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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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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북한남한 스크랩 정읍 보천교 십일전(普天敎 十一殿) 터
호두까기 추천 1 조회 118 14.12.04 00: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20년대에 한 때 조선총독부 기록상 600만 신도를 거느렸던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소 건물. 보천교 시절의 영화로웠던 기와군은 이제 다 사라지고 지금은 7채만 남아서 역사의 퇴락현장을 지키고 있다.  보천교의 교단으로 활용되었던 차경석의 집 대문.

대흥리 포정소.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1922년 2월 세칭 <차천자교>로 베일에 가려졌던 650만의 민족종교 <보천교>가 세상에 공개되어 모습을 드러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일제의 갖은 회유와 협박 끝에 설득당한 청음 이 상호는 차 경석 교주로부터 교단공개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아 교단이름을 가칭 『보천교』로 등록 신고하고(실제이름은 보화교), 급히 대외 창구라 할 경성 교단 사무소를 급조하여 진정원이라 칭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실체가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막상 『보천교(보화교)』를 공개화하자 일본은 민족종교를 말살하고자 광분하여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20년부터 22년 봄까지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는데, 이는 경복궁보다 크게 지었던 정읍 대흥리의 보천교 본부 '십일전(十一殿)'이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 처분된 사건과 상기 항일기사 147 건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당시 십일전의 목재로 조계사 대웅전을 지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알 수 있다)

차경석 보천교 교주가 진시황의 아방궁같은 건물을 지었던 십일전의 터 - 보천교는 1925년 정읍 대흥리에 보천교의 대성전인 십일전(태극전) 건립을 시작한다. 1928년 겨울에 완공한 보천교 본소는 2만평 부지에 현 조계사 대웅전·내장사 대웅전과 같은 건축물 45채, 부속건물 10여 채가 성전이라 불리는 본소 내에 자리하였다. 본소 규모는 들어가서 나오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이상, 건설비는 당시 총 150만원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십일전을 짓는데 필요한 원목은 만주 및 노령 방면에서 가져왔으며, 건평 136평에 높이는 87.7척, 길이 100자, 넓이 50자, 기둥이 24자라고 전한다. 십일전 공사비는 총 50만원이 소요되어 그 웅장함이란 조선 내 최고였다고 한다.

기와편.

일제 하 가장 막강했던 보천교 연혁사와 조선 총독부 연감 통계상 650만의 민족종교 보천교가 가장 힘있는 독립운동 자금원이 되고 있는 것을 아는 일제에 의해 강력한 한국어 말살과 민족종교 말살정책을 기조로 한 악질적 문화 정책으로 인해 몰락한 사이 1919년 3.1 운동 당시 30만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미국의 지원과 이 승만의 정책에 의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삼산교에서 바라본 대흥리, 왼쪽산이 입암산, 오른쪽이 방장산, 중간에 장성 갈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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