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동서철학회 논문집
{동서철학연구} 제30호(2003년 12월 31일 방행)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반성 / 정승석(동국대)
[한글 요약]
불교에서는 업이 존재하는 한, 윤회는 단절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DNA는 업에 상당하고, DNA 복제는 윤회에 상당한다. 그러나 업을 유전자와 동일시한다면, 인위적 조작이 없이 유전자의 자율적인 복제에 의해 생명체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윤회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 복제와 윤회와 상응한다는 것이, 양자의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種)의 개량에서 출발한 생명공학은 더 나아가 정신적 신체적 양면에서 인간의 개량을 추구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대한의 수명 연장을 목표로 하면서, 복제의 방식으로 영생을 추구한다.
이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강한 자기 집착으로 윤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결국 정신보다는 육체적 진화를 최고 가치로 삼는 데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불교는 생존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정신적 진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윤회, 즉 생명의 상속은 그 정신적 진화를 완성하는 도정으로서만 의의를 지닐 수 있을 뿐, 생명체가 벗어나야 할 존재의 양태이다. 불교는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공존 공생하는 사고 및 행동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 방식이 곧 업의 인과율, 특히 공업에 대한 인식이며, 생명 복제에 대처할 수 있는 윤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생명은 업이라는 자기 생성, 자기 보존, 자기 변신, 자기 완성의 힘을 지닌다. 인간에게 업은 곧 생활이다. 따라서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길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당장의 자기 생활을 돌보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하게 안락을 보장할 수 있다. 자업자득의 법칙을 보장하고, 특히 공업이라는 공동 책임과 공생을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일 때, 생명공학은 인간의 자기 완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기 완성은 절제된 욕구에서 타인, 사회, 환경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안락을 실현하는 것이다.
주제어: 인간 복제, 윤회, 업, 공업(共業), 자유 의지
[머리말]
종교적 시각에서 이 같은 주제를 취급할 때는 자칫하면 과학의 가치를 호도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이 점에 유의하더라도 과학의 문제를 종교의 시각에서 반성하는 데는 종교적 감성이 앞서기 마련이라는 취약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세계 전체의 보편적 질서가 인간 사회의 질서에 선행하고, 이성적인 접근이 감성적인 접근에 선행한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으로 그 취약점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 복제의 문제를 일반 정서에 호소하여 대처하려는 것은 거시적인 안목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불교의 관점에서도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불교 학자가 주장하듯이 "우리의 결론은 생명 복제의 비윤리성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실효를 기대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처 방안이다. 비윤리성에 대한 공감대로 말하자면 전쟁만한 것이 없지만, 그간의 전쟁이 비윤리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지 않은 탓으로 발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성역화해 둔 시각에서 생명 복제를 바라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불교적으로 접근한다면서 생명을 성역화하는 것은, 우주와 인간의 운행 법칙을 표방하는 연기법이 그 내속인 생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생명이 오직 신이나 부처의 고유 영역이라는 종교적 정서가 배어 있다. 그러나 종교적 정서가 곧 불교의 진리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 의하면, 생명은 신이 조작한 것도 아니고 부처가 조작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생명의 성역화는 불교의 진리관에 위배된다. 적어도 위와 같은 입장에서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척할 수 없는 해결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생명 공학의 기조
생명 복제의 절정인 인간 복제가 시도되고 실현되리라는 점은, 1997년 2월에 복제 양 돌리의 탄생이 발표된 이래 일찍이 예측되었다. 이로부터 4년 후 2001년 1월 30일 BBC 방송은, 세계 최초의 인간 복제 계획을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와 미국의 공동 연구진이 앞으로 12∼24개월 내에 복제 아기를 탄생시킬 예정이라면서, 동물 복제에 사용된 것과 비슷한 기술이 이용된다고 보도했다.
이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2년 12월 26일, 미국의 생명 공학 회사인 클로네이드 사는 인간 복제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더니, 2003년 3월 이후 미국과 네덜란드와 일본에서 연이어 세 명의 복제 아이가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클로네이드 사가 발표한 내용의 사실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술적 측면의 가능성만을 고려하면, 인간 복제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 복제까지 시도하게 된 생명 공학의 기술이 그 용도에 따라 인류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진즉부터 지적되어 왔다.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아시로마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는 과학자들이 유전자 조작 실험을 자발적으로 동결하자는 안건에 대한 격렬한 찬반 토의가 벌어졌다. 이 같은 배경에서 생명 공학의 사회 윤리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복제 양 돌리의 탄생 이후 인간 복제가 시도되어 왔듯이, 생명 공학이 초래할 재앙을 아직 보편적이고 심각한 것으로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제공할 축복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는 어렵다. 그 같은 축복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은 과학 기술의 고유한 기능이기도 하다. 생명 공학이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축복의 예를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들 수 있다.
즉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생명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진보라는 측면 이외에도, 인간의 영생과 부활의 가능성, 불치의 유전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 유전자 검식을 통한 수사를 비롯하여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숙원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생명 복제의 유용성을 기대하기보다는 그 위험성을 경계하는 쪽으로 현저하게 기울어져 있는 현실의 여론이 과연 영생의 가능성과 같은 생명 공학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을까? 생명 복제 기술의 오용이나 남용을 우려하는 현재의 여론이 생명 공학 연구의 자유를 법적 장치로 어느 정도 제한하게 할 것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로 인해 생명 복제가 완전히 차단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생명 복제는 '겹겹이 둘러싼 철조망 속의 보물 창고'로서, 그 속에는 인류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메뉴가 놓여 있으며, 어느 나라의 어떤 과학자가 해결의 열쇠를 취득하느냐에 따라 그 국가의 위상은 수직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 또는 인간의 속성으로 보건대, 모든 국가나 과학자가 생명 공학의 이러한 매력과 유혹을 철저히 외면할 수 있을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이미 미국,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는 생명 복제 기술에 대한 지침과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도 생명 윤리 관련 법안의 입법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의 기조는 인간 복제는 금지하되, 배아 복제와 같은 생명 공학의 유용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배아 복제도 생명 복제의 범주에 속하며, 생명 복제의 귀착점은 인간 복제일 수밖에 없다. 종교나 철학의 시각에서 보면, 법적 규제는 인간의 희구까지 근절하지는 못한다. 그 희구가 영생이나 부활과 같은 생존욕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법적 규제의 효력은 더욱 미약할 수 있다.
"인간 유전자의 호기심이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단언한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시간 문제일 뿐, 유전자 조작을 비롯한 인간 복제 전반에 관한 실험이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인위적으로 규제한다고 영원히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 복제의 매력과 유혹은 반드시 과학자가 조장한 것만은 아니다. 생명 복제의 기술은 과학자가 발견하고 개발한 것일지라도, 그 기술을 추구하고 활용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편리와 안녕을 추구하고 건강과 장수를 바라며, 궁극적으로는 무병불사를 염원한다. 과학 기술은 이러한 보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생명 복제와 같은 생명 공학의 발전이 보편적 욕구 충족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명분이 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인간이 스스로 형성해 온 인간 중심적 관념이다. 생명 복제도 자연 질서를 훼손하는 일종의 환경 파괴이다. 그리고 환경 파괴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우월성으로 적용됨으로써 초래된 양상이다. 더욱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인간의 실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 아울러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도구화하고 자연의 질서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데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찾을 경우, 인간의 존엄성과 환경 파괴가 양립해 온 것처럼, 바로 그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내세워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파괴하게 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인간도 도구화와 군림의 대상인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 복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과학 또는 과학자를 규제하는 일이 시급하기는 할지언정,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처방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반성하여 재인식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과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사고와 행동의 기조로 삼아야 할 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기조는 불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일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생명 복제의 문제를 불교사상으로 반성해 보는 것은, 생명 공학의 시대에 요구되는 윤리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인간의 생존과 윤리를 자연 그대로의 우주 질서와 융화시키고자 하는 불교 사상으로 생명 복제를 반성하는 것은 인류 공존의 윤리를 찾는 작업이다.
2. 불교적 반성의 기조
인간의 보편적 욕구 중에서 궁극의 지향점은 영생이다. 자연의 이치로는 영생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일찍이 영생의 길이 종교에 있다고 믿고 이것에 의지하려 했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영생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자연에서 끊임없이 장수의 비결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인간의 수명은 크게 연장되었다. 그리고 지금 생명 공학은 수명을 대폭 확장할 뿐만 아니라 수명의 한계마저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을 추구하고 있다.
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생명 공학은 영생을 추구하는 인류의 염원을 대변한다. 현재까지의 기술로는 생명 공학의 정점에서 시도되는 것이 인간 복제이다. 그러나 인간 복제가 실현되는 것으로 인간 생존의 온갖 문제도 더불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매우 회의적이다. 인간 복제를 포함한 생명 공학의 기술은 인류를 영생으로 이끄는 구원의 빛이기보다는, 그것이 생태계를 교란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재앙의 징조일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욱 크다. 생명 복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특히 인간 복제로 집중된다.
이로 인해 인간 복제는 외면상 금지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그 귀추를 속단할 수는 없다. 인간 복제의 기술은 구원과 재앙이라는 양극적 가능성을 내포하며,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는 인간 복제에 대한 기대와 우려라는 양극적 정서가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 종류와 성격을 불문하고 생명 복제를 원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생명 공학은 그 양극성의 갈등에서도 인간 복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생명 복제 자체를 원천적으로 폐기하거나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희미한 전망일지라도 거기에 인류 구원의 빛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끊임없이 생명 조작이나 인간 복제를 시도하게 할 것이다. 생명 공학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괴물이나 악마로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탐욕으로 부르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욕구든 노력이든 이것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에 속한다. 생명 공학은 업의 산물이다. 이 업이 선업이 될지 악업이 될지 하는 것은 업의 주체인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이 의지 역시 업에 속한다. 이에 의하면 생명 복제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양산하는 업을 고려하고 업을 바르게 적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 해결의 기본 원칙이다.
혹자가 지적했듯이 생명과학자들에게 합당한 윤리 규범이 필요하다면, 이에 앞서 생명 공학의 윤리성을 먼저 재고할 필요가 있으며, 이 재고에 적합한 것은 불교적 사고의 틀, 그 중에서도 특히 업의 관념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반성의 기조가 된다.
인간 세계든 자연 세계든 불변의 것이 없다는 무상성은 엄연한 사실로서 적용된다. 경험 세계의 범위에서 불변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상성이라는 사실뿐이다. 인간의 고통은 이 무상성을 체험하고 인식하는 데서 발생한다는 것이 '제행무상'과 '일체행고'라는 불교적 사고의 시발점이다.
과학이 문명의 이기로 간주되는 것은, 과학 기술의 활용으로 인간의 고통은 그만큼 해소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해소란 물질적 충족도나 물량적 기준에 따른 것이지, 인간이 저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질에 따른 것은 아니다. 어쨌든 외형상으로 체력 향상, 질병 퇴치, 수명 연장 등은 고통 해소의 대표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이와 동시에 과학 기술에 의한 고통 해소법은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와 같은 반대 급부의 고통도 양산해 왔다. 고통의 해소든 양산이든 이것들이 인간 스스로 지어 낸 업의 소산인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점에서 과학 기술이 '일체행고'라는 보편적 사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한다.
생명 복제가 야기할 온갖 문제들에 대한 많은 논의는 차치하고 일체행고와 관련지어 말한다면, 인간의 고통이 생명 복제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생명 복제로 인해 전과는 다른 양상의 고통이 야기될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미 실현된 동물 복제에서 조기 노화와 생명 단축과 생물학적 기형이나 결함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였음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설혹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무상성의 적용을 받는 한, 무상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 기술이 본의 아니게 양산한 고통의 양상은 환경의 훼손과 오염, 생태계의 교란, 괴질의 발생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것들을 우리는 환경 파괴로 총칭한다. 이 같은 환경 파괴는 그간의 과학 기술이 주도한 인류의 업이다. 이 업의 과보가 인류와 지구에 전체적으로 미치고 있으므로, 인류는 이 과보를 극복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이런 터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명 질서를 변조하는 생명 공학의 기술은, 인간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변종의 업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생명 복제는 그다지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다. 윤회와 업의 관계는 생명 복제와 유전자의 관계와 같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과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윤회는 DNA 즉 유전자의 상속으로 이해된다.
※ 그러나 생명이 한계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이다. 생명체는 어김없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의 형질들은 유전자를 통해 길이 자손 대대로 전달될 수 있다. ... 개체의 관점에서 본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위와 같은 견해를 제시한 과학자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라고 첨언한다. 불교에서는 업이 존재하는 한, 윤회는 단절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DNA는 업에 상당하고, DNA 복제는 윤회에 상당한다. 이에 따라 유전자인 DNA를 복제하는 생명 복제는 업의 상속으로 초래되는 윤회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생명 복제의 원리를 불교 사상으로 이해하는 데 일조할 뿐, 불교 사상으로 생명 복제를 포용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 업을 유전자와 동일시한다면, 인위적 조작이 없이 유전자의 자율적인 복제에 의해 생명체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윤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생명 공학에서는 유전자의 복제를 인위적으로 조작한다. 이 경우에는 유전자의 타율적 복제가 생명 복제이다. 윤회와 생명 복제의 현격한 차이는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 인정하는 윤회는 업의 복제가 아니라 업의 상속으로 성립된다. 업의 상속이란 업의 자연발생적 전개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생명 복제는 업의 타율적 전개, 즉 유전자의 인위적 조작에 의해 성립된다. 업은 인간의 의지, 의식, 언어, 행위를 총칭하는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활동이다. 이러한 업이 타력에 의해 조작되고, 전개되고, 성숙할 수 있다면, 업의 주체인 인간에게는 자기 존재의 모든 의미와 가치와 의무와 책임 등이 배제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나 기준이 유지될 수 없다.
업은 자율적 자기 복제의 기능으로 작용하며, 이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체의 전환이 윤회이다. 이에 대해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명 복제는 업의 타율적 복제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가 정작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유전자 복제로서의 생명 복제라기보다는 유전자 조작으로서의 생명 복제이다. 인간 복제가 금지될 경우라도 유전자 조작에 의한 대리 충족의 욕구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편승하여 기승을 부릴 것이다. 생명 복제는 불확실한 축복과 예기되는 재앙이 교차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에 대해 윤회의 관념은 그러한 위험성의 부담이 전혀 없이 생명 복제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 대안이란 유전자에 상당하는 업을 인간과 자연의 세계에서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생명 복제의 불교적 의미를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3. 생명 복제와 윤회
생명 복제를 바라보는 일부 불교 학자들의 시각은 "생명 공학과 불교"라는 주제의 논의에 반영된 바 있다. 이 논의에서는 생명 복제를 윤회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시각과, 생명 복제로 인해 불교의 윤회설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시각이 부각된다. 양쪽의 시각은 생명 현상을 윤회설로 이해할 수 있다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중에서 윤회설이 생명 공학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시각은 불교도의 일반적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윤회에 관한 불교도의 일반적 정서가 반드시 불교의 원론적 입장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견해가 불교의 원론적 입장을 대변한다.
사실 불교의 윤회설은 윤회를 지향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윤회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불교에서 윤회는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파기의 대상이다. 그러나 윤회는 생존의 현실이므로, 고통이 상존하는 이 현실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려는 데서 윤회설이 성립한다. 이에 따라 윤회설은 현실과 이상, 가설(假設)과 진실이라는 양면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상과 진실은 항상 현실과 가설의 목표가 된다. 인간은 현실에서 가설적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한 데서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고 윤회를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설적 존재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설정된 무상한 존재를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윤회설은 인간의 생존이 가설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각성시키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존이 가설적인 것임을 자각할 때,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므로 윤회로부터도 벗어난다. 이러한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윤회의 양태, 즉 생존의 양태가 아니라, '업'이라고 불리는 삶의 방식이다.
이 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타당하다.
"모든 생명(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는 생명체가 소유한 육체나 영혼 또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 업이란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 가면서 자기의 미래를 주도하는 행위와 의식이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운 인격을 형성하는 것도 업이며, 가설적 존재인 현실에 집착하여 생명의 지속 또는 더 나은 윤회를 추구하는 욕구도 업이다. 불교에서 생각하는 업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그 역할에서는 생존 양태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중시되므로 유전자로 비유되기도 한다.
인도에서 통용되었던 일반의 윤회설과는 달리, 불교의 윤회설은 영혼이라는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업에 의해서만 재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독특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체세포 복제와 같은 생명 공학의 신기술이 불교의 관점에서는 새로울 것도 획기적일 것도 없다. 그것은 단지 불교에서 통용되는 윤회 관념을 과학의 이름으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일 뿐이다. 생명 복제는 과학이 종교적 상정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윤회 관념을 인위적으로 실용화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반의 윤회설에서는 영혼이라는 실체를 윤회의 주체로 상정하여, 이 영혼이 인간을 재생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불교의 윤회설에서는 그 같은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설에 입각하여, 영혼이 없이 업에 의해서만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인간이라는 실체가 근본적으로 무상한 가변적인 존재라고 파악한 데서 성립된다. 여기서 일반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을 각각 유아(有我) 윤회와 무아 윤회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윤회의 관념을 생명 공학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무아 윤회는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 복제에 상응한다. 이에 대해 유아 윤회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기존의 동물 복제에 상응한다. 영혼이라는 생식 세포에 의해서만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업이라는 체세포 DNA에 의해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아 윤회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아 윤회와 무아 윤회를 불문하고 윤회를 성립시키는 것은 업이다.
그러므로 생명 공학에 의해 윤회설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는 것은, 사실상 업의 이론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 같은 우려의 단적인 예를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유전자(DNA) 조작으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때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될 것은 업 이론일 것이다. 업의 원리는 행한 대로 그 결과를 받는다는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업 이론에 따르면 얼굴이 못생기고 목소리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전생에 '욕설'을 많이 한 결과다. 이제 욕설을 많이 한 사람도 유전자 조작에 의해 다음 생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과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쁜 업을 많이 지으면 축생의 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우려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역시 축생이 될 수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버리고 우수한 인간으로 태어날 유전자를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콩 심은 데 콩이 아니라 팥이 날 수도 있게 되고 말았다. 업은 타력이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타자의 뜻에 의해 사전에 계획되고 수정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업 이론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윤회설은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며 불교의 윤리 문제는 그
위와 같은 우려를 많은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공감은 불교 특유의 윤회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윤회설의 통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반 윤회설의 통념은 영혼이라는 불멸의 실체가 윤회를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업은 자기 정체성의 결정인 불멸의 영혼을 규제하고, 영혼은 그 업의 형성력에 따라 또 다른 자기를 구현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자기 정체성의 결정체를 전제로 하는 윤회관은 업의 다면적 영향력을 무시하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업의 일방적 영향력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숙명론 또는 결정론으로 귀결된다. 이 윤회관에서 영혼은 생식 세포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생식 세포가 아닌 체세포에 의해서도 복제가 가능할 경우에, 영혼을 전제로 하는 윤회관은 당위성을 상실한다. 불교에서는 일방적 영향력만을 인정하는 업을 불공업(不共業), 다면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업을 공업(共業)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불공업은 업의 과보가 업의 작자에게만 초래되는 업이다. 일반 윤회설의 근본 전제인 자업자득의 인과를 성립시키는 것이 불공업이다. 이에 반해 공업은 사회 공동의 연대 책임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내에서는 자기 업의 과보를 자신만이 아니라 연대 사회가 받으며, 마찬가지로 그 사회내의 타인이 행한 선악의 과보를 자신도 공유한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이 공업이다. 공업은 불공업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처방을 제시하는 업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불공업을 전제로 하는 윤회관은 불교에서 인간 생존의 가변성을 각성시키는 과정으로서 수용될 수는 있지만, 불교의 원론적이고 궁극적인 입장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생명 복제를 윤회설과 대비한다면, 앞에서 본 우려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견해가 불교의 원론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행위에는 신체적, 언어적, 의지적인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의지적인 행위 즉 심리적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 심리적인 행위가 중요하다는 말은 인간의 윤회가 심리적인 행위 즉 의지적인 요인에 의해서 가장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적인 행위는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 요소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 복제가 일란성 쌍생아를 낳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 복제 그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간 복제 그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라는 표현이 불교도에게는 거부감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표현의 본의를 다음과 같은 과학자의 견해에서 읽을 수 있다. 복제 인간은 출산 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동이에 불과하다. ... 몇 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동이 형제들도 결코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늦동이 쌍동이 동생이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인간이 될 리는 절대 없다. 유전자는 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생명 공학에 의해 윤회설이 설 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해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생명 공학의 기술을 극대화한 가상일 뿐, 구체화될 수 있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축생이 될 수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버리고 우수한 인간으로 태어날 유전자를 넣는다고 해서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 끝까지 우수한 인간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복제 인간이 태어났을 경우, 원래의 인간과 복제 인간 간의 사고와 행동이 동일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과학자의 견해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 유전자 프로젝트의 결과로 미래에 발생할 질병을 예언할 수 있다는 장담은 사실상 실현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DNA 정보가 장차 어느 날 어떤 형질이 발현될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양 상태 등 주위의 환경에 따라 빨라질 수도 있고 늦게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점쟁이식의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인간도 성장 과정에서 타고난 형질의 발현에 영향을 주는 변수에 노출된다. 이 변수에 의해 그 인간은 조작자의 의도 또는 원본 인간과는 일치하지 않는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교의 업 개념은 여기서 말하는 변수의 의미까지 함축한다. 이러한 변수를 고려한 업 개념이 공업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앞서 말한 우려의 또 다른 오해를 지적할 수 있다. 불교의 업은 콩 심은 데 반드시 콩만 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업은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필연성과 콩 심은 데 팥이 날 수도 있는 가변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또 각 개인의 업은 기본적으로 그 결과를 행위자 자신에게 초래하는 힘으로서 작용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대상에게도 영향을 주는 여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다른 힘의 보조를 받으며 작용한다. 따라서 개인의 업은 타인이 아닌 자기에게 결과를 초래하는 자업자득의 불공업인 동시에, 타인의 업과 협력하고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공업이다.
불교의 업 이론은 필연성보다는 가변성을, 불공업보다는 공업을 주목한 데서 생명 복제에 대처하는 윤리 의식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자기 변화, 개체와 사회 또는 환경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과학 문명의 사회에서는 더욱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업과 윤회의 관념으로 생명 복제를 대면하면, 전자는 후자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후자에게 일종의 훈시와 지침이 된다. 그리고 그 훈시와 지침의 요점은, 인간의 이상은 결코 복제로써 실현될 수는 없으며, 원본 인간이든 복제 인간이든 각자의 자유 의지라는 업에 의해 그 이상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생명 복제에 대처하는 윤리
생명 공학이 예견하는 인간 복제를 비판하는 종교인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인간에 대한 고정 관념의 붕괴에 뒤따를 혼돈을 우려하는 듯하다.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제로 만들어진 인간도 진짜 인간의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체세포를 빌려 준 인간과 새로 태어난 인간의 관계도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식과 유전자가 똑같은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 과연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인을 했을 경우 죽은 사람의 피 한 톨만을 가지고도 그 사람을 똑같이 만들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교의 윤회설에 의하면, 현재의 나는 전생의 어떤 인간이 다시 태어난 것일 수도 있고, 현재의 나는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윤회설을 적용해 보면, 위의 의문은 현재의 나 또는 내생의 나도 인간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윤회설에서는 복제 인간에 상당하는 재생 인간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의문시하지 않는다. 윤회설에 입각하면, 원래의 인간에게나 복제된 인간에게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인간의 업일 뿐이다. 그리고 이 업의 요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력 또는 자유 의지이다. 생명 복제를 우려하는 것도 일차적으로는 복제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인간 자체의 업을 우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복제된 생명(특히 인간)의 업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이 필요한 대상도 바로 그 업이다.
생명 복제를 우려하는 시각은 일반적으로 복제의 결과적 양태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불교적 반성의 시각에서는 그 결과적 양태보다도 복제를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과 욕구를 더 주목한다. 이 속성과 욕구는 모두 업에 귀속되며, 업은 의지로써 형성되고 의지로써 발현된다. 인간과 세계는 이러한 업의 의해 형성되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생명 복제의 기술도 업에 속한다. 생명 복제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업이 초래한 결과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생명 복제라는 과학 기술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윤리를 업의 법칙에서 찾을 수 있다.
업이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의식이고, 이 의식을 발동시키는 의지이며, 그 결과를 자신에게 미치게 하는 자율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은 자기 이외의 존재와도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의 미래를 형성해 나간다. 이것이 업의 법칙이며, 인간과 세계가 공존해 가는 자율적 질서이다. 이 자율적 질서가 인간의 생존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양상, 즉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보편적 인과율로 파악될 때, 불교에서는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표현한다.
생명 복제가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업의 여세는 환경 세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화엄경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지적하여 "모든 세계는 업력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화엄경의 이 같은 인식을 반영하면, 세계는 그대로 각 개인의 업을 원동력 또는 추진력으로 삼아 성립해 있다고 이해된다. 이로부터 "나의 업에 의해 나의 세계가 성립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세계와 상관하여 작용하는 업을 지목한 것이 공업이다. 공업은 개인의 업들이 환경 세계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주목한 업 개념이다. "환경을 포함한 이 세계는 업이라는 거대한 축에 의해 회전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공업의 작용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업은 불공업에 대응하는 업이기는 하지만, 양자는 반대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행위자에게 각기 작용하는 불공업도 공업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뢰할 수 있는 가르침에 의하면, 공업과 불공업이 있다. 공업이란 무엇인가? 온갖 환경 세계의 다양한 차별상을 일으키는 것이 공업이다. 불공업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중생에게 다양한 차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업, 혹은 중생들의 지속적 변화에 영향을 주는 업이다. 이 업력으로 중생들은 다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보조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설명된다. 이와 같이 서로 작용하는 증상력(영향을 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공업으로 불린다.
이 같은 설명이 지적하는 것은, 개인의 업은 불공업이면서도 중생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공업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업은 공업의 범주내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상호 협력하여 작용한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현대 사회와 같은 과학 문명 시대에 더욱 실감으로 와 닿는다. 세계를 회전시키는 거대한 축이 업이라면, 이 업은 특히 공업으로 작용하는 업이며, 인간과 세계가 상호 의존하며 존속해 가는 질서이다.
이제 우리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준칙을 공업의 관념에서 찾고자 한다면, 일차적으로 반성하고 재고해야 할 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 또는 세계관일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 문제를 탈(脫)인간중심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간중심주의적 해결책의 한계를 역설하면서 새로운 전일적 세계관을 피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된다. 전일적 세계관의 기조는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인간의 형이상학적 특수성의 부정, 총체적 인식론, 발전과 진보 개념의 재검토, 탈자기중심적 가치관, 화해적 태도와 같은 문화로서의 생태학"을 주장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은 인간과 세계가 공존해 가는 자율적 질서인 업의 법칙 중에서도 특히 공업의 관념과 상응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 공학에 의한 생태학적 위기는 업의 자율적 질서를 외면할 때 도래할 수 있다. 업의 본질이 의사(意思)라고 말했듯이, 이 질서의 근원은 인간의 의식에 있다. 그렇다면 의식의 주체인 '나'라는 인간은 업의 주체이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들이 쌓이는 바탕 재료가 '나'의 진정한 뜻이라고 말할 때,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들'이 가리키는 것도 업이다. 그에 의하면, 나의 활동이 초래한 효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 사실에서 "나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사람이다."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같은 인간 이해의 취지는 불교의 관념으로 치환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업에 대해 책임을 지며, 연기법에 따라 업의 본질인 의식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인간이 저마다 임의로 지어 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상응하여 존속한다. 그런데 생명 공학이 인간 복제까지 시도할 경우라도, 이 자유 의지만큼은 복제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복제 인간의 우수한 능력은 그 복제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또 연기적 관계에 있는 환경에 의해 어떻게 발휘될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업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생태계의 교란과 같은 질서의 파괴라는 업보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예측할 수 있다. 제삼자인 조작자가 생존의 양상을 변경할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자유 의지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작되거나 복제된 인간은 원본이 되는 인간의 의지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인간다움의 징표이자 문제 해결의 원천인 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복제 인간의 자유 의지에 기대하는 것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윤회의 악순환을 현실에서 자초하려는 것과 같다.
[맺음말]
생명 공학의 복제 기술에 대해 곧장 반생명적 또는 반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탄생되는 무죄의 생명체를 공범으로 취급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예를 들어 복제 인간을 상정하자면, 그 역시 엄연한 인간이며, 사회는 그 인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어야 할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 불교적 입장이다. 생명 공학의 발달 자체가 공업의 소산이며, 생명 공학이 생명의 인위적 조작이라고 할지라도 그 과정 역시 연기법에 따른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생명 공학이 폐해를 낳는다면, 그 폐해는 업의 인과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은 개인이 짓는 업뿐 아니라 환경이 형성한 업을 함께 받으면서 성숙하고 자기를 완성해 간다. 업의 인과율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이다. 개체의 성숙을 환경적 조건으로부터 인위적으로 차단하여 조작하는 생명 공학은 그 자유 의지를 도외시하고서 생명체를 개량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 개량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결과로 초래할 수 있다. 생명 복제와 윤회와 상응한다는 것이, 양자의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명 공학이 추구하는 바는 불교가 추구하는 바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종(種)의 개량에서 출발한 생명 공학은 더 나아가 정신적 신체적 양면에서 인간의 개량을 추구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대한의 수명 연장을 목표로 하면서, 복제의 방식으로 영생을 추구한다. 이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강한 자기 집착으로 윤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결국 정신보다는 육체적 진화를 최고 가치로 삼는 데로 귀결되기 쉽다. 이에 따라 생명 공학은 애초부터 자업자득의 논리를 거부한다.
그러나 불교는 생존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정신적 진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윤회, 즉 생명의 상속은 그 정신적 진화를 완성하는 도정으로서만 의의를 지닐 수 있을 뿐, 생명체가 벗어나야 할 존재의 양태이다. 물질적 진화는 생명체 존속의 외적 조건인 환경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여, 불교는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공존 공생하는 사고 및 행동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 방식이 곧 업의 인과율, 특히 공업에 대한 인식이며, 생명 복제에 대처할 수 있는 윤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불교에 의하면 생명은 수명이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성립시키는 것은 업이다. 생명은 업이라는 자기 생성, 자기 보존, 자기 변신, 자기 완성의 힘을 지닌다. 업은 생명체의 생존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 업은 곧 생활이다. "생명이란 하나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DNA의 눈으로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영속성(perpetuity)을 지닌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DNA에 상당하는 업을 지닌 생명체는 영속적인 존재인 셈이다. 따라서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길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당장의 자기 생활을 돌보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하게 안락을 보장할 수 있다.
관점을 바꾸어 말하면, 생명 공학은 윤회를 신뢰하지 않는 데서 발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실제의 양상은 생명체가 윤회한다는 사실을 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 공학이 이 점을 부정할지라도 윤회의 원리인 업 이론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발전한다면, 그 결과는 인간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는 데로 나아가면서 결국은 생태계를 파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업자득의 법칙을 보장하고, 특히 공업이라는 공동 책임과 공생을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일 때, 생명 공학은 인간의 자기 완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 완성은 결코 영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절제된 욕구에서 타인, 사회, 환경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안락을 실현하는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생명 복제는 인간이 벗어나야 할 윤회를 양산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 복제가 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식으로든 상속되는 삶이라면, 그러한 삶은 윤회하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이미 보장되어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슈뢰딩거의 고찰이 "그렇지만 인생에는 단절이 없다. 삶 속에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라는 첨언으로 종결되는 것도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명 복제의 기술이 인류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이 영생이라면, 혹시 인류는 이로 인해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당한 것과 고통을 호소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설혹 그런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단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 필멸의 인간은 여전히 불멸의 꿈을 꾼다. 인간 게놈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필멸의 인간은 불멸에 좀더 다가갔다고 하던가. 인간이 불멸의 꿈을 이루게 되는 그 날부터 변신의 꿈을 잃게 될 것이다. 그 불멸의 세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세계에서 변신의 꿈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출처] 생명복제에 대한 불교적 반성 / 정승석(동국대)|작성자 진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