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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이즈하라 가네이시성에서 덕혜옹주비를 보고 슈젠지 최익현 비에 참배하다
2024년 1월 25일 부산에서 NINA 호 배 를 타고 대마도 히타카츠 에 도착해 호텔 대마도 히타카츠에 가방
을 보관하는데 호텔 이름이 "쓰시마가 아니고 대마도" 라고 쓴 탓에 사장이 한국인인가 생각했더니
그건 아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 라는 호텔이 있어 같은 쓰시마시인지라 똑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함이랍니다.
그러고는..... 30여분을 걸어서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 을 구경하는데 여긴 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배차
간격이 길어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지라 보통은 자전거 를 빌려서 다녀오는게 일반적인데, 우린
일행이 많은지라 걸은 것이고 예쁜 해수욕장은 절로 힐링 이 되는지라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와 1박 합니다.
다음날인 1월 26일에 한글로 적힌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로 가서 차량을 인수해서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가미 아가타 를 지나 미네마치(峰町) 로 내려갑니다.
대마도는 관광객의 70% 는 한국인인지라 한글로 표기된 상호가 많고 메뉴판도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차는 조금 더 달려 언덕 으로 올라가서.... 드디어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도착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200여개 정도의 가파른 계단 으로 산을 올라 전망대 에 서서
구경을 하고는 다시 차를 타고 미쓰시마(三ッ島) 의 만제키 운하 에 도착하는데.... 만제키세토
(万関瀬戸) 는 쓰시마섬 중앙부를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500m 짜리의 운하입니다.
러일전쟁때 일본 해군은 조선땅 진해 에 있었는데 대마도 운하는 일본에서 오는 함대가 대마도를 횡단
해 합류 하기 위해 뚫었다고 하며..... 해방후 진해는 한국 해군 본부가 되었고 6.25 때 우리 해군은
백두산함을 몰고 북상해 울산 앞바다에서 남진하는 북한군 함정을 함포로 격침했으니, 실패했으면
부산에는 인민군 특공대가 상륙해 바다에 기뢰가 설치 되어 미군등 연합군 상륙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었으나 군함 이 한척도 없는지라 해군은 군인들 봉급에서 공제하고 부인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15,000$ 를 모으자 정부가 45,000$ 를 지츨해 손원일은 미국에 군함을 사러 갔는데, 돈이
부족하다보니 고철로 팔릴 배 를 사서 하와이로 끌고와 3인치 대포 1문에 기관총 1정을 설치하고 포탄
100발을 구입해 1950년 4월 10일 진해에 입항했는데, 포탄이 100발 뿐이니 실사격 한번 못하고 6.25를
맞아 적선에 포격해도 맞지 않자 피격을 당하면서 400미터 까지 접근해 평사포로 겨우 격침시킨 것입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러시아함대 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톡 에 도착
하면 해전에서는 이길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일본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제해권 확보에 있었던지라 진해항 을 출항해 쓰시마 해전 을 벌여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니
이토 히로부미가 사전 작업을 한 탓에...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주선해 종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진해는 제포 로 조선 태종 때 염포 및 부산포와 더불어 3포 왜관이 설치되어 수백명 일본인들이 상주하며
무역 을 했던 곳이고... 또 임진왜란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로 아버지는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진해 웅천 왜성에서 1593년 12월 27일 세스페데스 신부 집전으로 미사 를 봉헌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다시 렌터카에 올라 조금 달리다가 허기가 지는지라 Foods Market Saiki 라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도시락과 빵 등을 구입해서 차 안에서 먹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에 해당하는
곳으로 큰 마트는 사이키 밸류 라고 부르고 슈퍼 같은 작은 마트는 다케스에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대마도에는 편의 점은 적으나 마트 는 많으니 히타카츠항의 곤피라신사 맞은편에 히티카츠가 있고,
히타카츠 외곽에도 오우라가 있으며, 도요타마에 같은 이름의 밸류가 있는데다가, 상도와 하도
중간에는 미쓰시마가 있고 이즈하라 외곽에는 맥스밸류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 있으니 편의점
보다 다양한 즉석식품 이 많으며, 가게 하나 없는 후미진 곳을 지날 때는 자판기 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만제키바시 (万関橋, 만관교) 로 운하를 건너 남섬으로 달려서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산길을 15분쯤
오르니 언덕이 나타나고 길은 산 허리를 돌아가는데..... 오른쪽은 절벽으로 저 아래 아소만 이
보이며 조금 더 걸으니 무느진 성벽이 보이고 드디어 가나타노키 (金田城 가네다성) 남문 에 도착합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왕위를 잇게 한후 다시 1천척 배에
3만 대군을 보냈지만.... 663년 금강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을 당해 패해 철수한후 죠야마산
(城山) 에 쌓은 험준한 이 산성은 당시 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나당 연합군의 일본 침공 에
대비해서 망명해온 백제인들을 동원해 667년에 완성 했다니 그럼 백제식(조선식) 산성 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렌터카에 올라 남쪽으로 조금 더 달리니 면세점인 다이렉스 미쓰시마 에 도착하는지라
안으로 들어가 쇼핑을 하는데..... 면세할 상품과 그렇지 않고 여기서 먹을 상품은 따로
구분해서 계산 을 하니, 대마도 여행은 보통은 먹고 마시는 먹방과 면세 쇼핑 두가지인가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터카 에 올라서 한 5분쯤 달리니 드디어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
하는데.... 바로 '쓰시마시의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 (嚴原 엄원)" 입니다.
시내로 들어가 5분쯤 달려서는 항구 가까이 식당거리 인근 운하 옆에 있는 우리가 예약한 호텔에 도착
하니 이름은 "지온(祈園)" 이니.... 교토에서 마이코 를 볼수 있는 오래된 옛 동네 이름이 생각납니다.
여기는 한국인이 주인 으로 건물은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 이며.... 5층은 민슈쿠
(民宿, 민숙) 인데.... 코로나 사태 로 인해 지난 3년 동안이나 여행이 불가능했던지라
그 흔적이 보이니 1층은 저녁에 잠깐 열었다가 문을 닫고 2층과 4층은 비워둔 것 같습니다
운하를 따라 걸어서 주택가를 지나니 넓은 터가 나오고 비석 이 하나 서 있어 읽어보니
문화8 (1811) 년도 朝鮮通信使 幕府 接偶の地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노지) 라고
적혀 있으니.... 그럼 1811년에 여기서 막부의 관리가 조선통신사를 맞이 하였나 봅니다.
역사민속 자료관을 지나니 근사하게 생긴 문이 보이니 바로 가네이시 성의 누문 인가본데 가네이시성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걸으면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 (巖原八幡宮
神社) 인데.... 경내에는 조선인과 관련된 사당 이 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양한 조선인 고아
고니시 마리아 와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 부부의 아들이자 가톨릭 신부 고니시 만쇼를 모시고 있습니다.
고니시 만쇼 小西マンショ 는 1614년 베트남의 일본인촌 호이안 과 말레이시아 일본인촌 말래카 를
거쳐 인도를 거쳐 로마 로 갔으니 1624년 8월 28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627년 사제품을 받아 신부
가 되어 1632년 귀국해 일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644년 체포되어 순교 했는데..... 그 전에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비르는 말래카 일본인촌에서 안지로를 만나 그의 안내로 1853년에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해 예수교를 전도했고 시모노세키에 상륙했으니 가라토시장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서산사(西山寺) 가 있으니.... 조선 통신사 들이 묵었던 숙소로 1589년
통신사 때 부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시비 도 있다지만, 우리는 시간도
없으니 직진하니 저만치 현대적인 건물이 나타나고 그 옆에 오래된 성벽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엄청 넓은 공터 가 나타나는데..... 엣날에 성 안으로 여기는 번의 행정 사무소 와
가신과 고급 사무라이들이 머무는 건물 등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비석이 보이고 꽃 이 많이 바쳐져 있으며 옆에 안내문이 보이는데,
바로 이씨왕조- 소우케(宗家) 결혼 봉축 기념비 (李王宗家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 입니다.
이 비는 2001년 11월 10일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복원된 것인데, 결혼식은 도쿄
에서 올렸고 여기 대마도는 그해 시댁에 인사차 방문 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덕혜옹주 (德惠翁主)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로 덕수궁에서 태어나 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
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여자 가쿠슈인 에서 수학했으며
1931년에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 와 정략 결혼해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습니다.
옹주는 왕족다운 기품 을 갖추고,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머리는 한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뒤에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하게 늘이고, 서울에서 일본 옷에 하카마 를 입고 학교를
다녔으며 상궁이 항상 마차를 같이 타고 와서 수업 중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의 결혼전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 귀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는데, 소(宗)는 옛 쓰시마번주 소 요시아키라 (宗義達) 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和族) 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 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옹주는 결혼 당초 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 되어 있었으니
당시의 모습을 본 이에 따르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이후 옹주는 1932년 8월 14일 딸 소 마사에(宗正惠) 를 낳았습니다.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 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 에 입원하였으며,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 과 봉호(封號) 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 로 일가를 창립했고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반쇼인 을 뒤로 하고 걸어 나와 슈젠지 절 을 보아야 하니 시가지를 걸어서 운하를 따라
항구쪽으로 내려가다가 조금 못미쳐 어림짐작으로 산쪽으로 난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찾아
올라가니 일반 주택의 담장으로 보기는 힘든 유난히도 두꺼운 검은 돌담 이 보이니.... 그럼
이것이 바로 화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방화벽인 호우카헤키 ほうかへき (防火癖) 인가 봅니다?
이윽고 중국 강남지방의 오음(吳音) 으로 유마경 읽는 방법을 왜국에 전했다는.... 백제
비구니 법명(法明) 이 지었다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 절을 발견하고는 들어
가는데 서양의 성당이나 일본의 절 안에는 묘지 가 늘어서 있으니 여기도 엄청 많습니다.
주지가 출타했는지 아님 밤에는 퇴근 하는지 사람이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최익현
선생의 묘가 있다고 잘못 안 탓에 묘소를 찾다가 어둡기도 하고 묘지들이 많기도 해서 발견
하지는 못하고 돌아나오다가 절의 오른쪽 입구에서 최익현기념비 를 발견하는데..... 大韓人崔益鉉
先生殉國之碑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최익현(崔益鉉 ) 은 조선왕국 말기 유학자 로 철종시기 문신(文臣) 이었으며, 고종 시기에는 조선
최후의 산림중에 한 사람으로 유학자들을 이끌었던 거두이자 충신으로 애국지사인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친고종 충성파 산림으로서 흥선대원군을 실각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고 개화기에는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로 개국 반대운동 을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독립협회에 반대 하고 기존 유교 질서로 돌아 가려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일제 침탈로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자 을사의병 항쟁 을 했던 최익현은 흥선
대원군과 더불어 조선의 수구파를 상징하는 인물로 개화를 반대해 조선 근대화에 걸림돌 이
되었던 인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안위와 독립를 위해 결사투쟁한 애국자 입니다.
대원군에 의해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반기를 드니 270년간
경복궁을 재건하지 못한건 재정이 부족 했기 때문인데, 대원군이 무리하게 재건하면서 민생을 파탄
에 빠트리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했다고 상소해 혹독하게 비판하니.... 대원군의 사람들에게 역사에
이름 석자 남겨 보려는 구차한 행위라고 비난받았지만, 고종은 용기를 칭찬하며 돈녕부 도정에 제수합니다.
1868년 최익현의 상소는 경복궁 토목 공사를 중지 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지 말며,
당백전(當百錢) 을 혁파 하고 문세(門稅) 를 받는 것을 금지하라는 것인데, 대원군은 관료들에게
돈을 받고 벼슬 을 팔고 인플레를 유발시킨 당백전 등 건설비를 모으느라 무리를 거듭하자....
1873년에 상소해 대원군을 맹렬히 비판하며 이륜두상 이니 올바른 지위가 아닌 종친이라 비난합니다.
천재(天災) 가 나타나고 지변(地變) 이 일어나며 기후가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다며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조정이 발칵 뒤집혀 목숨이 위험할뻔 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보호하였고,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이 은퇴를 결정하고는 항의 시위를 하자... 고종은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대원군 하야를 확정지으면서 친정 이 시작되니 "오매불망 얼마나 기다렸던 왕위" 냐?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 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 로 진격하니 어재연의 조선군
600명은 열심히 싸웠으나....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구식 화승총 은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자, 성벽을 오르는 미군들을 향해 화승총을 버리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돌을 던지는 조선 병사를 후방의 미군이 저격하니 전투는 불과 한시간 만에 끝났는데...
600명 조선군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 포로 가 되었는데도, 미군 피해는 전사자 3명에 부상자는 10명 에 불과했습니다.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 이 승선한 일본 군함 운양호 는 초지진 포격후 영종진에 이르러
보트 2척에 22명 육전대 를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 을 내고 도주
하는데 조선군의 견고한 성벽을 기어올라 함락시킨 일본군은 조선군 대포 36문에 소총 130자루
까지 노획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 에 불과한데..... 저 경상자 2명도
450명 조선군의 사격에 의한 것이 아니고, 보트에서 내려 상륙할 때 뻘 밭에 발이 삐인 것 입니다?
36문 대포에 300정 총을 가진 450명 조선군 이 견고한 성채에서 22명 일본군 에 처참하게 패했는데도
최익현은 개국을 결사 반대하니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하자고 하니 믿을수 없으며, 저들이
파는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고, 저들은 말이 왜인
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 이며... 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 를 취할 것이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니 송시열 계열의 주자 성리학 학통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배척 하는 것이니
성리학을 통해 지켜온 기득권으로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은 패도정치이며,
동학은 토비떼 이고 천주교는 사학(邪學) 이며, 농민 운동은 체제를 위협하는 비적떼 이고,
갑오개혁도 일본이 시켜서가 아니라 주자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충돌하기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고종은 운산금광을 팔고 일본에서 빚을 내서 크라우프 야포와 개틀링 기관포에 미제 레밍턴 소총 으로
조선군을 무장시켰지만 1894년 황토현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죽창이 주무기인 농민 들에게 패해
전주성을 뺏기는데, 농민군이 재봉기하자 일본군 미나미 소좌 는 항복한 조선군 2,500명에 일본군
후비병 200명으로 공주로 내려가 지형정찰로 우금치를 택해 농민군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조선군이
가진 대포와 기관포 십자포화망을 만드니 2만 농민군은 전멸하는데..... 그럼 지휘관 이 문제인 걸까요?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가 서울에 무혈입성해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의 항복을 받은후, 김홍집 친일내각 을 세우고 일본 공사의 훈수에 의해 1895년
갑오개혁 을 하는데.... 왕실과 정부의 재정 분리, 경찰과 사법제도 설치, 도량형 통일, 반상의
신분 차별 폐지, 천민제도 폐지, 노비 해방 에 500년간 이어진 과부재혼금지 제도 폐지등 이었습니다.
1895년 을미개혁에도 반대를 고수하였으며, 1896년 단발령 이 일어났을 때는 상투 자르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 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왕명(王命) 거역 및
반역 미수죄로 체포되었는데.... 개국과 서양 제도를 결사반대한 것은 서양인들은 공맹의 도를 모르는
야만인들로 짐승 에 불과하니, 저들과 교섭하면 "군자지국인 조선인도 짐승" 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는 왜놈들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들이 들끓는 조정에 있어봤자 심신(心身) 이
더러워 지게 될 뿐이라며 관직을 내놓고 사퇴후 향리에서 후학의 교육에 힘썼는데
서재필 등이 만들었던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대한 매우 노골적으로 배척
하니.... “군주가 유학에 힘쓰면 나라가 절로 평안해진다” 는 사상이 그 배경 논리 입니다.
을사조약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고종에게 조약 체결의 책임 을 물으며 명의 숭정제를 예로 들면서 까지
날선 공격을 하였으니 "숭정제는 자결 까지 했는데 폐하께서는 조약 하나 막지 못하셨습니까" 라는
취지인데, 을사 5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요구하고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 하고는 각 공관이 철수하기 전에 조약이 무효라는 성명을 전달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 의병 궐기 내용을 알리며 납세 거부, 기차 승차 및 철도 이용 거부, 일본 상품 불매, 을사 조약
가담자 5적 처단 운동과 의병 활동 및 항일 운동을 호소하며 1906년에 정읍 무성서원에서 74세의
노구를 이끌며 의병 을 일으켜, 남원에서 고종의 해산 권고 칙지를 받고 고심하던 중에 유생 21명과
함께 방안에서 사서삼경인 맹자를 읽다가 대한제국군(진위대) 에 체포되자 유생들을 해산하고 투항 합니다.
그러니까 실제 전투 는 해보지도 못하고 조선군에 잡혀 일본군에 넘겨져 쓰시마섬에 유배 를 왔던 그는
유배지에서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으라는 요구를 받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 따위에는 입에도 대지 않겠으며 차라리 굶어죽을 것을 선언하고 단식 운동 에 돌입하였으니,
무리한 단식 영향으로 인한 아사(餓死) 로 잘못 알려졌으니...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런줄 압니다.
진상은 유배를 간 제자들도 단식하였으니 일본 측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해
죽을 먹기 시작했으니 단식을 시작한지 불과 이틀 만의 일로, 함께 유배가서 단식하였던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 에 기록되어 있는데.... 74세 노구에 단식하며 4개월을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최익현은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으며 대마도에서 생활 3개월만에 풍토병을 얻어 1개월간 투병하다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