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올문학 윤준경 단평
재돈이 어머니가요
방아달 큰 논배미 모 심으니
밥 먹으러 꼭 오라기에
점심때 맞춰 염치없이 나갔지요
그랬더니 일꾼들하고
일꾼네 아이들하고
저 건너밭에 나온 아낙까지도
어서 와 어서 와 불러다가
모두모두
논두렁 한 마당 밥 먹었지요
먼 산도 하늘도 와 함께
고봉밥 한 그릇 다 먹었지요
들밥 / 고은
고은 시집<내 조국의 별 아래> 미래사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 시의 내용을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 그릇 밥이 그지없이 귀중했던 우리들의 옛 시절이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낮에 모내기 하는데 밥 먹으러 오라고 옆집에 일러주고 나가는 재돈이 어머니의 훈훈한 마음과 염치없지만 나가서 고봉밥 한 그릇을 다 먹고 흐뭇해하는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이야 밥 한 그릇이 뭐 그리 염치없겠는가? 오히려 “누구 밥 못 먹는 사람 있나? 귀찮게 스리.....”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일꾼들은 물론 일꾼들의 아이들과 건너 밭에 일 나온 아낙까지 다 불러 음식을 나누는 재돈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이 가난하지만 인정 많던 우리 농촌의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얼마나 큰 경사였으면 먼 산도 하늘도 함께 와서 고봉밥 한 그릇을 다 먹었을까?
고은 시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로 노벨문학상에도 여러 차례 노미네이트되었지만 한 여성작가의 시를 통해 성적문란 행위가 폭로되어 그간의 쌓은 업적도 아랑곳없이 완전히 문단사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대한민국이 함께 실추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TV 다큐*를 함께 보는 중에 아내가 "늙어 남자 혼자 오래 살면 저리
추해. 내가 당신보다 조금은 더 오래 살아줄 거긴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먼저 죽으면 조금만 더 살다 미련 없이 가"라고 하기에 "고맙기는 한데, 뭐여 와가 아니라 가라고? 어디로?" 서운한 투로 말꼬리를 잡으니 "말이 샌 거 네요 샜어, 근데, 정말 서운하긴 한가 보네" 은근슬쩍 몸 기대며 웃는다. '농담 아니라 정말로 서운합니다. 다음 생은 나랑 살기 싫다 이거지?' 따지려다가' 하기사, 적지 않은 세월 모난 나와 부딪치며 살았는데 어딘가 금이 가 있는 게 당연하지, 깨져 조각나지 않은 게 참 다행이지!' 얼렁뚱땅 나도 얼른 따라 웃어넘겼습니다.
은근슬쩍 얼렁뚱땅 / 신현복
*다큐 ; 다큐멘터리
다시올 문학 48 2021 여름호
부부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二 三십여 년 모르는 사이로 지내다가 어떻게 부부의 연을 이루어 일심동체가 되어 세상을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특히나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부모의 합의만으로 인연을 맺어 백년을 해로하며 분신처럼 아끼고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 어떤 해석도 불가해진다.
대개의 부부싸움이 아주 하찮은 것에서 시작해서 크게 번지기가 십상인데 만약 이 부부가 은근슬쩍 얼렁뚱땅 웃어넘기지 않고
- 뭐? 가라고? 지금 나보고 빨리 죽으라는 거야?
하며 언성을 높였다면
- 말이 샌 거 네요 샜어.
와 같은 나긋나긋한 답으로 은근히 몸을 기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을 주고 받다보면 내심 서운해지는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걸 따지고 캐내서
- 그래, 다음 생은 나랑 살기 싫다 이거지?
하고 따지고 든다면
- 그래, 나도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명품 백 들고 외제 차 끌면서 보란 듯이 한 번 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적지 않은 세월 모난 나와 부딪치며 살았는데 어딘가 금이 가 있는 게 당연하지,'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웃어넘기는 시인의 여유가 지혜롭고 선비답다.
‘얼렁뚱땅’ 이란 말은 결코 긍정적인 생활방식은 아닐지라도 가정을 행복으로 이끄는 비밀은 논리나 수학이 아닌 좀 부족한 듯한 이런 빈틈이 아닐까.
푸른 바다가 보이는 장생포
도깨비 전당포가 있고 착한 사물함이 있다는데
괭이갈매기와 밍크고래가 다녀갔다는데
시험 잘 못 본 성적표와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알람시계와
쉬는 시간마다 못살게 구는 종석이랑
공부 타령 엄마 잔소리를 넣고 싶다
방망이가 있어서 금 나와라, 뚝딱!
돈 나와라 뚝딱! 한다는데
백수 우리 아빠 힘내라, 뚝딱!
학교 숙제 시험 없어져라, 뚝딱!
예쁜 은이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뚝딱!
뚝딱! 뚝딱!
도깨비 감옥 착한 사물함 / 이가을
다시올 문학 48 2021 여름호
도깨비 감옥? 착한 사물함? 제목이 우선 재미있다.
장생포에 있는 도깨비 감옥은 무엇이며 착한 사물함은 또 무엇인가? 아무튼 작가는 이 상상의 이름을 불러내어 어린이들을 괴롭히는 많은 것들을 사물함에 집어넣어 버린다.
시험 못 본 성적표와 아침마다 울리는 알람시계와 짓궂은 친구 종석이와 엄마의 잔소리.... 까지.
그리고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금 나와라 뚝딱 돈 나와라 뚝딱 숙제나 시험 따위 없어져라, 뚝딱! 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든다.
- 예쁜 은이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뚝딱! 할 때는 어린 날의 추억과 함께 미소가 번지고
- 백수 우리 아빠 힘내라 뚝딱! - 에서는 시큰, 가슴이 아려온다.
그땐 그 사람이 남쪽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한 문장이 정남향이었습니다
덕분에 한 시절 잘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봄이 이듬해 봄 만나기를 서른 몇 차례
많은 시대가 한꺼번에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더 오래가 되었고
온다던 미래는 순식간 지나가 버렸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남쪽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느 생에게 정남진일 수 있을까요
그때는 여기저기 남쪽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남쪽을 바라보던
착하되 강하고 예민하되 늠름한 벗들이
도처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랬습니다
남쪽은 저기 여전히 맑고 푸르러 드높은데
이 겨울이 봄 여름 가을을 건너뛰어
다음의 긴 겨울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처럼 처음 같은 마지막처럼
남향南向 / 이문재
시와시학 2021년 봄호 1
남향 - 듣기 만해도 따뜻함이 전해온다.
집을 지을 때의 첫째 조건으로 남향(南向)을 꼽고 집을 살 때에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향(向)이 아닌가?
겨울이 오면 제비들이 날아가서 추위를 이겨내는 곳, 꽃들도 남쪽을 향해 눈을 뜨고 나무도 남쪽으로는 잎이 더욱 무성하다.
그 땐 따뜻한 남쪽이었던 사람, 정남향이었던 문장, 그래서 한 시절 잘 살아낼 수 있게 해 준, 여기 저기 많았던 그 남쪽이 지금은 어찌되었다는 것일까?
날로 각박해져가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온다던 봄은 오지 않고 여름 가을을 건너뛰면서 남쪽은 어느새 추운 겨울에만 머물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쉬운 말로 군더더기 없이 풀어내고 있다.
커다란 하품 하나 지나간다
거친 술병 하나 하품을 따라간다
낮은 독경 소리
높낮이를 따라 요사채를 지나간다
늙은 보살을 업고
햇살 한 줄 따라간다
묵독으로 읽어도, 소리 내어 읽어도
읽히지 않는
삶의 보문품
천길 따라 난 인연 따라간다
순한, / 김인구
다시올 문학 48 2021 여름호
보문품은 불교 법화경의 제 25품으로 관세음보살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온갖 재난을 구제하고 소원을 이루게 하며 널리 교화하는 일을 설파한 글이라 한다.
그럼 삶의 보문품은 어떤 것일까?
시인은 햇살 따스한 어느 오후 작고 고요한 절 마당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스님 한 분 요사채 뜰을 지나가고 또 한 스님이 술병을 들고 따라가고 낮은 소리로 독경을 외이며 또 스님 한 분 지나가고 늙은 스님 한 분도 햇살을 등에 지고 지나간다. 그지없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절간의 풍경이다.
법화경의 보문품을 이루기 어렵듯이 삶의 보문품을 실현하기란 얼마나 더 어려울까?
그러나 삶을 위한 악다구니가 없이 그저 순하기 만한 작은 절간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하품하듯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있다.
가짜 이빨이 진짜 이빨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가짜에게 진짜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내 삶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가 가짜의 숫자보다 적어서
밀려나는 것은 아닌가
나도 가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짜 이빨 / 김호길
文學 史學 哲學
2021년 가을 제 66호 한국불교사연구소
얼마나 쉽고 간결한가?
요즘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긴 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내용조차 이해할 수 없고 어휘가 꼬이고 반복되어 도저히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다. 詩가 왜 그렇게 길고 어려워야 하는가?
가짜 이빨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속에 숨은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진짜가 가짜의 숫자보다 적어서..... 그렇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수의 열세는 오늘날 바로 실패를 의미한다. 이 시대의 마뜩찮은 현실을 은근히 빗대고 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 진짜는 어느 골동품상에 가서나 찾을 수 있을는지.
나는 과연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내 편이 많아야만 진짜가 될 것이니 언뜻 답하기 쉽지 않다.
다시올문학 49 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