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틀에 갇힌 자유로운 영혼
2020.1.16.
1950년대
중반 마침내 그녀는 우리 나이로 30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
시대에 흔히 하던 중매 결혼이 아니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하였다.
그녀는
6.25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고향으로 피난 왔다가 교사가 부족한
시골 중고등학교의 요청으로 국어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정착해 5년여의
교직 생활을 하다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당초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종전 후 고향 땅에 내려와 있었다.
마땅히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없던 그곳에서 그는 같은
학교의 요청으로 물리와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로 교직을
시작했다.
그는
분명 그 시대의 다른 남성과 달라 보였다.
눈이
쑥 들어가 서양인 같은 외모를 한 그는 서양 신사만큼
키도 컸고 중절모자와 지팡이를 멋으로 짚고 다닐
정도로 시대를 앞서고 세련된 매너를 지닌 신사였다.
이런
시골 동네에서 그런 인물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는
처음 만날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늘 경어를 썼다.
그것은
단지 그가 그녀보다 한 살 나이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대하는 평생 지속한 그의 예의였다.
그녀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다.
결혼
후 그녀는 다시 서울로 이사해 신혼 방을 꾸몄다.
전후
온 나라가 가난하고 물품이 귀하던 시절에 비록 단칸방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일본 서적과 외제 물건을 종종
사서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결혼하고
2년
뒤 부모님을 일찍이 여위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부가
돌아가셔서 3대
독자인 그는 호주가 되어 집안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안은 그 지역의 3대
부호 집안의 하나였지만 토지 개혁으로 농토도 거의
없어져 그와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말이
대지주 집안이지 이제는 말로 쌀을 사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반과 상민의 지켜야 하는 선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19세기의
사고에 갇혀 사는 시골 마을에서 그녀의 처신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여상 시절부터 탁구,
배구
등 각종 운동을 즐기고,
여름이면
한강의 배를 좇아 수영을 즐기던 현대 여성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양장하고 다녔고 영화와 연극도 즐겼던
그녀였지만,
구설수를
감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깨어있는 현대 여성이었다.
트럭
여러 대를 소유한 부유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아버지가
딸의 신식 교육을 반대하자 다른 자매와 달리 아버지와
사업을 하던 개성 상인의 양녀로 들어가 학교에 다녔을
만큼 자기주장이 분명한 여성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은행 직원을 하다 해방이 되자 사범대 속성
과정을 마치고 국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그녀의
진취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사고 덕분이었다.
1960년대에
학교 선생님들과 모임에서 가곡을 멋들어지게 부르고,
서양
요리,
자수,
재봉
등에 능한 그녀는 그가 중요한 일들을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런
그녀에게 시골의 시대에 뒤처진 삶의 방식은 분명 숨을
막히게 하는 구속이었다.
결혼
전 그녀의 사진은 모두 양장을 한 모습이었지만,
시골에
살면서 그녀는 적어도 1970년
초반까지는 늘 한복을 입었다.
한
달에 한 번 남대문 시장에서 그가 사다 주는 일본 서적이
라디오도 없는 벽지에서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러니,
내가
목격한 그와 그녀의 유일한 큰 다툼이 서울로 이사
가자는 그녀의 바람 때문이었던 것은 납득할만한
일이다.
어쨌든
그녀는 자유롭게 사는 여상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소공동
아케이드에서 도자기 전문점을 열어 성공한 사업가
친구며,
일본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다른 친구 등 자기 인생을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종종 내게 들려주었다.
그것이
분명 그녀가 선망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의 농산물 건조장을 우리 집에 지을
때 남은 합판을 이용해 탁구대를 만들었다.
그
탁구대로 내게 탁구를 처음 가르쳐준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나는
늘 그녀의 조용하지만,
시골
동네의 어느 여인들과는 다른 세련된 매너와 교양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그녀의 당당한 자신감 때문인지 그녀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대할 때도 자기 뜻을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설명하고 관철했다.
중학교
2학년
때 900여
동급생 중 최고라는 물상 성적이 고작 70
몇
점밖에 안 되자 나는 실력 없는 물상 교사의 교체를
요구하는 당돌한 행동으로 교내에 물의를 일으켰다.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조용히 담임과 교장을
만나 내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게 사태를 깔끔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런
그녀는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여성,
나의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늘 집안일에 매어 사셨다.
오
남매를 키우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교장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증조부가 남기신 야산을 개간해 커다란
과수원을 일구었다.
덕분에
겨울 김장은 배추만 천 포기 넘게 담가야 했고,
끼니마다
식구 외에도 10명이
넘는 일꾼이나 작업자의 식사를 준비하셔야 했다.
예전에는
하루 세끼 말고도 오전,
오후
두 차례 참도 내야 했으니 온종일 쉴 틈이 없었다.
물론
인력이 넘치던 시절에는 두 명의 여자분이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어머니께서
한가롭게 앉아 계신 것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안스러워 시골에 내려가면 과수원 일을
도우며 틈틈이 집 청소도 하고,
빨래도
개는 등 조금이라도 어머님 수고를 덜어 드리려 했지만,
어디
그게 큰 도움이 됐을까?
이런
어머님의 농장 뒷바라지에 매인 삶은 여든이 훨씬
넘으셔서 아버지가 과수원을 더는 운영하지 않게 된
불과 8년
전에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이는
너무 늦은 자유였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70대
후반부터 무릎 관절이 편찮아지셔서 갈수록 보행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셨고,
곧이어
기력도 정신 건강도 악화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님의
마지막 6년은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생활이 불가능하셨다.
페미니즘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무수한 여성이 가정과
육아 대신 직업적 성공과 자아 성취를 이루며 원하는
삶을 사는 이 시대.
여성
은행 지점장,
교장이
더는 기삿거리가 아닌 이 시대.
나의
어머님도 요즘과 같은 시대를 사셨다면 그런 당신이
소망하던 자유롭고 사회적 성취에 만족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자식과
남편의 과수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어머님의
평생!
그저
어머님께 죄송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