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곽(20)/ 남한산성(南漢山城)
•지정 번호; 사적 57호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청량산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조선 인조 2년(1624)
•분류; 성곽
•내용; 남한산성은 북한산성(사적 162호)과 함께 수도 한양(漢陽)을 남북으로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 지역)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며,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 7월이다. 공사의 부역(賦役; 국가가 백성에게 의무적으로 맡기는 노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여장(女牆; 성가퀴라고도 하며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은 1,700첩(堞)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 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기간 1623~1649)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 안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14)에 세웠고, 1711년(숙종 37)에는 종묘(宗廟)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인조 2)에 건립된 객관(客館; 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이, 군사 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교련 관청(敎練官廳)・기패 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마랑(馬廊)・뇌옥(牢獄; 죄인을 가두는 옥),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묘(溫祚王廟)・서낭당・여제단(厲祭壇; 나라에 천연두가 돌 때 여귀에게 제를 지내는 단)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장경사(長慶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동단사(東壇寺)의 7사(寺)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中營將)은 북장대(北將臺)에, 후영장(後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은 동장대(東將臺)에, 우영장(右營將)은 서장대(西將臺)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수어장대(守禦將臺)]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랫층은 정면 5칸・측면 3칸이고, 윗층은 정면 3칸・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겹처마에 윗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랫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여장(女牆; 성가퀴라고도 하며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을 두르고 단층의 문루(門樓)를 세웠는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1636년(인조 14)에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 1592∼1660)이 축성 후 처음으로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 터였다고도 한다.
•특기 사항;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 시설과 비밀 통로인 암문・우물・관아・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남한산성은 사적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등산을 겸한 봄・가을의 관광은 성남시를 거치는 남문 코스가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 코스가 좋다. 현재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잠정 등록되어 있다.
•이야기(적장의 편지); “여보, 우리에게도 기다리던 아이가 생기려나 봐요.”,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한데 부인에게 무슨 기미라도…”, “간 밤 꿈에 웬 스님이 제게 거울을 주시면서 잘 닦아 지니라고 하신 것이 아무래도 태몽인 것 같아요.”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영약이란 약은 다 먹어 보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던 충청북도 보은의 김 진사 댁 부인 박 씨는 잠에서 깨자마자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김 진사 댁에서는 낭랑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는 자라면서 남달리 총명하여 다섯 살 되던 해, 벌써 천자문을 마쳤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여름 날. 돌이는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뒹굴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김 진사는 용하다는 의원을 부르고 약을 썼으나 차도가 없이 병은 더 심해졌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수리수리 마하수리….” 대문 밖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시주 쌀을 갖고 나온 김 진사 부인은 스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꿈에 거울을 주었던 그 스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묘한 인연이라 생각한 부인은 스님께 돌이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다 알고 있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소승이 돌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절에 가면 곧 건강을 되찾을 것이며 장차 이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김 진사 내외는 애지중지 기르던 아들을 절로 보낼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나 태몽을 생각하고는 하는 수 없이 스님 뜻에 따랐다. 스님 등에 업혀 절에 온 돌이는 곧 건강을 되찾았다. 낮에는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밤에는 불경을 읽으며 9세가 되던 해, 김 진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고향에 돌아가 상을 치르고 돌아온 돌이는 부친을 여읜 슬픔과 함께 사람이 나고 죽는 문제로 번민에 빠졌다. 스님께 여쭈어 봐도 ‘아직 어리다.’며 일러주시려 하지 않았다. 사미의 엄한 계율 속에 정진하던 각성(覺性; 1575~1660)은 14세 되던 해 부휴(浮休) 스님을 따라 속리산(俗離山)・금강산(金剛山)・덕유산(德裕山) 등으로 다니며, 경전 공부 외에 무술・서예 등도 익혔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부휴 스님은 각성을 불렀다. “이제 네 공부가 어지간하니 하산하여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라.” ‘벽암(碧巖)’이란 호를 받은 각성 스님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묘를 찾고는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조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기간 1608~1623) 시절. 조정에서는 무과 시험을 치르는 방을 내걸었다. 각성 스님은 시험에 응시했다. 각성 스님과 마주한 상대는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흰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것이 마치 짐승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회를 거듭하던 중 상대의 목검이 부러졌다. 각성 스님은 절호의 기회였으나 상대방이 새 칼을 들고 다시 대적하도록 잠시 기다렸다. 그때 성난 사나이는 씩씩거리며 규정에 없는 진짜 칼을 원했다. 이를 지켜보던 광해군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진짜 칼을 주도록 어명을 내렸다. 다시 징소리가 울렸다. 기합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뿐 장내는 쥐 죽은 듯했다. 승부의 귀추가 주목되는 아슬아슬한 순간, 사나이의 칼이 스님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스님은 날랜 동작으로 상대방의 칼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오, 과연 장한 솜씨로구나.” 광해군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무과에 급제한 각성 스님은 후에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란 벼슬을 맡았다. 그러나 바른말을 잘하는 스님은 임금에게 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간청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내놓고 산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무술을 더 연마하는 동안 나라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어느 날 밤, 각성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세상에 내려가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스님은 곧 대궐로 달려가 새 임금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임금은 스님의 옛 관직을 회복하여 팔도 도총섭에 명하고 남한산성(사적 57호)을 다시 쌓게 했다.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게 된 인조는 각성 스님의 공을 높이 헤아렸다. “대사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던들 내 어찌 생명을 보존했겠소.” 성곽 수호를 관군에게 맡긴 각성 스님은 의승 천 명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여 북으로 진격했다. “나는 팔도 도총섭이다. 대장은 나와서 나와 겨루자.” 이때 적진에서 달려 나오던 적장은 갑자기 멈춰 섰다. “혹시 김각성 장군이 아니오?”, “그렇소만….”, “지난 날 과거장에서 칼을 잃고 도망간 사람이 바로 나요, 나는 그때 조선의 정세를 염탐하러 왔다가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지요. 그때 살려준 은혜 잊지 않고 있소. 오늘 저녁술이라도 한 잔 나눕시다.”, “술도 좋지만 우선 승패를 가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좋소. 그럼 내일 싸우도록 합시다.” 이튿날 아침. 벽암대사 각성은 의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적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에는 편지를 매단 창이 하나 꽂혀 있었다. “김각성 장군! 지난 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냥 돌아가오.” 편지를 읽은 스님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長慶寺)를 건립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스님의 공을 기리기 위해 남한산성에 ‘청계당(淸溪堂)’이란 사당을 지어 매년 추모제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