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3.木. 정말 이웃사촌인가, 중국의 미세먼지와 일본의 지진
03월23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인터넷 기사로 큼지막하게 떠 올라와있습니다. ‘하루키 쟁탈’ 4파전.. 선인세 첫 20억원 돌파하나? 이 기사를 보고 아침부터 기분이 열폭烈爆 씁쓸했습니다. 지난 2월24일엔가 신간 발매된 일본인 소설가 하루키의 책을 선인세 20억 원 이상을 주고 사들이려는 우리나라 출판사 네 곳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세印稅란 저작물을 발행해서 판매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저작자에게 저작물이 팔리는 수량에 따른 비율로 치르는 돈을 말합니다. 그러면 선인세先印稅란 책을 발행하기 전에 책 이름만 먼저 사오는 값이라고 설명을 하면 되겠습니다. 선인세를 20억원 주고 한글판 저작권을 사오면 한국시장에서 대략 200만부이상이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느 출판사측에서는 주변을 잘 정리하면 100만부만 팔려도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입장입니다. 200만부와 100만부는 100만부 차이가 나는군요. 100만부라니... 요즘 웬만한 한국소설은 5,000부도 채 팔리지 않습니다. 내가 쓴 소설이라면 글쎄, 100권도 흥흥.. 아무렴 70권도 팔리지 않을 듯합니다. 경기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비용부담이 큰 건축경기가 바람을 타고, 하루하루가 힘든 서민 가계에서는 제일 먼저 대표적 문화비용인 책과 꽃을 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200만부나 100만부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표 하루키라는 브랜드가 한국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모양입니다. 그러자 이런 기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4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핸가 정미조가 불꽃이라는 노래를 들고 일본 동경가요제에 출전을 한다고 하자 자리에 함께 있던 고교선배 한 분이 그랬습니다. 야 ~ 한국가수 다 죽었냐, 정미조가 한국대표로 국제가요제에 나가게.. 나도 조금 생뚱맞기는 했지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당시, 그러니까 1970년대 정미조는 꽤 인기 있는 가수였으나 아무리 봐도 노래에 인생과 신념을 바치는 프로라기보다는 음색 무난한 아마추어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 즈음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김추자나 정훈희에 비하면 노래를 천직天職으로 삼고 있는 가수인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 나름으로는 표시가 났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나도 꼭 그 심정心情인가 봅니다. 야 ~ 한국 소설가 다 죽었냐. 안방 문을 다 열어주고도 책상에 고개만 쳐 박고 있게... 몹시 화가 납니다만 이것은 한 사람의 작가나 몇 사람의 독자가 이 상황을 고치거나 해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에 대한 문제라면 언제나 해결 방안은 우리.. 우리들.. 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정치는 해묵은 이념논쟁과 지역갈등으로, 경제는 달러와 위안화의 압박으로, 사회는 부의 편중으로 인한 사회 불균형과 계층 간의 갈등으로 인해 성장과 균형의 쌍 목줄이 조여 있는 상황인데 문화마저도 제 본령本領을 지키지 못한다면 뭐 하나 의지할 구석이 없는 한 나라의 모양새가 되어있습니다. 그야 시장논리에 따라 독자들의 구미에 맞고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독서시장에서 잘 팔리는 책을 출판사에서도 많이 발간하는 것을 탓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단문短文에, 가볍고, 톡톡 튀는 듯한 장정으로 무장한 일본식 도서圖書 일변도라는 점에서 볼 때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심히 걱정스럽기도 의아疑訝하기도 한 우리 독서문화의 현상입니다. 그럼 잠깐, 2006년도였던가 2007년도였던가, 그해 가을이 되자 영락없이 노벨문학상 후보가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TV를 보았는데 문학평론가라는 30대 고운 여자가 나와서 예쁜 미소를 곁들여가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벨문학상과 역대 문학상 수상자들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고는 “이번 가을에는 제가 좋아하는 하루키가 꼭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이 왔으면 하는 행복한 바람입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렇다면 ‘별들의 고향’ 작가인 최인호는 왜 소개를 해주지 않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습니다. 문학이나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나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은 시인이 문학상 유력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공공방송을 통해 저렇게 사적표현을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 어느 여류 문학평론가의 양식良識에 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필력이나 작품 영향력이 하루키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노벨상은 원칙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어서 고故 최인호 작가에게는 노벨 문학상을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지난해에도 노벨문학상 후보 고순위에 오르내리던 하루키였지만 엉뚱하게도 미국 뮤지션 밥 딜런에게 노벨상의 영예가 돌아가 버렸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밝힌 수상 이유는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 창조’ 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하루키의 문학상 후보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나? 하는 것은 더 궁금한 대목이었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해결은 뒤로 미뤄둔 채 2020년 동경올림픽을 유치한 막강의 일본 로비력이 하루키를 노벨문학상 단골후보 만들기의 매커니즘으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책을 읽고 느끼고 사색을 해야지 책이 사람을 읽고 조절을 하고 판단에 관여를 하면 문화의 가장 천박한 형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도덕道德도 비도덕非道德이 있고 천박한 도덕율이 있는 것처럼 문화文化도 비문화非文化가 있고 천박한 문화형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986년이든가 1990년이든가 일본에서는 쓰시마라고 부르는 대마도에 처음 들어가 보았습니다.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비행기로 떠서 한 30여 분 걸렸던 것 같습니다. 8월 초순경이어서 날씨가 매우 덥고 뜨거웠습니다. 일요일 이어서였던지 주도인 이즈하라의 예정된 도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일부 관광객을 제외한다면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한국으로 전화를 해야 했는데 휴일이라 전화국은 문이 닫혀있었고 국제전화를 거는 곳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안했습니다. 좀 답답하고 궁금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습니다. 대마도는 거의가 산이고 산에는 나무가 엄청 많았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숙소는 이즈하라의 여관에서 묵었는데 여관집 주인 말이 시이네推根 지역에 가면 일본 중에서도 대마도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돌지붕(이시야네)石屋根이 있는 집들이 몇 호 있다고 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강해서 지붕을 다다미 크기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이네 앞바다에 가면 한국에서 밀려온 과자 봉지나 쓰레기들이 해안가에 널려있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야 할 만큼 많이 있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밀려온 쓰레기가 조류를 타고 대마도 서쪽 해변 가에 쌓인다는 이야기에 흥미가 끌렸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 일찍 시이네에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해보았습니다. 시이네 바닷가를 간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관집 주인이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룸메이트인 전주시청 문화관광과 한선생과 새벽 일찍 일어나 여관집 주인이 태워준 승용차를 타고 시이네까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8월이라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금세 날이 밝았으나 날씨는 살짝 흐렸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시이네 앞바다에서 부산이 보인다고 해서 사실은 내 눈으로 부산을 바라보는 호사豪奢까지 누려볼 작정이었는데 그것은 그만 포기를 했습니다. 거의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려서 이즈하라 시내에서 출발하여 시이네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센 바닷바람을 안고 돌지붕 집을 구경한 뒤에 시이네 앞바다로 가보았습니다. 과연 시이네 앞바다에는 한국산 라면봉지와 스낵봉지들이 많이 널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바닷바람이 강한지 거무스름한 파도의 물보라가 우리를 향해 넘실넘실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변을 따라 조금 걸어보았더니 플라스틱 장난감, 합판조각, 폐타이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일부러 오려고 애를 쓰지 않고 바닷바람이나 조류에만 맡겨두어도 대마도 서편해안이나 일본 큐슈 쪽으로 저절로 도착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나라 삼한시대에 왜倭라는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마한馬韓의 세력에 밀려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옛 이름인 왜倭가 우리나라 고대 삼한의 왜倭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역사학자들은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고대국가 성립과정에서 멸망당한 가야의 유민과 백제 왕족들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고려가 멸망당했을 때 고려의 지배세력이었던 王씨들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를 했습니다. 조선에 들어서서 고려의 지배세력이었던 王씨 성이 全씨나 玉씨나 田씨로 성을 바꾼 것을 보면 王씨들이 조선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저 동해 바닷가에서 배나 뗏목만 띄우면 며칠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대마도나 일본 땅이었으니 비통한 가슴을 움켜 쥔 망국亡國의 유민들이나 지배세력들이 전통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동해를 건넜을 것입니다. 더욱이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로 49.5Km이고 대마도에서 큐슈까지는 80Km라고 하니 거리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대마도나 일본이 그렇게 멀리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이네 앞바다를 걸어보는 것은 단 이십여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참으로 많은 것들을 오래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예정된 아침 일정에 맞추기 위해 시이네에서 부랴부랴 출발을 한데다가 또 여관집 주인의 유쾌한 과속에 힘입어 이즈하라 여관집에 잘 도착을 했습니다. 그날 새벽4시부터 아침7시까지 3시간 동안의 맞춤 과외활동은 두고두고 일행들에게 부러움과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여관에 도착을 한 후 아침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나서면서 주인을 만나 고마움을 표한 뒤에 가지고 있던 일본돈을 감사의 표시로 드렸더니 두 손을 저으면서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말 말고는 뭐 달리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난감해하는 중에 옆에 서있던 한선생이 갑자기 자신이 쓰고 있던 벙거지 모자를 벗어 주었더니 여관주인이 엉겁결에 받아들고는 몇 번씩 인사를 했습니다. 그 뒤로도 여관주인께서 한선생 모자를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습니다. 가만 생각하면 뼈에 사무치고 가슴 아픈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이지만 현실과 미래는 감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환경環境과 상황狀況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불의 고리라고 부르는 환태평양조산대에 걸려있고,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와 미국영토인 하와이 사이에 걸려있는 나라이면서 태평양을 가로막고 있어서 사사건건 서로 간의 이해충돌에 민감한 이웃나라라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국력國力과 외교력外交力이 큰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