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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9 삼례비비정 봄맞이자전거하이킹
자유인은 자전거로 한봉친구 김정수선배님과 셋이서 봄맞이 자전거하이킹하기로 약속하고 영신교회 앞에서 9:20에 만나 만경강 자전거길을 따라 삼례 비비정까지 자전거 하이킹하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나그네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세월의 여정속에 삼례 비비정에 도착하여 전망 풍경이 아름다운 비비낙안과 만경강철교를 조망하니 기분이 감개무량하였다.
그누가 인생은 나그네라 말했던가?
덧없는 세월의 흐름속에 젊음은 흘러가고 찬란했던 시절은 떠나간 세월아!
한세기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인생무상 아니던가?
아름다운 기억을 생각하면서 찬찬히 자전거페달을 밟으며 힘들면 쉬어가고, 즐거운 한세상 살아가야지.
오늘 봄맞이 자전거하이킹은 비비낙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수 있어 감사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순대국밥에 소주를 곁들여 먹으니 기분이 감개무량하였으며,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전수부1기생 정수형과 함께한 3/29 추억 서신
지나간 영상을 되 돌리듯 정수형과 함께 한시간 즐거웠네요.
한시절 철도에서 삶과 청춘을 바치고 이제 노후의 여정에 욕심을 벗어던지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시간,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느시인의 말처럼 추억이란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어 평생토록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마음속의 일기장이며, 추억은 지나간 그리움의 시간들이기에 아름다운 시절이었지요.
산길 물길을 돌고 돌아 드넓은 대지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젊음의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았던 지난시절!
꼬불꼬불 가파른 고갯길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철마에게 고운모래 뿌려대며 거북이걸음으로 기어올라 개태사 고갯길을 넘고 넘어 긴 숨을 달랬던가!
오직 희미한 유油등 신호기에 의지하며 작은 눈 크게 뜨고 고요하기만 했던 어느 시골역에 정적을 깨뜨리며 철길을 누볐던 아련한 추억들!
천둥 번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레일이 녹아내리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도, 폭설에 기찻길을 하얗게 덮어버린 길 없는 철길을 오직 철마에 의지하며 용케도 달려 왔던 무용담을 자랑이라고 했었던가?
철마의 추억을 되세기며 삼례 전라선 옛 철교의 모습을 생각하며 옛시절의 향수에 젖어보았습니다.
따스함이 묻어 나오는 춘삼월 봄맞이 자전거 하이킹 즐거웠고 만나서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hiking시간 및 거리 : 9:30-15:30(6시간) 13.0km
왕복 26km
☛hiking코스 : 영신교회-목천포-만경강변-춘포나루-익산천-삼례비비정-호소가와농장-귀로
산수유의 효능
춘포나루 부근 및 만경강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수유의 효능을 알아보자.
신맛과 떫은맛을 내는 산수유는 구례 의성 이천등지에서 많이 나고 있으며,
산수유는 봄이면 노란색의 꽃이 예쁘고
가을에는 붉은 열매가 예쁘게 열리며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하는 귀한 열매랍니다.
10월 중순 이후에 수확을 하며, 산수유에는 코르닌, 모로니사이드, 로가닌, 타닌, 사포닌 등의 배당체와 포도주산, 사과산, 주석산 등의 유기산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또한 비타민A와 다량의 당도 포함되어 있으며, 산수유에는 과실 중에는 특이하게 탄수화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산수유는 음을 강하게 하고 정력향상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예로부터 남자에게 좋은 원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산수유 효능>은
1. 정력강화 스테미너 향상
2. 고혈압 예방
3. 당뇨병 개선
4. 눈건강
5. 피부미용
6. 갱년기증상 완화
7. 요실금 증상 완화
전라선 구 만경강 철교 등록문화재579호
▷소 재 지: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820
▷구 만경강 철교의 길이 : 476m
전라선 삼례역과 동산역 사이에 있는 철교로, 1912년에 목재로 건설되었다가 1928년 철교로 재건설한 다리. 전라선이 복선전철화 되면서, 2011년10월 철거 논의가 있었지만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3년 12월 20일에 등록문화재579호로 지정되었다.
구 만경강 철교에는 새마을호 객차4량을 개량하여 비비정예술열차(카페 전통품판매)를 운용하고 있다.
만경강(萬頃江) 철교는 스틸거더형식의 철도교량으로 교량상부 구조와 교각 및 교대는 일반적인 교량 형식이지만 건립 당시에는 한강철도 다음으로 긴 교량이었다. 만경평야의 농산물 반출을 위하여 1912년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리∼전주간 경편철도를 개통하면서 목교로 만들었으나 1927년 호남지방의 농산물 반출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제가 경편철도를 국유화하고 일반철도로 광궤화하면서 1928년에 철교로 준공되는 등 일제강점기 당시 호남평야 쌀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증거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출처; 문화재청>
삼례 비비정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읍 후정리 자리한 민족의 애환이 서린 한내 언덕바지에 비비정은 그 아름다운 유래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인상 깊었던 정자였는데, 비비정은 원래 1573년에 지어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1901년에 임실의 월계촌(桂月村)에 옮겨 지을 때 비비정이건기(飛飛亭移建記)를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헌종 7)~1922)가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1998년에 복원한 것이다.
비비낙안(飛飛落雁)
만경5경 비비낙안은 비비정(飛飛亭)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낙안(落雁)은 떨어질 락(落), 기러기 안(雁)으로‘땅에 내려앉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때로는‘기러기 떼'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비비낙안은 바로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아 노는 기러기 떼가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와 운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으리라.
비비정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만나고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되는 만경강 한내를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비비정 앞을 흐르는 한내천은 삼천과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거듭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으로 흐른다.
飛飛亭記
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 其主人崔後良
也 良嘗請記於余曰 亭之作在萬曆癸酉
作之者吾祖永吉也 吾祖永吉以弓馬拔身
官至昌洲僉使 吾父完成亦以弱冠 官羅暖
萬戶 至吾良 蓋三世也 余曰 武人苞苴輦載
奔走權門 以圖進用 老死而後止者 滔滔也
今昌洲獨能免此 而作亭於形勝之地 居處
遊息 導迎淸曠 能以壽終 斯已難矣 羅暖上
不以是賂諸貴勢 下不以是易其衣食 修葺
塗墍 樑棟如新 可謂孝矣 今君又愛文字 旣
揭扁額 又請記以示後人 其繼述之意又深
矣 因問名亭之義 則曰因地名而名之也 余
曰 君世世將種也 古者張翼德之信勇 岳武
穆之忠孝 皆名以飛 而曠世相感 豈非武臣
之所當勉慕者耶 安知君之後承不有張岳
之倫 而凡登斯者 皆以二子爲心 則其爲世
道之助也 豈淺鮮哉 良頓首曰 亭小而義大
人微而語高 受賜之厚 無以踰焉 請歸而刻
之楣間也
時崇禎上章涒灘九月日 華陽老叟記
비비정기(飛飛亭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고 그 주인은 최후량(崔後良)이다. 후량이 일찍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정자를 지은 해는 만력(萬曆) 계유(癸酉)년이고 지은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궁마(弓馬)로써 발탁(拔擢)되어 관직이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이르렀고, 우리 아버지 완성(完成)께서도 또한 약관(弱冠)의 나이에 관직이 나난만호(羅暖萬戶)를 지내셨고 그리고 나 후량에 이르기까지 대개 3대를 거쳤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인(武人)은 포저(苞苴)를 수레에 싣고 권세 있는 가문(家門)을 분주히 오가면서 승진을 도모하다가 늙어서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을 도도히 하고 있다. 지금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창주첨사(昌洲僉使)로서 유독 이러한 폐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자를 경치 좋은 곳에 짓고 거처하면서 유람하기도 하고, 또 맑고 넓은 자연을 만끽하면서 능히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니 이렇게 하기는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나난(羅暖)이라는 곳은 위로는 귀한 세력에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을 교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형편인데도 흙을 발라서 수리하고 들보와 기둥을 새 모습으로 꾸몄으니 효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그대는 또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이미 편액(扁額)을 내걸고 또 기문(記文)을 요청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자기 선대를 계술(繼述)하려는 생각 또한 깊다고 하겠다.”
하였다. 인하여 정자 명(名)을 지은 의미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지명으로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은 대대로 장수(將帥)의 종자이다. 옛적 장익덕(張翼德)은 용맹으로 신임을 받았고, 악무목(岳武穆)은 충신이며 효자이니 두 사람 다 비(飛)로 이름을 지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느낌은 같은데 어찌 무신(武臣)을 마땅히 흠모하려고 힘쓰지 않겠는가. 또 어찌 알겠는가. 그대의 후손 중에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의 무리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무릇 이 정자에 올라와서 모든 사람들이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 두 사람처럼 되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면 그것도 세도(世道)에 일조를 한 것이 어찌 적었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니, 후량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정자는 작지만 뜻은 크게 말씀해주시고 사람은 미미하지만 말씀은 고상하게 해주셨습니다. 후덕하게 해 주신 말씀을 준수하여 돌아가서 문미(門楣)에 새기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숭정(崇禎) 경신(庚申) 9월 화양노수(華陽老叟)는 기(記)하노라.
飛飛亭重建記
飛飛亭事實 旣載於我曾王考重修之記
余無容更言 而其後亭又毁圮 只有遺址
先王己亥 我先考按節湖南 克承先蹟 有
意未及而遞 雖捐廩百金 付倉付還 俾爲
拮据改建之計矣 至今五十年間 因循延拖
亭固未就 財則漸敷 至於數千金之多 今
上己丑 道內章甫 設置湖山影堂 而士論以
爲不可不更起此亭 欲以己亥留殖之財 圖
所以經紀之方 問議於道伯趙公寅永 院儒
黃斯文仁源 又千里跋涉來請於余 余於少
時 詳知此事 每以尙未改建 爲之歎愴 今聞
湖儒之言 樂而許之 蓋地之興廢有數存
焉 而先正命名之舊亭 吾家兩世之遺志
得以快成於今日 此非但爲一道士林之光
而已 余之與幸 興感容有其旣乎 若夫守
護葺理 使此亭與影堂 同其永久 則諸
生之責也 影堂諸儒謂余 不可無文字 故
槪言其更建事蹟 謹繼曾王考遺文而
記之如此云爾
上之三十一年辛卯 崇政大夫行禮曹判
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
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徐俊輔 記
비비정중건기(飛飛亭重建記)
비비정(飛飛亭)의 사실(事實)은 이미 우리 증왕고(曾王考)께서 적은 중수기(重修記)에 실려 있으니 내가 거듭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정자가 또 무너지고 터만 남게 되었고, 선왕(先王) 기해(己亥)년 우리 선고(先考)께서 호남(湖南)을 안절(按節)할 때에 선대의 유적을 이어 계승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직(遞職)했다.
비록 100 금(金) 정도의 금액을 출연(出捐)하여 창고(倉庫)에 부여하고 환자(還上)에 부여하여 개건(改建)할 수 있는 자본은 저축되었으나, 지금까지 50년 동안 피일차일 끌다가 정자는 건립도 못하고, 돈만 점점 더 불어나서 몇 천 금까지 많아졌다.
금상(今上) 기축(己丑)년 도내(道內)의 장보(章甫)들이 호산영당(湖山影堂)을 설치(設置)하였다. 그리고 사론(士論)이 ‘불가불 다시 정자를 건립하자.’고 하여서, ‘기해(己亥)년 유치(留置)하여 식리(殖利)해 두었던 재정(財政)으로 경영하는 방도를 도모하기 위하여 도백(道伯) 조공(趙公) 인영(寅永)에게 문의(問議)하였다. 그리고 원유(院儒) 황사문(黃斯文) 인원(仁源)도 천 리 길을 허겁지겁 와서 나에게 중건기(重建記)를 요청하였다.
나는 소싯적에 이 사안(事案)에 대해 상세히 알았으므로 늘 오히려 건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호유(湖儒)들의 말을 들으니,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대개 땅[地]의 흥폐(興廢)에도 운수(運數)가 있어서일 것이다. 선정(先正)께서 명명(命名)하신 구정(舊亭)은 우리 집안 양세(兩世)의 유지(遺志)로써 지금 흔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비단 한 도(道)의 사림(士林)들에게 영광으로 그칠 뿐 아니라, 나도 다행히 참여하게 되었으니 감회(感懷)가 혹여 이미 있었던 것인가 생각된다.
저 수호(守護)하고 수리(修理)하여 이 정자와 영당(影堂)이 함께 영구(永久)토록 유지하게 하는 일은 제생(諸生)들의 책임이다. 영당(影堂)의 제유(諸儒)들이 내게 말하기를, ‘문자(文字)가 없어서는 불가(不可)하다.’고 하기에, 대략 중건하게 된 사적(事蹟)을 말하고, 삼가 증왕고(曾王考)의 유문(遺文)을 계술(繼述)하여 기록하기를 위와 같이 했을 뿐이다.
상(上) 31년 신묘(辛卯) 숭정대부 행예조판서 겸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손우빈객 규장각원임직각(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서준보(徐俊輔)는 기(記)하노라.
비비정이건기(飛飛亭移建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었는데 무너져서 임실(任實) 계월촌(桂月村)에 옮겨지었다. 대개 창건한 사람은 첨사(僉使) 최공(崔公) 휘(諱) 영길(永吉)이며, 옮겨 지은 사람은 그 후손이다. 최공(崔公)의 십세손(十世孫) 창렬(滄烈)이가 우암선생(尤庵先生)이 지은 원래의 기문(記文)과 직각(直閣) 서공(徐公) 준보(俊輔)가 지은 중건기(重建記)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사실(事實)을 기록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우옹(尤翁)은 장(張)·악(岳) 두 무신(武臣)을 의당 힘써 앙모해야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그 지남(指南)하는 것이 깊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는 말할 수 있으나 속인(俗人)과는 말하기 곤란하다.
아아, 지금시대로써 우옹(尤翁)의 시대와 비교해본다면 어떠한가.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뒤로하는 사람과, 신하로서 그 임금을 뒤로하는 사람은 우선 논할 것 없거니와, 문을 열고 원수에게 읍(揖)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는 사람도 또한 있으니 때때로 한번 생각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두발(頭髮)이 치솟고 눈초리가 찢어지게 하는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공(崔公)은 후예(後裔)이면서 또 먼 세대의 맏아들이다. 그래서 반드시 장후(張候)를 의(義)로써 토적(討賊)하고 악왕(岳王)을 맹세코 죽여 설치(雪恥)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 비로소 선대를 잘 계술(繼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열(滄烈)이 또한 유학(儒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장차 족인(族人)과 성현(聖賢)의 학문을 강론하고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크게 세도(世道)에 대해 도움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우옹(尤翁)도 최씨(崔氏)에게 바라는 바를 기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창열(滄烈)이가 대답하기를 ‘선생께서 하신말씀은 원대(遠大)하십니다. 무릇 우리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누군들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을 글로 써서 돌아가 그 벽(壁)에 새기도록 했다. 저 정자 이름은 처음부터 지명(地名)으로 지었고, 지금은 최공(崔公)의 자손이 거주하는 곳으로 옮겨서 이건(移建)한 것이다.
■…■ 중추(仲秋) 전우(田愚)는 기(記)하노라.
익산 구 일본인 농장가옥
➡근대등록문화재 제211호 (2005.11.11)
➡위치 :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 103-3
➡규모 : 2층 목조 일본식건물. 건물 106.78m².
일제강점기 농업 수탈의 아픈 역사를 증언해 주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이 집은 옛 일본인 소유의 호소가와농장에 소속된 건물이다.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위에 일식 기와를 얹었고, 외벽은 비늘벽으로 마감하였다.
농장의 농업 기술자였던 에토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에토주택이라고도 불린다.
에토는 당시 이리농림학교에 유학 온 일본인들 중 한 명으로
넓은 농장을 터전으로 삼아 크고 멋진 집을 지었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꽃, 봄의 전령사 개나리 꽃이 봄맞이 나온 자전거 하이킹 일행을 반겨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개나리는 봄에 피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벚꽃과 함께 봄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다만 벚꽃보다 개화 시기가 빠르기 때문에 보통은 진달래와 엮여서 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걸 상징한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 깊은 정, 조춘의 감격, 달성이라고 한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성현군자께서 말씀하시길,
老覺人生 萬事非(노각인생 만사비)
늙어서 생각하니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며.
憂患如山 一笑空(우환여산 일소공)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 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인 것을.
온 세상이 훨씬 넓고 아름답게 보이고 편하고 진실하게 보이네
人生事 空手來 公手去 (인생사 공수래 공수거)
인생사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을........
===좋은글===
◐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삶이 즐겁다 ◑
첫째, 눈이 즐거워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좋은 경치와 아름다운 꽃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을 자주 해야 아름다운 경치와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자주 하여야 할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면 여행하기 위해 번다는 사람이 많다.
여행은 휴식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꼭 여행만이 눈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여행이 여의치 않는다면, 하루 시간 중 짬나는 대로 웃기는 글이나, 웃기는 사진을 보면서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입이 즐거워야 한다.
입이 즐거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도락가는 아니더라도 미식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지방에 따라 그 지방의 유명한 향토 음식이 있다.
특별한 향토 음식점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한다.
귀가 즐거우려면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계곡의 물소리도 좋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도 귀가 즐거운 것이다.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정서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치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 한다.
몸이 즐거우려면 자기 체력과 소질에 맞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취미에 따라 적당한 운동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도 즐거운 것이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려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 때 정말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베풀어야 한다.
남을 칭찬하는 것도 베푸는 것이다.
마음이 즐거워야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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