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재야 장기표씨 별세 ◈
장기표(79)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어요
장 원장은 이날 오전 1시 35분쯤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지요
장 원장은 지난 7월 17일 페이스북에 친구·지지자에게 쓴 편지를 올리며
담낭암 말기 진단 사실을 공개한 뒤 병원에 입원했어요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했지요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후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접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어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는 한동안 서울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지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유신 독재 반대 시위,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수배와 도피를 반복했고
10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어요
그는 김영삼 정부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법에 따라
민주화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요
당시 그는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데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어요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89년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해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지요
하지만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이어 17·19·21대까지 총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어요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지요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했으나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했어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했지요
장 원장은 지난 7월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에서
투병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어요
그는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했지요
이어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어요
장 원장은 “과도한 양극화, 위화감과 패배 의식,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온갖 사건 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온다”며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 정치가 횡행해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했지요
그는 “물극즉반(物極則反·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온다)의
세상 이치처럼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길 기대할 뿐”이라고 했어요
지난달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장 원장은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항암도 안 한다”고 했지요
다만 “정치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지 못하고 가는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어요
장 원장은 지난 4‧10 총선 이후 석달을 밤새워
‘위기의 한국-추락이냐 도약이냐’를 집필했지요
그는 책에서 “비전도 전략도 없이 오직 집권욕에만 사로잡힌 여야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뤄 나라와 민생을 거덜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고도 했지요
오늘도 광화문 네거리의 전광판은 여야의 진흙탕 싸움을 중계하고 있어요
장기표의 특권폐지당이 내걸었던 공약이 떠올랐지요
주민투표로 의원직을 박탈하는 ‘국민 소환제’.
소환이 아니라 해산을 시켜도 시원치 않을 국회이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
▲ 3년 전 어느신문과 인터뷰할 당시의 장기표 조무하 부부.
"기자를 만나야 한다는데 여름 옷이 없어 오랜만에 원피스를 한 벌 사 입었다"며
수줍게 웃는 아내를 장기표가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