 길길이 뛰는 어둠인데


    바위여, 천공에 늘어선 꿈이여

    물결에 얹혀 우리 영영 출렁이게 하라.

    목메이게 세상 가득

    꽃내 흐드러지게 하라.


그 때 노인은 우뢰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골목 밖마다 튀어나올 별빛 아이들 목늘여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목마를, 간밤 꿈자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온 산마루 훨훨 타오르는 꿈, 우리는 마른 번개에 이마 흠씬 베고 바람벽에 뒤뚱거렸다.

넘치는 백강(白江)의 우뢰는 끝없어

흐려지는 눈시울 우리는 캄캄한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닦았다, 노인의 어깨 너머 넘실대는 거품이며

얼떨결에 개켜 놓은 살점들이며

아직 흐르지 않은 한숨들, 이슥토록 눈물들……

별빛 아이들은 끝내 오지 않아

거품 곤두박질치던 길 어언 간 곳도 없어.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소리  9                                   강은교


소리  9


눈떠야 하리

시든 꽃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 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시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녹두꽃은 녹두꽃 마른 허리를 비벼라

담장이는 흰 눈에 풀풀

감긴 머리칼을 풀어라

등에 진 땅이 무거워

엎드려 흐느끼는 돌멩이여

씻어라 진흙구덩이 너의 눈물로

별보다 눈부시게 너의 속살로


    강물이 넘어지고 있었네

    부서진 모래벌

    곁에서

    바위들이 피 흘리고 있었네


    하늘가로는

    소리 없는 소리들

    그림자 없는 그림자들


    강물이 자꾸 넘어지고 있었네


우린 빈주머니를 휘저으며 얘기한다 어젯밤 바람벽을 뛰넘은 도둑에 대해서 치통과 자유에 대해서 인터페론과 양도소득세와 자본주의와 영아원과 또는 한숨을 또는 오늘의 시장경기를 또는 흐린 날씨를 또는 어두워만 가는 숲그늘을 방안에는 듬뿍 드볼작의 심포니 흐르는데 저 피는 얼마짜리죠? 창문의 열쇠를 확인하고 나면 꽃밭에 드러눕는 피 흐르는 눈부신 눈두덩


눈떠야 하리

한밤중에 부시시 잠 깨는 길처럼

솟구치는 풍랑 위 연꽃처럼

저 혼자 흐르는 건 달빛만이 아닌 것을

달빛에 묻은 어둠만이 아닌 것을


    우린 누워 있어요 가만히

    가슴 속엔 결코 냄새나지 않는 흙

    고요한밤거룩한밤

    기도할 새도 없었다니까요

    용서하소서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길 하나가 일어서고 있었어요

  치마폭 한아름

  널부러진 기침소리들 보채고 있었어요

  강 자꾸 넘어져 보이지 않는 땅


  안개에 덮여 귓가엔

  산발한 구름 치달리는 소리


요리조리 우린 바람떼를 피하며 걸어간다 아침엔 숭늉에 허기진 배 다스리고 흩날리는 먼지는 싸구려 총채로 잠재워 버렸다 언제나 부지런한 시계는 벽장 깊이 감추어 버리고 걸어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로 아아 밤과 밤 사이로 아아 땅과 땅 사이로 별일없이 별일없이


눈떠야 하리

무서리 너부죽한 길이면 길마다

그을음투성이 바람벽이면 바람벽마다

거친 태양 이젠 힘주어 안아야 하리

오랜만에 오랜만에

총총한 빗소리도 데불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무지개도 어여삐 데불고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소리 11                                   강은교


소리 11


여기 내리는 비에선

참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엎드려 누운 풀과 풀 사이

날개 수그린 새들은 그걸 안다.


빗방울들은 왜 저리 몸부림하는지

빗방울 겹겹 바람들

왜 저리 울어 대는지

서두르지 않아도 들려오는 종소리

끝에 목매단 어두움


자갈들은 그걸 안다.

삼천의 노을이 삼천의 구름

잡아당기는 저물녘

가슴에 박힌 땅 우르르르

핏물로 범벅되어 일어서면

어화넘차 구름떼 달려오는데


    숨살이는 숨에 넣어

    뼈살이는 뼈엔 넣어*


    오 진흙 위에 내리는

    이 포도주

    진흙 위에 내리는

    이 살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기 내리는 비에선

비와 비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잠든 별 아직 일어나지 않아도


시커머니 한 귀퉁이 벌건 하늘

뼈 없는 손에 쓰러진다.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순례자의 잠                               강은교


순례자(巡禮者)의 잠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스스로를 기억하는 노래                    강은교


스스로를 기억하는 노래


내 살[肉]은 한때

허공이었네.

부는 바람

기다리는 문 밖

수억 별의

꿈이었네.

내 잠은 은모래 사이로

언제나 가만가만

실가지 무너지듯 무너지듯

눈물 버리며 흘러갔네.


내 피[血]는 한때

강물이었네.

밤이 내 두 팔에 와

잠들 때마다

물의 입술과 피의 내 입술은

오래오래 껴안아

결코 헤어지지 않았네.

마른번개가 달려와 때로

큰 목소리로 우릴

두드려도

대답하지 않아,

뱃전에 흐르는 머리 기울이고

다만 다정히 거품 되고 있을 뿐


아아, 한때

캄캄하던 나

아아, 한때

텅 비어 있던 그대들

죽은 꽃처럼 눈 안 뜨는

바다로


나아가라 빛 속에 빛

열어라 암흑 밤 뿌리.


빈자일기, 민음사, 1977






아침                                      강은교


아침&


이제 내려놓아라

어둠은 어둠과 놀게 하여라

한 물결이 또 한 물결을 내려놓듯이

또 한 슬픔을 내려놓듯이


그대는 추억의 낡은 집

흩어지는 눈썹들

지평선에는 가득하구나

어느 날의 내 젊은 눈썹도 흩어지는구나.

그대, 지금 들고 있는 것 너무 많으니

길이 길 위에 얹혀 자꾸 펄럭이니


내려놓고, 그대여

텅 비어라

길이 길과 껴안게 하여라


저 꽃망울 드디어 꽃으로 피었다.


시와 시학, 1993






어떤 흐린 날                              강은교


어떤 흐린 날


바람이 얼룩진 접시 위, 물고기 한 마리 누워 있다, 그것의 살은 다 파헤쳐져 있었으며 잘게 잘게 저며져 있었다, 이런 시간이 오기를 기다려온 그것의 눈은 한껏 크게 벌리고 창 밖의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따뜻하죠? 라든가……라든가……들을 알고 있다는 듯이 가끔씩 푸들푸들 경련하며, 어느 한 때 분명 바다 밑을 헤엄쳤을 그것, 어느 한 때 분명 모래 속을 파보았을 그것, 어느 한 때 분명 물풀에게 사랑을 속삭였을 그것의 푸른,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주방 아주머니가 들어와 그것의 너덜거리는 뼈를 꺼내어 흔들며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에 그림자 없는 것들은 없어, `이 물고기는 매운탕을 끓여야 합니다……'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푸들거린담, 아주머니는 긴 뼈를 귀찮게 흔든다, `대가리는 매운탕에 넣어', 고동색의 점잖은 빛, 바람소리에나 귀 기울일 것을, 우리의 다리는 이제 너무 힘이 없어, 갑자기 접시 위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머니의 손에 떠메어 나가는 물고기의 뼈와 둥글고 울퉁불퉁한 대가리에 쓰러져 누워 질질 끌려 나가는 지느러미, 물고기의 눈이 뒤를 돌아본다. 바람벽같은 상 위에 지느러미가 검은 돛폭처럼 휘돈다. 놀란 이들이 뼈만 남은 팔목의 시계를 바라본다.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햇빛은 얼마나 뜻없는가


현대시학, 1994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여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의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자전 1                                    강은교


자전(自轉) 1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자전 2                                    강은교


자전(自轉) 2


밤마다 새로운 바다로 나간다.

바람과 햇빛의

싸움을 겨우 끝내고

항구 밖에 매어놓은 배 위에는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웃고 있는 지구

누가 낯익은 곡조의

기타를 튕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눈치채지 않게 뒷길로 사라지며

나는 늘

떠나간 뜰의 낙화(落花)가 되고

울타리 밖에는 낮게 낮게

바람과 이야기하는 사내들


어디서 닫혔던 문이 열리고

못보던 아이 하나가

길가에 흐린 얼굴로 서 있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자전 4                                    강은교


자전(自轉) 4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不意)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뒤에는 때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의 발 아래서 아 다만 펄럭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돌아가게 내버려두라

헤매는 마을의 저 불빛도

깊은 밤 부끄러운 내 기침 소리도

용서하라 다시 용서하라

바람은 가벼이 살 속을 달려가고

일생의 가벼움으로 달려가고

뜰에는 아직

멈추지 않는 하늘의

하루뿐인 짧은 내 뒷모습

반짝이는 반짝이는 잠을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장날                                      강은교


장날


장날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알사탕이 오색의 무지개를 뻗치고 있는 리어카 옆에는, 빛나는 무우 눈부신 시금치, 한 곳에 가니 물고기들이 펄떡펄떡하고 있었다, 거기 돛폭 같은 지느러미 윤기 일어서는 살에선 바다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연 눈동자가 잔뜩 기대에 차서 장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은 가깝고

아침은 머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우리는 그 앞에 섰다, 두 마리를 2000원에 샀다, 그것을 검은 비닐 봉지에 넣었다, 튀어오르지 않도록 입구를 단단히 묶어 가방 속에 넣었다. 아마 그 녀석은 바다 속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바다 속의 정적과 자유이리라고.


우리는 저물녘에 거기를 떠났다, 한밤 중 가방을 열고 봉지를 풀었을 때 너는 거기에 없었다, 얌전한 죽음 두 개가 비닐의 이불을 덮고 고요히, 누워 있었다.


아침은 멀고

저녁은 가까우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시와 반시, 1995. 여름






저녁이 슬슬……                           강은교


저녁이 슬슬……


저녁이 슬슬 걸어오네요.

그 커단 키로

그 기단 팔로

단내 아직 그득한 땅 위

비켜라 비켜라

소리 없는 소리로 오네요

어둠 앞장 세우고 오네요.


저 하늘 한 귀퉁이

흐르는 피를 보세요.

산 너머 산 너머로 달아나며

쏟아놓는 햇빛의

시뻘건 눈물


말없이 큰 산 몸 흔드네요.

큰 산 몸 흔드니

그 옆 작은 산

따라 몸 흔드네요.

큰 산의 큰 나무도

큰 나무 옆 작은 나무도


아, 풀들이 흐느끼네요.

바람 따라 이리저리 몸 흔들며

숨죽인 뿌리들

온 땅에 서걱이네요.


저녁이 슬슬 걸어오네요.

싸움 아직 그득한 길 위로

죽은 잎들 넘치는 들판으로

어둠 앞장 별은 맨 뒤에.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진달래                                    강은교


진달래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 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 속 깊이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파도                                      강은교


파도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꿈꿀 건

온몸에 솟아나는 허연 거품뿐

거품 되어 시시때때 모래땅 물어뜯으며

입맞추며 길길이

수평선 되러 가는구나.

떠돌며 한 바다

막으러 가는구나.


누가 알리

엎드려야만 기껏 품에 안아 보는 세상

날선 바람떼 굽은 잔등 훑고 가면

쓰러져 내리는 길, 길 따라

사랑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목숨의 길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등덜미에 철썩철썩 부서져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아, 이 벽에서 저 벽

저 벽에서 이 벽


끝내 거품 되어 피 넘쳐 넘쳐

수평선이 흐느끼는구나

흐느끼며 한 세상

거품 속에 세우는구나.


붉은 강, 풀빛, 1984






풀잎                                      강은교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한 조각의 노래                            강은교


한 조각의 노래


한 조각 구름 속에서

온 구름이 웃어요.


한 방울 빗속에

온 비 방울방울 울며 내려요.


한 줌 안개 속에서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목놓아 해매는 온 안개.


길이 없어도

쾅쾅 온데서 문이 닫혀도


흘러요, 한 줄 내 눈물에

네 온 눈물 강물이.


누워 있어요,

초롱꽃 한 실뿌리에

온 산 아픈 뿌리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허총가 1                                  강은교


허총가(虛塚歌) 1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동서남북

길은 동남서북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빈자일기, 민음사, 1977






헤매는 발들을 위한 노래                   강은교


헤매는 발들을 위한 노래


  지나간다

  집들이.

  꽁꽁 언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

  겨울 바람이.


  어릴 때 나는 흐르는 물가에 살았다. 아침이면 웃으며 물이 나를 씻었고 밤이면 지는 해가 내 발을 따스히 덮어 주었다. 나는 걷지 않았다. 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웃음. 그러면 내 발이 나를 똑바로 세워 주었다.


  지나간다

  자전거 한 대가.

  자전거에 실려

  목없는 닭들이.

  눈물마른 눈물

  숨죽인 숨들이.


조금 컸을 때 나는 내 집을 떠났다. 아무것도 나를 씻어 주지 않아서 점점 나는 더러워졌다.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누가 내 발에 끊임없이 채찍질해서, 나는 달렸다.


  지나간다

  길들이.

  헤매는 눈먼 창들이.

  허리 꺾인 꽃들이.

  넘어지며 처녀들이.


어느날 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울기 시작했다. 내 발은 쉴 곳이 없었다. 걷고 걸어도, 뛰고 뛰어도 아침에 지은 집은 황혼이면 무너졌다. 아직 멀었습니까! 나는 외쳤다.


  지나간다

  서 있는 울음소리와

  앉아 있는 울음소리와

  이제 그만 누운 울음소리와.


  오르기 위하여

  오르기 위하여


빈자일기, 민음사, 1977






황혼곡조 2번                              강은교


황혼곡조 2번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는 못하면서

쓰던 뼈는 다시

불후의 살로 덮고

제 아이는

등뒤에

이슬 묻혀 남겨놓지

그래도 흐린 날은

귀신이 되어 울지

잊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이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황혼곡조 3번                              강은교


황혼곡조 3번


내가 마시는 물의 무게를,

내가 지고 가는 하늘의

일천만 개의 별빛을,

내가 씹는 살[肉]의

피의 이 좋은 맛,

무너지지 않으면

벽은 이미 벽이 아니다.

무너져 태양의 언저리에서

천만 번 돌다가 돌아다니다가

어디서든 부딪쳐 깨어짐의 희망을,

세상 한쪽은 늘 피로 물드는

희망의 끝간데를,

거기서 일어서는 한 사람

내 그리운 아버지를 본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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