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가을 생각/ 오영빈
익어가는
단풍 아래
술 한 잔을 마신다
친구가
그리워서
또 한 잔을 마신다
젊은 날
그날 그 생각들
가을 잎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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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 윤경희
칼날에 손 베는 것보다 더욱 아픈 일은
느닷없이 사람에게 마음 베이는 일이지
한순간
아픔이 아닌
뼛속 깊이 박힌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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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먼저 안다/ 이한성
떠날 때가 가까우니 몸이 먼저 안다
배를 깔고 잔발로 걸어가는 개미처럼
발끝이 땅을 물고 있다, 마음만 바쁘다
찬바람이 나지 않아도 발목이 씨끈하다
고장난 오토바이 걸리다 만 시동같이
돌 지난 손주를 닮다, 자박자박 걷다 넘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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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홍준경
이웃 마을 시인 도반
그녀 손녀가
5학년인데
학년 초 반장 선거에
이리 말해
당선했단다
잡초를
뽑아주세요
저는 본디
잡초입니다
*********
폭설/ 박화남
높이를 욕망하는
당신의 날개입니까
털어내고 깎아낸
당신의 껍질입니까
어느 곳 숨을 데 없어
온몸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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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처럼/ 서연정
잎을 주고 꽃 주고 열매를 주시더니
해빙기 비탈길에 뿌리 계단 놓는 나무
태 나는 영광도 없이 당신 전부를 바치네
***********
망설이는 날들의 기록/ 염창권
골목을 돌아들면 현관의 개 짖어댄다,
낯을 가린 수신처에 그 내부가 또 들어선다,
불 꺼진 집 앞에 서 있다,
- 이 생각만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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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임(mime)/ 이남순
마흔 된 아들과
밥상에 마주 앉아
젓가락도 짝 있다며 힐끗 들어 보였더니
제 생은
숟가락이란 듯
씩, 웃으며 높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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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김숙희
누구나 가슴 안에 하나씩 품고 산다
저마다의 분량만큼 한 생을 지켜내는
날아든
부고를 안고
셈해 보는 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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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댕강/ 서성자
망설이다 깔깔 웃었다
걱정 말자고 했다
자주 비가 내렸다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너 없는 여러 날처럼
하얗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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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이미숙
온 땅에 생살 돋는 봄날의 수화다
제 가진 전신으로 평원을 울리고
내 마음 한복판으로 어지러이 다가왔다
**********
<여름호>
가장 낮은 곳은 나의 스승/ 김효신
이슬 같은 소리들이 땅 위에 떨어졌다
허공을 오르다 감나무 키를 못 넘고
떨어진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또 운다.
그침 없는 울림들은 대지를 식히고
뜨거워진 눈물은 나이테를 새긴다
나에게 수만의 언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순간순간 그 울림은 항상 그 자리
깨어있어 들으라는 경책의 화두인가
내 안의 가장 낮은 곳 스승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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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의 시간/ 홍사성
갑남은 오래전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단다
을녀는 할 일 많아 나눠줄 시간 없단다
십 리 길 올 사람 없어 혼자 받은 점심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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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어머니 얼굴/ 황치복
상처로 얼룩이 진 빗살무늬 나이테
파도처럼 왔다 가며 마음에 남긴 상흔
한편생
망설임과 떨림
겹주름살 새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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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
연적/ 조경선
들어오는 길 있으면
나오는 길 있습니다
작지만 그 안에 큰 뜻을 채워 넣고
내 곁을 지키고 앉아 열리고 닫힙니다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천년을 걸어온 말
물방울로 읽어내도
그솟을 알 수 없어 몇 번을 기울이면서
제 속을 비워냅니다 하루 받쳐 공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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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들녘/ 서숙희
구름과 바람이 국지성으로 잦았다
가볍고 사소한 이름이 되고 싶었으나
한 계절 발 없는 편견이 내게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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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혹은 설법/ 양상보
봉정암 해거름에
받아든 저녁 공양
대접 속 미역국밥
무김치도 서너 쪽
숟가락 툭, 걸쳐있다
모셔 먹는 눈맛 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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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유헌
본 적 없는 내 등 같은
등의 낯선 속을 보네
등에 갇혀 서운하든
등에 잡혀 다행이든
등외로 등 안에 들어
울고 웃는 비주류들
********
슈퍼 마리오/ 김남규
공주님 조금만 버텨요
깃발까지 많이 남았지만
쉴 새 없이 앞만 향해
세상 모든 것 밟고 밟아요
모험은
끝나지 않겠지만요
순진하게
jump, jump
*
벽 앞에서 고민합니다
여기는 어떻게 깰까요
무모해서 행복한 날들
부지런히 날고 뛸 겁니다
오늘은
신발 끈이 씩씩하니
생각 하나
입에 물고!
*********
벽파항의 봄/ 김영란
죽어도 죽지 않는
이름을 불러본다
백의종군 그대가
살기 위해 뛰어든
검푸른 침묵의 바다
칼자루를 품는다
벼랑 끝 목숨들이
불안에 떨 때마다
진도사람 진한 연대
핏빛으로 일어선 곳
끝내는 모두 죽어서
영원히 살고 있는
*********
사월을 잔인하게 하는 시/ 노창수
저무는 산행길에 꽃시장 문 닫는다
홍매화 지시 따른 처형장의 목련들
비비추 옥문을 열자 회초리질 또 몰린다
보듬다 안겨들며 내몰리다 내 몰라서
한 움씩 싹을 돋궈 울 밖으로 도망할 때
고드름 붉게 물든 뺨 넝쿨 시를 떼어 낸다
얼음꽃을 읽겠다 굴뚝새들 시집 편 날
오므린 개나리를 호리병에 가둔 서재에
진달래 땡땡 시편을 그 날칼로 썰어낸다
******
지워진 도로/ 박희정
닿아서 좋은 것과 닿을수록 힘든 것이
실선을 넘나들어 느닷없이 끼어들 때
도심은 난장의 현장,
표정이 지워졌다
아찔한 접촉 후에 소통이 사라지고
원치 않던 도로가 거꾸로 솟아날 때
길 위에 쏟아진 차들은
핸들을 또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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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고정선
발묵의 깊이로
산의 뼈가 솟아나고
더하고 덜한 붓질로
산의 숨이 가쁘고
산허리 안개구름은
굽은 길을 놓치네
*****
친구/ 김승재
벼랑에
뿌리 잡혀 죽지 못한 노송 있다
뿌리에
잡힌 벼랑 무너질 길이 없고
비비새
떠나지 못해
집 한 채 지어 사는
*********
가시/ 최재남
언제나 네가 나를
찌르는 줄 알았다
삭히지 못한 소문
돋아난 혓바늘로
조각난 하루를 꿰어
바람벽도 뚫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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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들/ 고경자
가야 할 곳 가지 못하는
발걸음들 모여 있다
아침이면 정신없이 떠도는 별처럼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일어서는 청춘 둘
목에 걸린 지난 말들 옷 속에 들어가서
옆구리쯤 걸렸나 바지가 꽉 끼었다
헛배만 부르다 보니
돌아서면 배고프다
세워놔도 자꾸만 쓰러지는 일상이라
빈칸인 달력에는 자잘한 부연설명에
신발들, 꿈꾸지 못하는 낮달처럼 새하얗다
********
물결은 마지선을 지킨다/ 곽호연
비 온 뒤 노란 장화 수로 따라 걷는다
퐁랑퐁랑 물결이 뒷굽 따라 쫑알거려
마음속 경계 무너져
비밀의 봇물 터져
화들짝 청개구리는 눈 가리고 도망간다
슬금슬금 지렁이 귀를 막고 따라간다
아무도 못 봤을 거야
들리지 않았을 거야
**********
숨바꼭질- 삼대(三代)/ 김상규
우산을 펼칩니다, 방패가 되겠습니다
매일 밤 접다 보면 투창도 되겠지요
영국식 구빈원에선 나이프도 제격입니다
저도 펼쳐봅니다, 아버지가 나옵니다
왜 그리 답답한 곳에 쪼그리고 계셨어요?
날 닮은 사내아이가 신발 끈을 묶는 꿈
**********
양파/ 류미야
잦은 생의 굴곡에 내막이 많아졌다
아리게 울다 보면
뭉개진 가슴에도
심지는 서슬 퍼렇게
날개로 돋아났다
*********
통장/ 민병도
목 빠지게 기다려도
손님은 고작 한둘,
내가 가진 통장은
짝사랑의 환승역이다
그나마 눈 마주치자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
그 별/ 박시교
별이
하늘에만 떠 있지 않다는 것을
별이
저 혼자서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네
********
등 뒤에서 부른 이름/ 유재영
가을! 하고 부르면 먼 이별 생각난다
깃털 하나 떨구고 간 고요한 여운처럼
그날은 오동잎 지는 열사흘 밤이었다
완행열차 기적처럼 천천히 다가가서
해마다 만났지만 언제나 낯선 가을
그래도 잘 여문 추억, 풀씨 같은 너였다
이제는 만나지 말자 혼자서 다짐하며
갈겨쓴 마음 몇 줄 쥐여주고 뛰어오던
그렇게 보내준 가을, 엽서만 한 너였다
********
민, 박/ 이교상
그동안 감감했던
몸이 문득 떠올린, 밤
해안선 안 보이게
파도 더욱 거세진, 밤
없는 듯 돌아누운 채
빗소리에 멍든, 밤
*********
<겨울호>
천적/ 권영오
돈 빌려달라기에 다단계 하자고 했더니
그때부터 일체 연락이 오지 않는다
다단계 한번 하자길래 돈 얘기 했더니, 고요하구나
*******
꽃/ 이우걸
아이는 뜰에 핀 꽃 한 송일 가리키지만 그 손끝은 어느덧 하늘에
닿아있다
푸르고 곱고 맑아라 아 티 없는 희망이여
**********
봄비/ 이은봉
한바탕 봄비 내리자
논배미의 어린 모들
얼굴 들어
활짝 웃네.
온 세상이
밝아오네.
초록빛 더욱 빛내며
통통통, 알이 차네.
*****
프로필사진/ 김영주
시 잡지를 펼쳐보며 쓸쓸하게 웃는다
시인의 시 말미엔 그의 사진도 웃고 있다
그 생애 가장 당당한 젊은 날의 꽃미소
시인이란 이름으로 누린 것이 있다면
늙지 않는 사진으로 기억을 더듬는 일
아닌 듯 닮은 얼굴로 마법을 보이는 일
가을호 문학지가 줄줄이 도착했다
엊그제 삶을 등진 아직도 환한 얼굴
정지한 시간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다
***
새로 온 가을/ 김일연
무더위 겨우 가고
이제
가을의 길목
끝과
시작 사이
그 어름 어디에서
우거진 숲을 헤치고
오솔길을
찾다
******
해맞이/ 양점숙
메마른 입술에서 핏물이 번져 갈 때
굽은 등 훌쩍 펴고 바다로 오시구려
오늘은 바람의 뜻대로 언 몸을 맡깁시다
갯내 둥지에 걸린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허기보다 짓무른 언 마음을 달래다
연약한 존재의 부침 이 아침엔 잊읍시다
*******
봄꽃은/ 윤정란
황폐한 산과 들에 꽃들이 야단이다
해고당한 개나리 갈 데 없는 제비꽃
진달래 불을 지펴서 가슴 안을 데운다
민들레 꽃밥 지어 아침상 차려놓고
갈수록 빚만 느는 사람들을 다둑이며
괜찮아 좋아질 거야 우린 살아 있잖아
수많은 봄꽃들이 순서 없이 뛰쳐나와
힘없어 버림받고 짓밟힌 이들 위해
날 세운 바람 앞에서 보초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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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능이 이·표고 삼·송이/ 조성문
못되그나 말그나 잉
느자구도 싸가지없이
워따메 어째야쓰까 긍께 독이 씨어부럿당께
잘난 척 때깔 내는 눔 허벌난 시상이랑께
못나그나 짜잔하그나
하찮그나 보잘것없그나
이나저나 인자본게 풀갓 재미 솔찬하당께
비 긋고 뭣이 중한디 속 깨깟하믄 젤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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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홍오선
막둥이 손 놓치고
가뭇한 지난 생애
창새기 녹아내린
어미 곁 지키느라
하늘가 낮달로 떠서
물끄러미 웃어주는
*********
카페 게시글
문학지 속의 한 편
표지 좋은시조/ 봄부터 겨울까지/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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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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